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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화 명화 모음 |
이 그림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장 친한 동료였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시작해서 아들(Lucas Cranach der Jüngere)이 1555년에 완성한 세 폭의 제단화 중 가운데 그림입니다. 일명 ‘바이마르 제단화’(Weimar Altarpiece, 1555, Wood, 370×309 cm, Stadtkirche Sankt Peter und Paul, Weimar)라고 불리는데, 주보에 생략된 좌우 편엔 이 그림을 의뢰했던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의 가족이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력설교)20220904 성령강림일 후 열셋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시편 1편, 신명기 30:15-20, 누가복음 14:25:35
행복한 사람: 복의 길
크로이소스와 솔론의 대화
헤로도투스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리디아의 왕국의 크로이소스는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가진 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테네의 유명한 현자 솔론이 자기 나라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얼른 그를 왕궁에 초대합니다. 그리고는 보물로 가득한 자기 보물창고를 그에게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왕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물음이었다고 합니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의 입에서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을 내심 기다렸는데, 정작 돌아온 대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테네에서 사는 텔로스라는 한 시민’이라고 말해 줍니다. 텔로스는 부자도 아니고, 권력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가정의 한 시민일뿐이어서 왕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평민과 왕인 자기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왕이 이렇게 따집니다. ‘그대는 내가 누리는 행복이 아테네의 일개 시민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그러자 솔론이 이렇게 답합니다. ‘왕이시여. 당신은 값비싼 보물과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당신이 언제까지 누릴지 아무도 장담 못 합니다. 그것으로 행복하게 살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파멸하는 일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는 모두 하늘이 정하는 일입니다.’
솔론의 말을 듣고 불쾌해진 왕이 그를 당장 궁 밖으로 내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크로이소스의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는 페르시아와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장작더미에서 솔론의 이름을 외치며 화형당해 죽게 됩니다.
헤로도투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행복의 조건을 권력이나 재물에 두곤 하지만, 이 오래된 이야기들은 ‘행복’, 즉 ‘복된 삶’이란 그런 것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
복된 삶의 기준이 어떤 사람에겐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 자기가 원하는 욕구가 충족되어 여유를 느끼는 상태라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의 행복은 배부른 것이고, 비바람을 뒤집어쓰고 추위에 떠는 사람은 견고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과 따뜻한 옷이 행복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유덕한 이의 행복을 마음의 행복을 위해 지혜에 헌신하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꼽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재산이 행복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과 조건이 다릅니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에게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디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의 말씀으로 시편 1편, 구약의 말씀으론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둘 다 복된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시편 1편의 첫 구절은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입니다.
성경에서 책의 첫 번째 단어나 첫 구절은 항상 그 성경이 담고 있는 주제와 좌우명을 드러냅니다. 창세기에 ‘태초에’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 온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 역사를 드러내듯이 시편도 같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 성경에서 시편 1편의 첫 구절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라면서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면 시편 1편뿐 아니라 시편 150편 전체가 행복을 향한 관심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심으로 시편의 시인들은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고백하고 탄원합니다. 그게 시편 150편 전체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행복의 길을 아주 명료하게 소개합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에선 복있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일부터 소개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것.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들의 모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디언의 속담에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조각을 나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를 형성하는 조각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이들의 모임이 위험한 건, 이런 이유입니다. 고유한 우리 자신의 색과 조각을 빼앗기고, 그 자리에 악의 조각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하튼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세 부류의 사람은 하나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이들은 사리를 추구하고, 남의 불행을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기뻐하며, 힘없고 가난해서 부당한 처우를 당하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의 보편성
시편 1편을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무신론자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악한 계략을 꾸미며 모이는 사람들, 죄를 짓고도 태연한 사람들, 오만하게 자리만 탐하는 사람들이 저 멀리 다른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그 사람일 수도 있고,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내가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이런 악의 보편성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고 고발하기도 합니다. 시편 1편은 그렇게 악으로 물들어가는 현실에서 나 자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우리가 복된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시편 1편에선 부정적인 말만 하는 건 아니지요. 이어지는 구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그 뜻을 예수님이 마태복음 22:37 이하에서 멋지게 요약하셨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게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주야로 묵상하며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시편은 노래합니다. 행복의 비결이지요. 시편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인 신명기 30장 말씀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30:15-16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에서도 시편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따라 살 때 생명과 복이 임하고, 그렇지 않을 때 사망과 저주가 임한다고 단언합니다. 시편과 신명기 모두 행복과 저주의 삶을 단호하게 구분합니다.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산다는 건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행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의 길을 그렇게 분명하게 나누고 사는 건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착한 사람이 나쁜 일 저지를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착한 일 할때도 있잖아요. 이런 걸 조금만 생각해 보면,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 복으로 가득한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일 뿐입니다.’
네, 맞아요. 저 자신만 해도 악한 생각과 착한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머리와 입에서 공존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끊임없이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에게 완벽하게 복된 인물을 정확히 소개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명하는 대로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대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모두가 꺼리며 저주하는 나병 환자, 귀신 들린 사람, 그리고 각종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하면서 이웃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수가성에선 모두의 관심 밖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손을 내밀어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사람의 외모나 학벌, 재산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아와 홀로 된 여인 편에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악한 계략을 꾸미고, 죄를 짓고도 태연한 사람들, 오만하게 자리를 탐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면서 핍박받더라도 온유와 긍휼을 베푸는 이들이 복되고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가르치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삶은 모든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 편에선 행복하고 복된 삶일지 모르지만, 세상의 눈엔 우매하고 바보 같은 삶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지막 여정이던 예루살렘과 해골 언덕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매달아 제비뽑기하며 조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이 복 있는 사람의 길, 참으로 행복한 길이라는 진리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
이제 오늘의 복음서 말씀인 누가복음 14장을 짧게라도 다룰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이 말씀을 자칫 오해하면 가족과 형제도 버리라는 반사회적이고 반가족적인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이라는 말로 이어가십니다. “더욱이”라는 말이 의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2:31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의 모친인 마리아를 십자가에서까지 염려하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더욱이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을 통해 반사회적, 반가족적 단체를 만들자는 의도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일, 즉 제자도가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를 거기 모인 무리에게 묻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분노하다’라는 뜻이 아니고, ‘덜 사랑한다’는 뜻으로 번역해도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형제자매 부모 아내,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이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최고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하나 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 말을 루터의 <소교리문답>에 나오는 표현으로 바꾸면, 모든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모든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그리스도를 두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삶이 가장 복된 삶, 완벽하게 행복한 삶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삶이라서 바보 같아 보여도 주님은 이 길이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자신 있게 가르치십니다.
성경은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며 스스로 제자라고 칭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분의 뒤를 따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예수님이 거기서 하시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알기를 바라면서 두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제자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라
첫째 비유는 망대 건축에 관한 것인데, 망대를 건축하려면 견적부터 세우고 시작하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견적도 안 나오는 걸 괜히 시작했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처음부터 꼼꼼히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첫 번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끝까지 이 길을 함께 갈 것인지 묻습니다. 고난과 질병이 와도, 죽음 앞에 서게 되더라도 모든 것 이상으로 주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신뢰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묻는 첫 번째 물음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전쟁한 관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적군이 이만 명인데, 우리 병사는 그 반절인 만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때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예수를 따르다가 만나게 될 영적 시련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겁니다. ‘예수 따라가는 길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인데,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까?’ ‘내 소유와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다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게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요?’
우리는 이런 질문이 곤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예, 분명히 그 길이 가치 있고 복되며 참으로 행복한 길입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따르는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포기한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돌려놓으십니다. 루터의 찬송대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데도 주님의 진리와 약속은 살아서 영원히 그 모든 것을 새롭게 회복하며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길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들려는 거친 말이 아니라 우리를 복 있는 삶, 완벽하게 행복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분은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와 가까이 있기를 바라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고 깨달을 때 우리는 바울처럼 모든 시련을 뛰어넘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표준새번역 빌립보서 4:11-13).
적어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면, 이런 삶이 참으로 행복하고 가치 있다는 걸 교회 담장 너머에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바이마르 제단화
오늘 설교는 주보 그림 이야기로 맺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장 친한 동료였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시작해서 아들(Lucas Cranach der Jüngere)이 1555년에 완성한 세 폭의 제단화 중 가운데 그림입니다. 일명 ‘바이마르 제단화’(Weimar Altarpiece, 1555, Wood, 370×309 cm, Stadtkirche Sankt Peter und Paul, Weimar)라고 불리는데, 주보에 생략된 좌우 편엔 이 그림을 의뢰했던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의 가족이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주보에 담긴 그림을 잘 살펴보면, 성경에 나온 사건들을 이곳저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 왼편에 어떤 사람이 벌거벗은 채 해골과 악마에게 쫓기고 있는데, 그대로 직진하면 돌산 바위틈에서 치솟는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반대편엔 십계명을 든 사람들이 모여 있고, 조금 더 오른편으로 가면 천막이 있는데, 맨 앞에 장대에 뱀이 걸려 있는 게 보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뱀 사건이지요. 오른편 하늘엔 구름 사이로 천사가 보이고 그 밑엔 양과 목자들이 있어요. 예수님의 탄생기사가 이렇게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앞쪽으로 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중앙에 있고, 오른편엔 세 사람이 보입니다. 손을 들고 십자가의 예수를 가리키는 사람은 세례 요한, 멋진 흰 수염을 기르고 기도 손을 한 사람은 이 그림을 시작한 작가 루카스 크라나흐, 그리고 그 옆에 성경을 펼치고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의 손이 성경을 가리키고 시선은 십자가를 향한 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이며 성경이 이를 가르친다는 의미가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편에 투명한 십자가 깃발로 마귀를 제압하는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특이한 건, 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는 두 인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마귀를 제압하고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눈을 마주치며 무언가를 묻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지는 보는 마다 다를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시선이 있어요. 누구인가요? 기도 손을 한 인물은 루카스 크라나흐입니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함께 수많은 시련과 위험을 넘어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얼굴이 여기 들어가 있는지는 확실하진 않습니다. 부유한 권력자의 의뢰로 제작하는 그림에 자기 얼굴을 큼지막하게 박아 넣는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물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선제후와 워낙 각별하던 사이였으니 처음부터 의뢰인이 넣어달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크라나흐가 살아 있을 때 완성된 게 아니라 마지막 붓질을 그의 아들이 했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소천하고(1553)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만일, 아들이 의도적으로 아버지 그림을 그려넣었다면 왜 아버지 얼굴을 그려 넣었을까요?
그 비밀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어디에 머무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피가 크라나흐의 정수리에 정확히 떨어집니다. 무슨 뜻인가요?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산 인물, 가장 복된 인생을 살았던 분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이렇게 그려 놓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를 그린 다음, 아버지의 시선을 감상자에게 돌려놓습니다. 그리곤 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가장 복된 삶, 완벽하게 행복한 삶이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 복 있는 삶을 꿈꿉니다. 성경은 그 삶이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분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그분을 따를 때 비천과 풍족, 배부름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고백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 복된 고백이 예수를 따르는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교회의 기도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삶은 행복에서 먼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된 삶을 약속하셨지만,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약속과는 모순되는 매일의 경험 때문에 당신의 약속에 대한 의심도 큽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우리를 복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는 정반대로 우리 사는 세상은 불의와 부정부패, 부당한 고난, 기아와 살인, 전쟁과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휘몰아칩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을 깊이 신뢰하고 그 약속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우리의 영적 시련도 커집니다.
주님, 당신은 지금 숨어계시지만 그래도 우리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당신을 신뢰합니다. 주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십자가에 숨겨진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여 부활의 빛으로 드러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얼굴을 끝까지 찾고 당신에게 기도하겠습니다. “환난 날에 부르면 내가 너를 구하겠다” 약속하셨으니 이 약속을 굳게 잡고 당신께 기대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 어둡고 암울한 세상, 악한 일을 도모하며 비방과 조롱 가득한 이 세상을 구하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뤄주옵소서.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이들을 기억하소서. 이들의 삶 속에 당신의 은혜가 경험되게 하소서. 주님의 날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이날을 지키는 이들을 기억하소서. 우리의 모든 일상이 당신께 드릴 감사의 열매로 가득하게 하소서. 주님, 모든 재해로부터 우리를 지키소서. 혹여 재난당할 때 교회가 먼저 나서 서로를 보듬어 안게 하소서.
이제 성찬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의심과 불안, 피로를 당신의 성찬으로 위로하고 힘을 더하여 주소서.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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