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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3:1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311: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8년 동안을 꼬부라졌다.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한 채 귀신이 들려서 꼬부라진 그 허리가 얼마나 아플까? 육신의 눈으로 보고 상상을 해 보면 기가 막힌 여자다. 얼마나 고통의 연속으로 살았을까?

 

 

우리가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또는 도시고 농촌이고 간에 기구한 운명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속에서 힘이 들다. 힘이 들다하면서도 죽지 못해서 속에 악만 남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 참 힘들게 산다.

 

 

세상만사를 가만 보면 인간의 성격이나 성질이 고쳐지려면 생명과를 먹은 그 지식을 가져야 고쳐지는 거지 저주받은 선악과 따먹은 그 지식의 수준으로는 자기를 전혀 못 보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를 못 고친다. 이런 사람은 뭐든지 남 쪽으로 본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바른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기준해서 남을 보며 판단을 한다. 그러니 자기 눈에, 자기 성격에 안 맞으면 상대 쪽으로 폭발이 된다. 서로가 그런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왜 불행을 만들어 가면서, 왜 서로 때려가면서, 왜 상처를 주면서 서로 그렇게 사느냐? 미치지 않고서는 그러지를 않는다.

 

 

허리가 꼬부라진 데다 귀신까지 들렸으니 그 성격 성질이 좋겠느냐? 얼마나 고통의 연속으로 살았을까? 예수 믿고 안 믿고 간에 사람이 틀어지고 어그러지고 뻐그러지고 패역하고 표독스럽고 한 사람을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지식이나 그런 정신이나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평생을 고칠 수가 없겠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더군다나 세상 쪽으로 소원 목적을 품은 제 좋도록 해 달라는 식이라면 죽을 때까지 사람이 안 고쳐진다. 그 사람이 지옥에 갈 런지 천국에 갈 런지 그건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렇게 살면 세상 사는 동안 참 힘들겠구나하는 게 있다. 젊은 사람의 성격 성질이 그러면 살면서 참 고통이겠구나하는 게 있다. 나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면 평생을 저러다가 고통 속에서 죽겠구나하게 된다.

 

 

그리고 귀신이 들려서 앓고 있었으니 몸이 또 얼마나 허약할까? 그러니 신경질적인 사람이 된다. 그 성격과 성질이 얼마나 고약스러울까?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하고 굽어져 있으니 그 허리가 톱질을 하듯이 얼마나 쓰릴까? 또 숨쉬기는 얼마나 힘이 들까? 걷기도 힘들고, 뛰기도 힘들고, 귀신이 들렸으니 성격 성질도 더럽고.

 

 

자기를 살펴볼 때 어떤 상황에서 성질을 팍 내면 식구들이 그런 자기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일이 있느냐? 이런 사람은 어디를 간들 스스로 힘들다. 자기 스스로가 고통스럽다.

 

 

이 여자가 시집을 간 여자라면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면 왜 쳐다보느냐고 쏘아 붙이면서 싸움을 하려 할 것이고. 그러니 어느 누가 친구가 돼 줄 수 있겠느냐? 이 여자는 왕따가 되는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과 길을 걸어가도 같이 못 간다. 이런 여자를 데리고 사는 남편이라면 그 남편 사랑이 참 많겠다. 어지간하다. 솔로몬 같으면 천막 하나 가지고 산에서 살면 살았지 그런 여자는 안 데리고 산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마음도 넓고 아량도 넓고 생각도 넓고 어떤 말을 해도 지혜롭고 넓은 마음에서 탓을 안 하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원한다.

 

 

18년 동안을 귀신들리고, 꼬부라져 있고,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처럼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그런 소원성은 없지만 자기를 쳐다보면서 어느 한 구석이 그런 면이 없을까하고 깨닫는 것이 좋다. 사람이 정상적이라면 남이 자기를 왕따시키는 걸 안다. 자기가 왕따에 속하는 사람이 있느냐?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됐다는 것은 우리 모두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여자를 영적인 면에서 신앙 면으로 생각을 해 보면 모두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은 인생들이 됐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인생이 된다. 교회에 다니면서 이룰구원 차원에서도 구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저주의 사람으로 들어간다.

 

 

옳은 것을 잡았으면 성경을 많이 읽고 상고하고 설교를 듣고 이치를 깨닫고 해야 하는 건데 성경은 안 보고 계속 테레비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서기가 시간이 걸린다. 힘들다. 이러면 자기는 판단자가 되고 자기를 쳐다보는 면에 어두워진다. 믿는 사람이라면 인격 면, 만들어지는 면, 아는 면이 하나님의 것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이 자동으로 나와야 하겠는데 이런 사람은 그건 없고 애들이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 된다. 우리가 그런 면에 주의를 해야 한다.

 

 

설교를 들을 때 잘못됐구나하는 설교라면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그걸 듣는 시간만큼 자기의 신간낭비요, 자기의 나이 젊음 정력이 자꾸 소비가 된다. 그러니까 옳은 말씀을 듣고 보다 더 건설적인 면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빨리 역사할 수 있는 면으로 다듬어지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다.

 

 

생각을 해 볼 때에 오늘날 자기가 에덴동산에 있었다면 지금의 자기 같으면 선악과를 안 따먹었겠느냐? 에덴동산의 사건이 성경에 기록이 돼 있고, 그 결과도 아는 이상 오늘날 나의 결심이 그 때의 에덴동산에 가면 그 선악과를 안 따먹겠느냐? 듣는 교훈에서 생명과와 선악과를 분별을 못하면, 역사적인 에덴동산의 인간타락은 알지만 그 타락의 사상이 뭐다하는 걸 모르면 오늘날도 여전히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것이다.

 

 

그 선악과를 에덴동산 밖에서 먹었으냐, 안에서 먹었느냐? 안에서 먹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비유적으로 교회는 에덴동산인데, 성령님께서 제일 크게 역사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 안에서 선악과를 먹이는 설교가 있는가 하면 생명과를 먹이는 설교가 있으니 반드시 분별 구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에서 생명과를 제시를 하는데 그걸 듣는 자기 입장에서 세상 쪽으로 듣는 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매 주 정례적으로 교역자 대상으로 진행하는 성경연구 및 신학강의 시간에) 목사님들 세계에서 내가 전하는 말씀이 옳다고 아멘을 잘 하는데 진짜 바로 알아들어서 아멘을 하는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말씀을 잘 받다가도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에 대해 말을 하면 거기에 걸려서 가버리는 목사가 있다. 그러면 내가 전한 말씀의 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유의 은사나 예언 방언에 대해 말한 것은 복음이 아니냐?

 

 

한 사람에게서 하나의 척도를 가지고 말이 나온다면 그 사람의 판단이 그렇고, 사상이 그렇고, 생활이 그렇고, 다 같은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서 나온 말인데도 어느 거는 자기 마음에 들어서 좋고, 어느 거는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나쁘다고 하면서 교훈까지 버리고 가버린다면 이게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 특히 인도자들의 세계에서는 교훈분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건데 자기가 체험한 것이 기준이 돼서 그러는 건 안 된다. 그 사람은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그건 벌써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 사고가 거짓이다.

 

 

오늘날 자기가 만일 에덴동산에 있었다면 선악과를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안 따먹었겠느냐? 생명과를 먹어야 할 교회임에도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한 은밀한 뜻을 모르니까, 그 교훈의 사상과 질을 모르니까 교회 자체가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먹고 세상 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그런 나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아침저녁 성경을 읽고 외우고 해도 그들을 마귀로 본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보실 것이다.

 

 

지금도 교훈적인 면에서의 생명과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어디에 목적을 두는 것이냐? 교훈적 선악과는 신앙의 눈을, 소원 목적을 자꾸 세상 쪽으로 바라보게 한다. 무슨 큰일이나 활동 쪽으로 사람을 자꾸 내본다. 활동을 해도 실력이 있은 후에 활동이지. 따라서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가지고 세상을 자랑하는 목사라면 마귀의 앞잡이다.

 

 

생명과 먹는 교훈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인격적 결합이 되고. 이렇게 되면 먼저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게 되고, 그 다음에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게 나오게 된다.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노예 식으로 다스림이 아니고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다스려 나간다. 그러니 다스리는 자도 기쁘고, 그 다스림을 받는 자도 기쁘다.

 

 

자기를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 하찮게 여기고 자기 눈에 좋은대로 세상을 따라가고 좋아하고 있다면 그 정신 사상은 현재도 선악과를 먹고 있는 장면이다. 세상을 따라가고 쫓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자기가 지금 선악과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먹고 살려니 자기 합리화로 돌아가야 하느냐, 이기지 못하는 자기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고, 강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눈에 합격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면 어느 날엔가 과감성이 나올 것이다. 성령님께서 과감성이 나오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자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믿는 사람이 되고, 온 가정도 그렇게 돼야 한다. 안 그러면 말세가 될수록 주님이 와서 가정과 부모형제 처와 자식을 죄다 갈라놓는다. 원수로 만들어 놓는다. 왜 그러는 거냐?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영의 눈으로 보면 각 사람마다 여러 가지 형태의 병이 들어있고, 비뚤어져 있고, 휘어져 있고, 꺾어져 있고, 냄새나고, 썩은 것도 있고 썩어가는 것도 있고, 죽고 죽어가고 있는 것도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까지 자기가 살아온 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상화 되지 않았다면 그건 다 죽었다. 안 죽었다면 말씀이 자기에게 계속 역사가 될 텐데 죽었기 때문에 그 역사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격도 모나고, 성질도 거칠고, 성분도 생명적이 아니고 사망적이고, 도덕성도 결여되어 있고, 지혜적으로도 미련하고, 능력적으로도 옳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기를 일반사람들과 비교해 보고, 그 다음에 예수를 믿으니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해 보고 고쳐나가야 한다. 예수 믿는 게 그냥 주일 지키는 식으로는 안 된다. 천국에는 개근상이 없다. 오래 믿은 걸로 안 알아준다. ‘당신처럼 만들어졌느냐하는 면에 신경을 쓰시고 사건 환경도 몰아붙인다.

 

 

그런데 예수 믿고 이제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서 가르침 받고 깨닫고 고침 받고 나가야 하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없는 교회에 다닌다면 이런 특수한 은혜를 못 받고 고침도 못 받고 죽는 거다. 왜 그러냐? 거짓된 인도자를 만났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고 종교적인 사업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은 거짓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거고, 예수를 믿어도 거짓된 인도자를 만나면 종교적인 사업이나 활동을 죽도록 하다가 주님을 못 만난다. 깨달음을 못 만난다. 그러니까 자신의 신앙상태를 볼 수가 없는 거다. 날 때부터 소경이 자기가 소경인 줄을 알까? 모른다. 눈 뜬 사람이 그 사람이 소경인 줄을 아는 거다. 그 답답함을 생각해 봐라. 날 때부터 소경이란다면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그 면에서 완전히 차단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영의 눈이 밝고 영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언어가 분명하고 즉, 하나님의 말씀증거가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을 어느 정도 믿었다면 무식쟁이가 아니라면 이건 돼 나와야 한다. 하다못해 들을 줄을 안다면 그만큼 옳은 것을 듣는다면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옳은가, 아닌가가 판단이 되는 거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다 소경이었다. 그 증거가 그들이 소경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 영적인 면을 지적해 주면 알아들고 예수님을 알아보았어야 할 텐데 자신들은 소경이 아니라고 우겨댔다. 예수님은 그들이 육신의 소경이라는 게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의 말인데 그들은 성경을 외무면서도 영적 차원을 못 알아들었다. 사망 아래, 죄 아래 놓여져 있는 문둥이처럼 만신창이가 된 자신들의 영적인 모습을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병자나 귀신들린 자나 문둥병자 등을 들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데도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몰랐다. 그래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이 여자도 눈으로 보이는 면에서의 병자로만 알았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 앞에 있는 이 여자와 같은 병자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꼬부라진 성격 성질 때문에 누구와 원수가 되면 도무지 펴지를 못하는 성질이 있느냐? 누구와 한 번 원수를 삼으면 도무지 못 펴는 성질이 있느냐? 이건 영의 눈으로 볼 때 곱추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 뜻을 모른다면 소경이다.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로 통해서 교인들에게 말씀의 눈을 열어주는 거다. 그런데 옳은 말씀인데도 그게 자기와 안 맞는다고 그냥 가버린다면, 그래서 눈이 멀면 누구만 답답한 것이냐?

 

 

안식일에 18년 동안이나 앓고 있는 이 여자를 누가 봤느냐? 예수님께서 보셨다. 그런데 육신의 눈으로는 유대 종교인들이 그 전에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 여자를 보았을 테니 이 여자의 모습을 보고 영적인 면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들은 그 영적인 면은 못 봤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으로 보는 면에서 영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영적으로 보시는 거다.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님이 보는 눈을 가지고 봐야 자기를 봐야 한다.

 

 

교회 인도자들은 표면적 충성봉사가 문제가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고 앓고 있는 이 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영적인 면에서 안 되어가고 있고, 앓고 있고, 뭘 못 고쳐서 저게 병이로구나하는 그 상태가 많이 있는 건대 육적으로 육의 생각으로 자기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사람이 많고, 무엇이 바쁜지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고, 바람이 든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세상을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구나.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물은 없고 세상바람이 든 정신이 가득 차 있다. 더러운 물이 고인 곳은 모기의 서식처가 되듯이 교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육적으로 모였다면 자기 마음 밭은 귀신들의 놀이터다. :에서 이걸 말해주고 있다.

 

 

세상 일반적으로 사람이 미쳤다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반생활을 못하는 정신장애 상태에서 여러 가지 행동으로 사람을 괴롭힐 때 미쳤다고 하게 된다. 또 정신은 장애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장소나 환경에서 맞지도 않는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도 사람이 좀 이상하다고 하게 된다.

 

 

일기가 추운 겨울에 추워서 몸이 오그라지면서도 자기 몸을 자꾸 노출을 시킨다면 이건 비정상이다. 여름인데도 겨울외투를 입고 있다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안방에서 할 것을 누구든지 보라고 밖에서 연출하고 있다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을 자꾸 쳐다보며 웃는다면 정상적으로 보겠느냐? 만나기만 하면 큰소리로 싸운다면 정상적으로 보겠느냐? 피가 나도록 자기 손톱을 물어뜯는다면 정상적으로 보겠느냐? 남의 말에 자기 말을 보태서 싸움을 붙여놓고 자기는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정상으로 보이겠느냐?

 

 

게을러서 아무 일도 않고 잠만 자고 남을 돕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정상으로 보이느냐? 금식자랑은 잘 하면서 예배시간만 되면 계속 졸고 밤만 되면 산으로 들로 기도하러 간다고 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정상인가? 혼자 살면 거룩으로 여기고 부부로 재미있게 살면 죄악으로 여기는 사람을 정상으로 볼 수 있겠느냐? 이 외에도 많다. 우리가 다듬어지려면 얼마나 다듬어져야 할런지? 미치지 않았어도 상식을 벗어난 말과 행동이 있으면 정신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게 된다.

 

 

우리가 남에게 이상하게 보여지는 그런 여러 가지 상태가 없는가? 있다면 신28:에도 있듯이 네가 규례대로 살아봐라. 잠자는 것도 규례대로 밤에 잠자고 낮에는 일을 하고, 모든 생각 면에도, 음식을 먹고 마시는 면에도 규례대로 해 봐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의 정신 상태를 위해서 다 그렇게 해 놨다.

 

 

또 신앙 면에서 보는 영적 상태는 어떤가? 예배모임이 있는데도 별로 중요치 않은 일에 책임을 맡아서 예배시간에 바쁘다고 참석하지 못하고 뛰어 돌아다니며 시간이 없다는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느냐? 내일이 주일날인데도 날이 샐 때까지 테레비를 본다면 그 다음 날 예배시간에 졸겠느냐, 안 졸겠느냐? 안 졸겠거든 그렇게 해 봐라.

 

 

타락되고 저주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이방 세상 사람들의 귀신을 섬기는 풍속 습관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사람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 땅의 일만 생각하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예수님께 구하고 있다면 이게 정상으로 된 신앙인가?

 

 

18년간 꼬부라져서 땅만 쳐다보고 살았으니 그 성격 성질이 좋을 리가 없다. 지금 자기와 비교해 보면 자기는 예수 믿기 전에도 땅만 쳐다보며 살았고, 예수 믿은 후에도 20년이 지났어도 땅만 쳐다보며 살았고 30년이 지났어도 땅만 쳐다보며 땅의 것으로 구하고 있다면 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허리가 꼬부라져 있는 거다. 이런 사람은 바른 말을 해 주면 속에서 뭐가 올라와서 좋게 안 들린다.

 

 

이 여자는 더군다나 귀신까지 들렸으니 그 성격 성질이 부드러울 리가 없다. 옳은 말을 해도 안 알아듣는다. 그리고 한 번도 몸을 일으켜서 똑바로 서서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으니 신앙 면에서 대신관계가 바로 안 됐고, 대인관계도 바로 안 됐다. 하나님 앞에 바로 된 것이 있겠느냐?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안식일 날 회당에 앉았다고 했는데, 자기는 앉았다고 해도 남이 볼 때는 엎드러져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누가 봐도 엎드러져 있으니 겸손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된 것으로 봤다. 회당장에 모인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의 눈으로 보신다. 우리도 자기를 영의 눈으로 살펴야 한다.

 

 

율법사나 서기관들은 성경을 가르칠 때 표면적인 율법준수나 제도와 의식과 장로들의 유전을 강조만 했지 사람들의 영적 상태는 알지를 못했다. 그러니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는 외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깨닫게 해서 하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육신적인 눈으로 보면 이 여자와 같은 사람은 없다고 할지라도 영의 눈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자기에게 여러 가지 병적인 상태가 보이는 거다. 그 이치를 가르쳐 주면 자기의 그런 영적인 상태를 고쳐달라고 해야 한다. 안 고치면 얼마 안 가서 자기 안에 든 그 못된 자기가 나타나게 돼 있다. 사건이 오면 나타나고, 상황이 주어지면 나타난다. 그러나 평소 때는 잘 모른다.

 

 

이 말씀에서 자기를 한 번 생각해 봐라. 이 말씀이 계속 남을 향한 말로만 들리느냐? 보통 보면 자기를 기준해서 남을 보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면 저 사람이 나쁘다하고 보지만 진정 예수님을 기준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기준해서 그 분 앞에서 나를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봐야 지도 인도가 되는 거다. 기준이 없으면 그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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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2 출애굽기 (계시보기)교회의 절기와 신앙. 출16:31  김경형목사  2022-08-22 83
17561 누가복음 좁은 문과 바늘귀 눅13:22-31  최주훈 목사  2022-08-22 212
17560 누가복음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눅13:6-13  김경형목사  2022-08-21 88
17559 요한복음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요2:1-4  김경형목사  2022-08-21 125
17558 출애굽기 나그네 인생 출1:1-7  강승호목사  2022-08-19 265
17557 고린도후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3;1-6  전원준목사  2022-08-18 224
17556 창세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 창1:1-5  강승호목사  2022-08-17 227
17555 누가복음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2:58-13:5  김경형목사  2022-08-14 71
17554 요한복음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요1:47-51  김경형목사  2022-08-14 71
17553 마태복음 (계시보기)먼저는 하나님의 온전이다. 마5:48  김경형목사  2022-08-14 39
17552 고린도후 향기로운 그리스도인 고후2;12-17  전원준목사  2022-08-11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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