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궁극이 | 2022.08.14 19:36:3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47-51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47-51: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우리 인간은 서로 겪어도 상대를 잘 모른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식구끼리, 그리고 친구끼리, 또는 다른 사람들끼리, 교인들끼리, 목사들끼리 저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하는 것을 잘 모른다. 그 사람을 겪고도 잘 모른다.

 

겪고도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중심을 보지 않고 사람의 모양, 형태, 옷 입은 거, 살림살이, 재산, 사회적 지위 등의 껍데기를 보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걸 기준으로 사람을 보거나, 신앙생활을 하거나, 성경을 보는 것은 외식이다. 우리는 주님처럼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을 해야 한다. 사람의 중심을 보려면 주님의 속성, 이해타산, 소원 목적성, 취미성, 간구성을 기준해서 사람을 봐야 한다. 이건 일반사람들이 사람을 겪고 아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다.

 

우리가 상대를 주님과 밀착이 되게 해 주려고 좋게 해 주다가 그 상대에게 속고 손해를 볼 수도 있는데, 이럴 때는 나는 주님 앞에서 내가 할 일을 한 것이라서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 주었는데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라고 하며 원망 불평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서 깨닫고 더 지혜로워지면 된다. 이러면 내가 그 사람을 이긴 거다. 그래서 상대를 원수로 보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진리중심을 기준으로 놓고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내가 허점이 뭔가? 정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건가? 사적인 감정은 없었나?’ 라는 등의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채워나가야 한다. 인인끼리 잘못한 것으로 원수를 삼으면 안 되고 내가 진리에서 얼마나 이탈이 됐나?’ 하는 것을 찾아서 고쳐나가야 한다.

 

전에 말했듯이 자기가 말씀은 잘 아는데 인인관계가 부드럽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입힌 것만큼 자기에게 고통으로 들어온다. 진리에 바로 못 서면 모든 것이 다 어그러진다. 그래서 자기가 진리를 아느냐? 그 다음에는 인인 관계성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상대를 진리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은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믿음으로 영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대의 육적인 것인 것을 가지고 따지면 안 된다.

 

상대 쪽에서 이렇게 해야 돈을 많이 벌고, 돈을 많이 벌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라고 하면서 육신 쪽으로 나갈 때 내가 아무리 이 상대와 대립이 없더라도 그걸 따라간다면 이건 완전히 육적이 된다. 우리는 내일일도 모르는 존재다. 하루하루 그 때 그 때마다 말씀을 기준해서 최대한으로 살아라. 오늘 바로 못 산다면 바로 사는 내일이 있겠느냐? 현재 바로 못하는데 옳게 사는 내일이 어디 있느냐?

 

우리 인간은 사람을 겪고도 잘 모르지만 예수님은 즉각 아신다. 사람들은 보통 사람의 외모를 보고 사람 좋게 생겼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겉모양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이건 육적이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듯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외적으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고 찾아오셨으니 나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봐야 한다. 만능의 능력자가 인간을 만드셨는데 이 분께서 왜 인간을 모르시겠느냐?

 

사람은 좋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기쁘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우해 주셨나?’ 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처사가 내 눈에 안 좋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하심 전부는 선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으로 대하시는데 내가 그걸 악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몸을 사람에게 의탁지 않았다. 왜냐? 인간을 즉각 다 아시니까. 그래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 했지만 그들이 어떤 이유로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고 하는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탁지 않고 피해버렸다.

 

현재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속성은 전부가 선악과를 먹은 데서 나온 저주 받고 타락된 상태다. 선악과를 먹은 데서 나오는 것은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조건에 따라 100% 다 변한다. 세상은 다 그렇다. 그래서 믿는 내가 이 기준으로 살고 있으면 나도 똑같이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러면 일반적으로 아무리 사람이 좋다고 해도 세상의 이해타산을 좇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기준이 서 있으면 이 사람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지식을 기준으로 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의 이해타산을 좇아가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아무리 욕심이 없다고 해도 예수 믿읍시다라고 하면 잘 안 받아들인다. 안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좋다고 해도 어떤 일로 인해서 자기의 이해타산에 손해가 오면 서로 욕하고, 모함하고, 원수가 되고, 결국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세상은 그렇다. 믿는 우리는 이런 정신에서 떠나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적 실상을 기준으로 하고 살지 않으면 그 마음 속에 세상성적 기준이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불신자들처럼 사람을 속이게 되고, 속고, 피해를 당하고, 피해를 주게 된다.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신데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물질부자에 욕심을 내는지? 물질의 복을 받으려고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 집에 살다가 삼촌도 속이고, 또한 자기도 삼촌에게 속았는데, 이렇게 해서 물질을 많이 가진들 그걸 붙잡고 얼마나 살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야곱은 아들들에게도 당하고 속았는데, 우리도 야곱처럼 살다가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내가 속기도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느냐? 우리는 이런 걸 겪으면서 다시는 세상의 것을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야지라고 하면서 결심과 각오를 하는 게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바로 만들어 주시려고 이런 저런 사건을 겪게 하시나?’ 라고 하면서 한 편으로는 감사를 하고, 한 편으로는 바로 나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게 믿음생활이요, 이룰구원에 매진할 때 이런 생활이 되어지는 거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걸 모르면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과 늘 마찰과 충돌과 대립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면 늘 사건에 치우치고 상황에 치우치게 되어서 일을 망쳐놓고, 나중에는 수습이 안 될 정도가 된다. 여드름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자꾸 손으로 짜면 어떻게 되느냐? 얼굴에 흉한 자국이 남는다. 자기의 육이 잘 되게 하고 싶으냐? 속이 잘 되면 육은 저절로 잘 된다. 이게 예수 믿는 이치다. ‘속이 깨끗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그래서 문제는 자기 할 탓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역사를 다 체험하고 갈 자들이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해 이 말씀을 하셨는데, ‘간사한 마음을 신앙 면으로 보면 마음을 허탄한 것에 두면 이 사람은 거짓말도 하게 되고 간사한 짓도 하게 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교활하다고 하기도 하는데, ‘교활이란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목적에 이용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면 술집여자가 남자손님에게 잘 해 주는 것은 이 남자를 바로 만들어 주려는 거냐, 주머니의 돈을 노리고 그러는 거냐? 돈을 뺏으려는 거다. 이게 교활성이고 간사성이다. 악한 거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간사한 사람이 많고 간사한 목사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자기의 주머니를 채운다. 그런데 표현상 간사하다고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자타의 구원을 위해 방편 면에서 남 보기에 간사하게 보일 때도 있는데 이건 주님께 밀착시키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간사한 게 아니다.

 

믿는 사람을 주님께 더 밀착시키려고 할 때 말로만 해도 밀착이 되는 사람이 있고, 등을 두들겨주고 엎어주고 해야 밀착이 되는 사람이 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일수록 이런 일반과의 방편을 써서 주님과 밀착되게 해야 하겠고, 예수 믿은 지 오래 됐고, 구원이 뭔지 아는 사람은 말로만 해도 알아 듣고 주님께 더욱 밀착이 된다. 무조건 좋은 말이나 물질을 주면 믿음이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 신앙의 이치를 바로 알려주는 게 더 급선무요 중요하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는 마음이 있고, 올 수 없는 마음이 있는데, 간사한 마음은 하나님 알에 올 수 없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된 마음은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다. 예수 믿고 성경을 줄줄 외울지라도 이 사람 속에 세상성이 들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간사한 마음이다. 세상성을 가진 교인, 세상 것을 가르치는 목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간사하고 교활한 마음이다. 뱀의 입과 같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모세나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신다고 한 성경의 예언을 믿고 그 메시아가 오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상징적 의미다. ‘그 통치를 바라고, 그 통치 속에 살고 싶어 하는구나하는 냄새가 난다. 사람에게는 마음에 운이 도는 게 있다. 마음이 슬슬 뜨거워지는 게 있는가 하면 마음이 슬슬 차가워지는 것도 있다. 마음이 누구에게서 점점 가까워지는 게 있는가 하면 점점 멀어지는 것도 있다. 이걸 느낄 수 있는 인간이고, 이런 걸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이다.

 

45절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성경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을 보면 나다나엘의 신앙심이 어디에 있었구나하는 게 나오는 거다.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늘 성경에 관한 말이 없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앙심이 없다고 보여진다.

 

49-50: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다. 이들의 입을 열어서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주는 거다.

 

4:31 이후로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사람들과 함께 이 말씀을 듣던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하는 말이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고서는 곧바로 이어서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했다.

 

8:20 이후에는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하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했다. 5:1 이후로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셨을 때 무덤 사이에 거하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을 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했다.

 

이런 고백들을 보면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의 본질화로 된 신앙에서 나온 고백이냐? 성경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신앙적 참 지식에서 나온 고백이냐, 세상적 종교적 지식에서 나온 고백이냐? 인격화 되는 고백이냐, 인격화 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백이냐? 오늘날 자기의 고백은 어떤 거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기독교인이 땅에 속한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는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장엄한 일을 네가 볼 거다. 하나님의 큰 일을 볼 거다. 세상 땅의 생각을 가지고는 큰 일을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된다고 믿는 거짓이 없는 심령을 가진 나다나엘에게 콕 집어서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전체적인 말씀을 되씹어 보면 그 분위기가 큰 기쁨의 약속을 하시는구나.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어떤 곳에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의 분위기가 너는 여기에 필요가 없으니 가거라하는 분위기가 있고, ‘마침 잘 왔다라고 하는 분위기가 있다. 성경에도 내가 있어야 할 분위기인지 없어야 분위기인지, 자기가 하는 게 주님이 역사를 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건지, 다른 사람까지 쫓아버리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건지가 있다. 이걸 잘 봐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천국복음 운동의 활동을 보여주신 거다. 야곱도 꿈으로 이런 장면을 봤는데, 왜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표현을 쓰는 거냐? 뭐 하느라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냐? 뭐 하느라고 바쁜 거냐? 이건 한 마디로 말을 하면 서로가 연락관계라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게 무슨 의미냐? 사자들이 주님을 연결점으로 해서 천국복음의 활동을 끊임없이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인간의 표현과 용어를 들어서 어떻게 하면 당신을 나타내 줄까?’ 하는 주님의 숨은 뜻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왕하:에 보면 생도가 나무를 찍다가 도끼가 연못에 빠졌는데 엘리사가 와서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나무는 당연히 물 위에 뜨는 건데 쇠가 뜨는 게 무슨 뜻이냐? 창세 이후 누구에게 물어봐도 쇠가 물에 뜬다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 그런데 이것을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물에 던지니 도끼가 물에 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붙이고, ‘십자가를 붙이고, ‘구원을 붙이면 다 성경해석이냐?

 

나무를 물에 던지니까 그 물에 빠졌던 쇠가 물 위로 뜬다는 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냐? 그러니까 구원의 일은 인간 네 상상에 들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거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하도 신기하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직접 봐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께서 인간 되어 오시기 전에 영원 전서부터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는데, 이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요, 이 예수=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적인 성품으로 닮게 하려면 일반이치가 아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영적 이치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학교는 물질이치의 법칙은 가르치지만 영적 이치는 가르치지 않는다. 신학교에서도 영적 이치보다는 역사적 문자적으로만 가르치는 곳이 많다. 예수님께서 문자로만 가르치셨느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셨는데, 이걸 일반적인 생각으로 들으면 욕이다. 그러나 영적 사상적으로 보면 욕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의 질을 말해주는 거다. 이렇게 깨닫는 게 성경을 영적으로 아는 거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구약에 보면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을 야곱에게 보여주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을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한 일이 없었는데 무슨 뜻으로 나다나엘에게 이 말씀을 하신 걸까?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이 주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다른 신비로운 일을 본 자들은 더러 있다. 변화산상에서 세 제자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줬고,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보자기에 들어 있는 각종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한 것을 보여줬고,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하늘이 열리고 신기한 것을 보여줬고, 구약에 에스겔에게도 신기한 것을 보여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신기한 일을 보여줬고,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신비로운 이적과 기사 등을 많이 일으키셨다.

 

이런 신기한 것만 아니라 당신의 오심 자체가, 삶 자체가, 생애 자체가 전부는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역사다. 이것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 존재 속에 성품적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실상화 되어 있으면 이 사람은 말을 하건, 행동을 하건, 뭘 하건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는 신비로운 역사가 되는 거다. 그런데 많은 믿는 사람들이 꼭 뭔가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하나님의 역사로만 알고 있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자기에게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본질화 되는 게 중요한 거다. 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꼴찌를 했으면 꼴찌를 한 게 문제가 아니라 시험을 치기 전에 공부를 안 한 게 문제다. 시험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를 드러내는 거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늘과 교통되는 일이라는 거다. ‘인자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이 용어를 쓰심은 내가 너희들의 영의 눈을 열어서 나와 영적인 교통을 하게 해서 너희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구원역사를 보게 할 것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치적으로 따져 봐라. 성경은 이치를 모르면 못 깨닫는다. 이걸 글자 그대로 본다면 설령 주님의 머리 위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들 죄 짓은 인간의 육의 눈으로 이 장면이 보이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영의 눈이라야 이 장면을 볼 수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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