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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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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예수님의 33년의 육신의 생활은 부활이 될 수밖에 없는 가치판단 이해타산 소원 목적으로 사셨다. 율법의 이면은 안 죽는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주님은 안 죽는 삶을 사셨고, 사람과의 관계성을 지을 때도 전부 안 죽는 것으로 살려냈다. 주님은 인격과 성품이 안 죽는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죽으면 부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세상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이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것은 이분들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 정신을 받드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볼 때는 이분들은 예수님으로 닮은 것은 없다. 사람의 육신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게 실상이다. 하나님은 실상적인 존재요, 우리는 허상이요 가상이요 현상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육신은 자기의 실상인 영인성장을 위한 이용물 사용물 활용물이다.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만들고 운행하는 것은 우리를 실상의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요, 인간은 실상인 예수님을 닮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인간 자기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격과 성품이 있고, 가치판단을 해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지었다. 1차적으로 이렇게 지은 것은 ‘네가 어떤 교훈을 받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을 알라는 거다.
2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인간의 기준이요 실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나왔다. 이분께서 좌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의 영을 중생시켰다. 그래서 현재 예수를 믿는다면 잘 믿든 못 믿든 지옥에 갈 염려는 하지 말고 영능의 실력을 길러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은 구원이다. 구원이란 주님처럼 닮는 거다. 이 구원을 위해 에덴동산에 생명과와 일반과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인간에게 생명과와 일반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이 되는 건데, 생명과는 말씀이요 예수요 구원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라서 자기가 이 말씀을 받으면 자기 속에서 참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방종교에는 이런 게 없다. 왜냐? 이방종교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깃들어야 참사람으로 성장이 된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하는 모든 말씀은 생명과라야 한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부터 생명과 대신 선악과를 먹으니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으로 소원 목적해서 사는 것은 아예 없고 사망성으로 살게 되었다. 예수를 믿느냐?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먼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부모부터 세상을 쳐다본다면 그 자녀가 어찌 되겠느냐? 멸망이다.
생명과를 먹으면서 천하를 다스리라고 했는데 자유를 가진 인간이 이 말씀을 버리고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쪽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 결과 고통과 고난과 배고픔 가운데 살다가 죽게 되었고, 서로 원수를 맺으며 싸우는 거다. 인간이 멸망하는 것은 선악과를 선택한 결과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생명과를 먹은 자에게 주어진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울면서 태어난다. 어린아이가 울면서 태어나는 것은 ‘죄 많은 세상을 어찌 살꼬?’ 하며 우는 게 아닌가? 그러면 예수님도 태어날 때 울었을까? 예수님도 울면서 태어났다면 이런 뜻으로 울었을까, 아니면 구원의 사명을 놓고 울었을까? 반대로 예수님이 태어날 때 울지 않고 웃으면서 태어났다면 왜 웃었을까? 당신에게 맡겨진 구원의 사명을 놓고 인간을 구원하심이 기뻐서 웃었을까? 아기가 태어날 때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데, 예수님도 주먹을 쥐고 태어났다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는 게 자기의 구원에 유익이 되겠느냐?
세상만물은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고 있고, 인간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구원을 위해서다. 만물은 우리의 구원에 이용 사용 활용물이다. 이렇게 살지 않고 마음이 세상 것으로 찌들면 온갖 고통과 고민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밖에 없다. 성경은 이렇게 사는 것을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사람의 정신 속에 마귀가 좋아하는 소원 목적이 들어있으면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이것을 쫓아낸다. 교훈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면 자기 속의 귀신이 쫓겨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닌 인간의 본분이다. 타 종교가 있으니까 타 종교와 구분하기 위해 기독교라고 하는 거지 기독교는 타 종교와 같은 룰이 아니다. 타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예수를 안 믿으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사망에게 먹힌 거다. 이것은 심판과 멸망의 길로 가는 거다.
우리는 세상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놓고, 즉 구원에 놓고 기도해야 한다. 세상 것을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여, 다른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소서’ 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세상 것도 다 들어있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사람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가 다 나온다. 학교에서 배우는 일반적인 도덕성이나 사회성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경을 못 따라온다.
세상은 사람을 죽이는 폭탄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다. 세상은 이걸 모른다. 가인의 후손들이 말씀을 떠나 살면서 사람을 죽이는 연장을 많이 만들었다. 하나님을 믿는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 대제사장의 나라를 신경 썼다. 그런데 사람들은 셋의 후손처럼 사는 것보다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을 강하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쓸어버리려고 하는데 의인 하나만 있으면 소돔 고모라가 보존된다. 예루살렘도 의인 하나만 있으면 그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즉 ‘의인 하나만 있으면 너의 가정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너의 교회를 멸망시키지 않겠다. 너의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 이 말이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의가 하나만 있으면 이 의가 자기를 살린다.
사람을 출생시키고 죽이는 것은 누가 하는 거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죽는 것을 붙들고 신앙하지 말아라. 죽어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 미련한 나를 하나님의 지혜자로 만드는 것은 성경밖에 없다. 예수 믿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이방인들이 누구를 앞에 놓고 절하고 신봉하는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 속에 있는 것을 내 속에 넣는 거다.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을 내 속에 넣는 거다. 이러면 내 속에서 모든 것을 살려 나가는 생명력이 발산된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모른다. 기독교의 본질은 영원히 안 죽는 것, 영원히 불타지 않는 게 내 것으로 되는 거다. 그래서 불타지고 없어질 것을 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불타지고 없어질 세상 것을 위해 살던 소돔 고모라가 어떻게 되었느냐? 사람이라면 인격의 수치를 알아야 하겠는데 예수 믿으면서 인격의 수치감을 모른다면 이것은 인격이 화인을 맞았구나.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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