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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6 추천 수 0 2022.07.18 12:58:42
.........
성경본문 : 눅12:50-52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50-52: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했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안 받았느냐? 물세례는 세례요한에게 받았다. 그러면 또 무슨 세례가 있느냐? 이제 물세례가 아니고 의를 이루는 세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그러니까 그 세례를 받는 쪽으로 진행인데, 그게 이뤄질 때까지 예수님의 마음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의를 이루는 이 세례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자를 위해서 의로써 고난을 받아 죽었다가 살아나는 세례다. 사망으로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세례, 사망으로 완전히 잠겼다가 살아나는 생명의 세계,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세례. 그러니까 완전히 탈바꿈이 되는 것.

 

물세례를 받을 때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 쪽으로 바라보는 것. 그 다음에 그렇게 들어가 있으면서 더러운 옷이 빨래 방망이로 얻어맞으면서 점점 구정물이 빠져나가면서 깨끗해지듯이 자기 속의 세상 애굽성 세상성이 점점 빠져나가면서 하나님의 의로서 채워나가는, 깨끗해지는 것, 하나님 쪽으로 실상화 돼 가는 것. 물세례 속에는 이런 미래 지향적인 면으로 들어있다. 사망으로 들어갔다가 생명의 세계로 완전히 탈바꿈해서 나가는 것. 이 작업을 거쳐야 불이 붙는 거다. 그러니까 물세례는 성령의 말씀의 영능의 실력으로 불을 붙이는 초단계이다. 그것마저도 안 돼 있으면 성령이여, 오시옵소서이건 안 되는 거다.

 

신앙의 이치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예수 믿는 건 그냥 인간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신의 속성품의 역사는 살아가면서 비록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현재의 자기의 신앙정신이 하나님 앞에 적중성으로 바로 놓여져야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갈 때 바로 입혀지게 된다. 처마 끝에서 물이 떨어질 때 낙숫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을 정확히 놔야 그릇에 물이 차게 된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열심 부리려는 것부터 갖지 말고, 그건 나중에 하고, 먼저는 하나님 앞에 바른 그릇이 되어야 채워지는 것이다. 이치적으로 그렇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망으로 완전히 죽었다가 순전히 하늘의 새생명으로, 하나님과 똑같은 새생명으로 돼 나와야 그 다음 단계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거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예수님의 그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신앙 질적인 면에서 네가 빨리 온전히 죽으면 그만큼 진리이치로 빨리 살아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성령을 선물로 주겠다는 것이다. 이게 신앙의 질의 순서다. 그러니 육덩이 세상덩이가 안 깨지고 있는데 성령을 달라고 하지 말아라. 그러면 필연적으로 귀신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신앙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의 인격이 성품적으로 바로 돼 나가야 한다. 그게 신앙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고, 그런 사람을 잡고 쓰시고, 그런 사람을 당신의 역사로 나타나게 하시는 거다. 질적인 면에서 그렇다.

 

예수님의 출생해서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나이로 보면 33년의 생애의 시간 속에서 하나하나 사건을 통과할 적마다 당신의 언행심사 하나하나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최고의 지공법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은밀한 뜻까지 합격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리새교인들은 자기 죄를 위해서 양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가 나를 위해서 죽고 나를 위해서 사는 것까지 복합적으로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마다 가서 양 잡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당신이 양이 돼서, 또 당신이 제사장이 돼서 속죄의 사역을 하신 것이니 당신의 사심 속에는 이런 것이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역할이 복합적으로 양도 되고 제사장도 되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33년의 걸음걸이가 통째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신 것이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전도한 기간만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30년의 삶은 3년간의 전도활동을 위한 준비단계이니, 그 준비기간 동안이라고 해서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없이 아무렇게나 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표현으로 말한다면 3년 기간 동안의 전도가 될 수 있기 위해서 30년간을 닦으신 것이다. 그 다음에 광야로 나가서 세례를 받고 마귀의 시험에 붙여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통과가 되는 것이다. 30년을 바로 못 살면 3년의 기간 동안에 마귀시험에 바로 넘어간다. 합격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겼다는 것이 평소에 성경도 안 봤는데 이긴 것이냐? 성경말씀을 가지고 이겼지 않느냐?

 

우리에게도 시간과 사건을 거치게 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이치의 신앙이 들어갈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그런 신앙정신을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뭉텅거려서 해서는 안 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왜 자기의 신앙이 체계 있게 자라지 못했나를 자문해 보면 뭉텅거려서 자기 좋은대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집을 지을 때 자기 기분대로 해 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설계대로 안 지으면 시청에서 와서 다 부순다. 그러니까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자기에게 오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법대로 안 됐다하는 걸 깨달으라고 두들기는 것이다. 이게 아니란다면 다른 해석이 있느냐? 우리가 사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사건 환경을 하나하나 통과할 적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지공법에 만족을 드려야 한다. 이 신행의 의가 없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는 거다.

 

어린 자식이 다 클 때까지 부모가 그 자식을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답답함이 있다. ‘저게 언제 커서하는 게 있다. 그 크기까지의 부모가 생활 속에서 견뎌야 하는 그 답답함. 부모에게 그런 마음 있듯이 교회 목사님들은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진리지식의 성장 면에서 언제 하나님 앞에 자라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느냐?’ 그 크기까지의 그 답답함.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자빠지고. 그러니 마음속에서 한숨이 나오고, 그러느라고 머리카락이 다 허옇게 세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감화 감동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희망을 바라보면서 언제 거기까지하는 이 답답함. 옳은 걸 놓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 좋겠는데 이상한 데서 배워서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면 그 마음은 화인 맞은 것이다.

 

51-52: 집안에서부터 분쟁이다. 언제부터 이랬느냐?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먹은 후로부터 이런 일이 생겼다.

 

부부가 세상성적으로 좋아 죽어도 그게 평화냐? 성경에서 평화라 할 때는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다. 질이 그렇게 들어간다. 그런데 하나님과 평화 또는 화평이 아닌 세상적으로 화평이 돼 있다면 이거는 하나님과 불화다. 부부가 세상요소로써 아무리 평화로워도 그거는 물질성적 세상의 바람을 탈 수밖에 없는,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로써의 평화요 행복이기 때문에 사건이 와서 그 면에 타격을 주면 자기의 속셈들이 막 드러난다. 이걸 미리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화평 평화라 할 때는 먼저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으로 통일이 돼야 한다. 하나님과 의사단일을 이루자면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성도 모르고, 질적 본질도 모르고, 이치도 모른 채 내 쪽에서 하나님, 나 말 잘 듣겠습니다. 나랑 화평합시다한다면 이게 되는 말이냐? 이치가 안 맞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기도를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회개가 아닌 일종의 반성이 많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한 후에 하나님 앞에 기본생활을 잘 못하던 것을 바로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은 모른 채 기본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그것마저도 세상 육에 속한 것, 세상 일반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뜻을 알게 되면 즉, 의사성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이나 이미 죄를 지은 거는 바로 돼 들어간다. 그런데 신앙의 질이 하나님 앞에 바로 놓이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리 행동을 말해봐야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자꾸 그렇게 된다. 자기 속이 세상성이니 자기의 세상성에 맞지 않으면 원망불평이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질이, 의사성이, 인격이, 성품이 하나님의 것과 맞지 않는 그 자체가 죄다.

 

세상 사람들은 다 화평을 원하는데, 전쟁이 없이 모두 잘 살기를 원하는데 가만 보니 예수님은 그와 반대다. ? 싸움을 자꾸 붙이러 왔다고 한다. 온 세계 사람들은 유엔도 만들어서 화평하게 살자고 중재하고 하는데 예수님은 자꾸 싸움을 붙이러 왔다고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화평하자. 사랑하자. 평화하자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싸움을 붙이러 왔다고 하니 이 예수를 어떻게 믿겠느냐? 싸움쟁이가 되려고 믿느냐? 모두 물질축복으로 잘 살기를 바라는 소원성으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꾸 그게 안 되도록 쑤시고 있다. 그러니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몇 명이나 이해하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셨고, 천국복음 하늘의 화평을 주러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느 화평을 원하는 거냐? 세상 물질적 환경적 조건적 화평을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것이 선이 아니고 사랑이 아니고 의가 아닌 것은 없다.

 

사람이 죽으면 빨리 썩는 게 좋으냐, 안 썩는 게 좋으냐? 빨리 썩는 게 좋은 것이다. 시체에게 똥파리를 날려 보내는 것도 당신의 선이다. 우리가 깨닫는 면에서 보면 전부는 선이 아닌 게 없다.

 

일본의 지진은 마귀가 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했다고 하면 일본사람들이 듣기 좋으냐? 어느 목사가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섬겨서 지진이 난 거라고 했다는데 그 말 자체는 맞는다. 얻어맞는 주제에 생각을 하고 잘못했습니다해야 한다. 무슨 말을 했건 맞는 말이라면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면 쓰나미는 누가 일으켰느냐? 지진은 마귀가 일으켰고, 쓰나미는 하나님이 일으킨 것이냐? 그러면 지구는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구를 만들 때 인간이 물 한 사발이라도 갖다 줬느냐? 없다. 전부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인간 자기 보기에 나쁜 것은 마귀가 갖다 준 것으로 생각을 해서 자꾸 마귀가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기 보다는 마귀가 싫어하는 것을 네가 가져라.

 

부분적으로도 알아야 하지만 우리가 전체성적인 의미로도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돌아가는 것인데, 지구 땅덩어리가 돌아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법칙적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놨다. 그래서 많은 비를 내려서 땅이 정화되게 한 부분도 있고, 하늘에 먼지가 많으면 비를 내리게 해서 하늘을 맑게 하는 것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비가 올 때 눈썹이 있어서 자기 눈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돼 있다. 그러니 눈썹도 함부로 자르지 말아라. 다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왜 잡아 뽑고 밀고 하느냐? 하나님이 내가 네 눈에 눈썹을 심어놨는데 그거 다 어디 갔느냐하고 찾으시면 어쩔 거냐? 우리가 그런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몸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너의 몸은 하나님의 전이다.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사람을 보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적중성을 가지고 그 사람의 중심사상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지식을 가지고 자기 몸을 얼마나 건강하게 돌보느냐? 얼마나 부지런하냐? 그러면 그 사람은 사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화평을 주러 왔다. 왜 세상의 모든 인류는 하늘의 화평을 받아야 하느냐? 왜 하나님과 화평을 해야 하느냐? 그것은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하늘의 화평의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하늘나라에서 당신과 화평으로 사는 그 뜻을 가지고 인간을 만들었고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과의 화평이 전제된 말씀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인간이 깨버린 거나 다름이 없다. 먼저 생명과를 먹으라고 했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알려줬는데도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만일 선악과의 맛이 어떤지 궁금하니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먹으라고 했다면 먹으라고 했다고 해서 또 따먹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에게 위험한 것을 놓고 이건 먹지 말라하지 말고, 그렇게 말을 해도 자꾸 맛을 보려고 할 테니까 아예 안 보이는 데다 놔야 한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멸망될 인간이 죽을 때까지 인간들끼리 아무리 화평을 부르짖어도 이건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다. 그러니까 입이 아프게 화평을 부르짖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날에 천군천사가 찬송하기를 하늘에는 평화요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는 걸 자꾸 유엔이 부르짖는 화평으로 알고 있다. 이건 틀린 거다.

 

오늘날 교파나 교단을 보면, 로마 교황청도 그렇고 거의가 세상 물질적 개념의 화평 평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런데 그게 예수님하고 맞는 것이냐? 맞는다면 본문의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는 이런 대목은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아닌 마귀가 말한 거냐?

 

우리는 원리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왜 반대적인 말씀을 했을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 말을 해도 선이고 저 말을 해도 선이요 한 목적이요 한 뜻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아무리 화평을 부르짖어도 죄 아래 사망권 아래의 화평은 진정한 화평은 아니고 모두가 자기 욕심 쪽으로 들어있다. 이건 죽은 화평이다. 세상 속화된 교회도 선악과 먹은 개념의 화평을 부르짖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 선악과 먹고 나온 화평을 부르짖는 사명자도 많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서 네가 화평의 사자냐?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의 화평, 신령천국에서 누림성의 화평이다. 이 화평은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는 의사단일성으로 주님의 속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자가 하나님과 화평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온전하니 너희들도 온전하라고 하셨듯이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바꿔져야 화평이다. 하나님도 절반 물리고 나도 절반을 물려서 합의점을 찾은 것은 화평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일방적이어야 화평이 되는 거다.

 

예수님 당시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서 준 오경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였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화평은, 그들이 부르짖는 화평은 어느 지식의 화평이냐? 선악과 먹은 지식의 화평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와 손을 잡은 화평이다.

 

저주받고 타락된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하나님과 대립과 마찰과 충돌적인 것밖에 없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세상과 화평하자고 흘러가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가 화평을 알기를 어느 쪽 화평을 지식하고 있느냐?

 

:에서 땅에서 짐승이 올라오는데 이 땅의 짐승이 바다의 짐승을 광고하고 선전하고 화평을 부르짖다가 그들의 발길에 차이더라. 그런데 오늘날 개개인마다 교인들의 신앙사상의 화평이 어디에 붙었는지? 어떤 개념으로 화평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하는 것은 말세교인들이 어느 쪽 화평을 하고 있다는 것이냐? 세상과 화평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세에 거짓 종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어느 쪽 화평의 지식을 가진 종들을 말하느냐? 세상이다. 예수 믿는 주님의 식구인 자기가 교회 안에서 누구 편의 지식을 가지고 누구 편에 서서 합세해서 싸우고 있는지? 오늘날 자기의 신앙이 보여져야 한다.

 

화평의 원리.

 

1. 각치성이 있다. 개개인마다의 각자의 생각.

2. 합치성이 있다. 너와 나의 의사가 같아서 하나로 되는 것.

3. 일치성이 있다. 너와 나의 것을 합쳐서 더 나은 새로운 것으로 나오는 것.

4. 단일성이 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좋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주고 찬성을 하는 것이라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의사를 내가 갖는 것. 성경에서의 하나님과의 화평은 단일성의 화평을 말한다.

 

내 것은 아무리 좋아도 천국에 못 가져간다.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과 영광이라 해도 세상의 것으로 인한 것은 다 임시성이다. 성경은 천국복음 하늘나라를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한 질을 말하는 거다.

 

깨지기 쉬운 우리의 몸은 일종의 항아리이다. 구약의 법궤 안에 두 돌판과 항아리 속에 신령한 만나가 들어있다. 그런 것처럼 항아리같이 깨지기 쉬운 우리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어야 하고 하늘의 신령한 말씀이 들어있어야 한다. 즉 인간의 것은 전혀 없는 순전히 하나님의 본질로 된 그 의사를 내 속에 갖고 있어야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 되는 거다. 그 분의 인격이 내 속에 들어와야 바로 되는 것이다. 이게 성령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다.

 

오늘날 성령 달라하며 불로 불로하는 건 성령이 아니다. 진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로 들어간다. 이건 절대적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닌 일은 안 하신다. 이게 아니라면 오만 잡귀신이요 악령이다. 자기가 아무리 믿음이 없더라도 이치가 분명하다면 그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치가 분명한데도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해서 안 받아들이면 별 수가 없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이건 마귀 집이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세상이라고 하는 좀이 파먹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거다. 세상이라는 정신이 자기의 마음을 파먹고 자기의 머리를 파먹으면 그 다음엔 바른 정신이 안 된다. 참 정신이 안 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똑같다. 그 분의 소원 목적도 늘 똑같고, 어느 시대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은 똑같다. 천국에 들어가서도 똑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면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상태가 하나님의 그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자란 게 있고 못 자란 게 있고 비뚤어진 것도 있지만 최소한 기본구원을 얻은 그 기본은 돼 있는 거다. 그 다음에 이제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들어가고 자라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보려면 항상 하나님의 온전 완전을 자기 눈앞에 원칙으로 딱 전제해야 한다. 그 다음에 사사건건 벌어지는 그 안에서 이룰구원을 이뤄갈 수 있는 도리와 이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질도 모르고 소원 목적도 모른 채 제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안 된다. 성경을 보는 그 깊이는 얕고 깊고 하더라도 원칙에는 맞아야 한다. 자기가 서울 가는 길을 잘 안다면 자기가 서울은 안 가도 다른 사람에게 서울에 가는 길을 가르쳐 줄 수는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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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1 마태복음 착하고 충성된 종 마25;21-24  전원준목사  2022-06-30 194
17510 창세기 (계시보기)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김경형목사  2022-06-29 72
17509 사도행전 맥추절의 축복 행2:1-4  강승호목사  2022-06-29 222
17508 시편 복 있는 사람 시1:1-6  강승호목사  2022-06-28 213
17507 누가복음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눅12:45-48  김경형목사  2022-06-27 69
17506 요한복음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요1:14-28  김경형목사  2022-06-27 51
17505 사무엘상 (계시보기)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16:7  김경형목사  2022-06-23 135
17504 고린도전 내게 주신 은헤로운 부활 신앙 고전15;1-28  전원준목사  2022-06-23 174
17503 마가복음 지붕을 뚫는 믿음 막2:1-12  강승호목사  2022-06-23 245
17502 사도행전 성령님이 행하신 일 행2:42-47  강승호목사  2022-06-22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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