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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1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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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3장 15절-19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5절-17절: 외식은 껍데기운동. 껍데기 운동은 사람 알맹이가 아닌, 영 위주와 영의 소원 목적이 아닌 세상 불탈 것, 사람 몸 밖의 일은 전부가 외식이요 껍데기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껍데기 목적으로 신앙하는 자들이 있다.
오늘날 교회운동들이 껍데기 운동이 많다. 예수님은 알맹이 운동이다. 이 땅에서 인간 자기가 천국의 성질로 만들어지는 운동을 해야 할 텐데 예수님 당시 때도 외식자들은 율법 속에 알맹이가 들어있는 건데 그건 무시한 채 율법위주와 그 목적으로 글자적 문자적으로 하는 껍데기 운동을 했다. 불에 타서 없어질 세상에 속한 운동은 전부가 껍데기 운동이다. 오늘날도 기독교 안에서 교인들이 알맹이 운동과 껍데기 운동을 모르고 있다.
자기는 못 고치고 남을 간섭하고 정죄하는 것은 전부는 외식자들이다. 외식자들이 그런 짓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런 외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걸 모른 채 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영적인 면에서는 영원히 못 고치고 갈 수도 있다.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양을 외양간에서 풀어서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안식일이지만 짐승을 끌고 가서 물도 먹이고 풀도 뜯어먹게 한다. 인간 자기는 밥을 먹으면서 짐승은 밥을 안 주느냐? 주일날 자기가 밥 먹는 건 외식이고,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듣는 건 영식이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눈으로 보시고 아브라함의 딸이 즉, 후손이 18년 동안 사단에 매였다고 했다. 그런데 회당장은 같은 동족이면서도 이걸 모른다. 이걸 보는 눈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갖고 와서 안 보여지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심이다. 눈으로 보는 것만 갖고 왈가왈부 한다면 안 보이는 건 어떻게 알 것이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안 보이는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어떻겠구나’ 그걸 생각해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정신 사상이 어디로 돌아가 있느냐 그 말이다.
그런데 회당장과 유대인들은 이 여자가 단순히 귀신이 들려서 그런 줄로만 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귀신들린 사람만 알지 귀신들린 사람이 ‘평소에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았겠구나’ 하는 걸 모른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은 그의 행동을 통해서 자기 속의 성격 성질 마음이 나온다. 더 들어가서 ‘그 마음이 뭘 붙잡고 살았느냐’ 이게 또 나오는 거다. 세상을 붙잡고 살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았느냐? 세상을 잡고 살면 그 사람의 마음은 세상을 따라 왔다 갔다 하게 돼 있다. 사람인지라 성격 성질이 들어있어서 속에 들어있는 그게 나오게 돼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귀신이 들기 전에 자기의 성격 성질을 보게 해서, 소원 목적을 보게 해서 귀신이 안 들도록 해야 한다. 귀신장난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 믿는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서 그를 교회에 데려와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면 귀신이 나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소원 목적은 어디로 들어있느냐? 땅으로 그대로 들어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귀신을 내쫓는 일만 하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안 믿는 사람도 눈에 보여지게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을 안다. 성경을 몰라도 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사람들의 말하고 행동하는 성격 성질을, 소원 목적을 보면 ‘이건 시험들 가능성 많겠구나. 어떤 상황이 부딪히면 이 사람은 일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 성령의 눈이 아니면 이런 걸 미리 못 본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예수 바로 믿으려면 고쳐야 한다. 자기가 시험에 안 들려면 고쳐야 한다. 고쳐달라고 해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은 고쳐주는 분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들어가면 고쳐진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다 보면 고쳐진다. 지금도 고쳐지는 사람은 성령님의 역사가 되고 있는 사람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딴 거 하는 게 아니다.
세상 소원 목적을 이뤄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거 들어주는 성령이냐? 그게 아니다. 성령님이 할 짓이 없어서 불타고 썩고 변질 변동되는 것을 이뤄주러 다니느냐? 계:에 보면 사단 마귀도 용도 그의 사자들도 사람을 넘어뜨리려 들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세우는 분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의 종들은 사람을 주님과 같은 사람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 소원 목적을 품게 해서 세상으로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마귀의 집단체요 무리들이다.
사단은 천국복음에 대적자이다. 마귀는 사람을 갖은 방법으로 꼬이는 면으로 들어간다. 꾀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성경구절을 가지고 꾀이고, 물질을 가지고 꾀이고. 그런데 귀신은 무슨 깃을 하느냐? 사람얼굴을 똥이 되게 만든다. 인격 면을 못 쓰게 만든다.
천국복음에 대적자들이 누구냐? 회당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모세오경을 가르치면서 외식하는 자들이 누구냐? 바로 그들이었다. 깨닫고 보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신 것이요,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져서 사단에게 매인 이 여자를 동원시켜서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예수님께 대적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면 ‘나도 뭘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여자가 18년 동안을 사단에 매여 있었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몰랐다. 신앙 믿음의 동족의식이 없으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로 사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안식일 날 의식이나 가르치고 장로들의 유전이나 가르치고 있으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18년 동안을 사단에 매인바 된 줄을 몰랐다. 18년 동안을 땅만 보고 살았는데 그것이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된 것인 줄을 몰랐다. 인간적으로 보면 18년 동안 등이 얼마나 끊어질 듯 아팠을까?
사단은 대적인데, 교훈적인 면의 대적을 보면 세상 것을 이론적으로 갖고 와서 대적을 한다. 지금도 성경 구구절절이 속의 내용을 모르면서 성경을 들고 대적하는 자들이 참 많다. 예를 들면 이단자는 아닌데 성경에 보면 ‘데마는 세상으로 갔다’고 했는데 데마가 누구를 따르다가 세상으로 돌아갔느냐? 사도바울을 따르다가, 복음의 일에 수종을 들다가 세상으로 가 버렸다.
그러면 데마가 예수를 믿다가, 주님의 일에 동역하다가 세상으로 갔다는 것이 데마가 예수를 안 믿는다는 뜻이냐? 데마가 세상으로 돌아갔다면 이 데마가 지옥으로 가겠느냐, 천국으로 가겠느냐? 기독교인에게 물으면 대부분 지옥에 갔다고 한다. 신학교에서 칼빈주의를 배운 사람도 데마가 지옥에 갔다고 하는데, 그러면 칼빈주의 교리는 한 번 구속을 받은 자는 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건데, 데마가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 지옥에 갔다는 뜻이라면 예수님의 구속은 어떻게 되는 거냐? 데마가 지옥에 갔다고 하게 되면 이건 이단소리가 되는 건데 그렇게 말을 하면 교리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목사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어디로 갔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한다. 지옥에 안 갔다는 교인들이 별로 없다. 보수 계통에서도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한다. 왜? 예수를 팔았으니까. 그렇다면 예수를 죽인 자는 누구냐?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오경을 갖고 믿는 율법사 서기관 제사장 대제사장 그리고 바리새교인들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예수를 죽여 놓고 어디로 갔을까? 지옥에 갔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교인을 해코자 했다면 이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이 사람도 지옥에 갔다고 하게 된다.
그러니 이건 예수를 믿어도 이치가 아니게 믿었고, 이치가 없이 믿었고, 이치를 부정하고 믿은 거다. 예수를 믿어도 정신병자처럼 믿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러니 성경을 봐도 제 멋대로 자기 감정대로 해석을 한다. 이게 다 거짓 것들이고 이단자들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마귀가 들리면 어디로 가겠느냐? 지옥에 가느냐? 그러면 귀신이 들리면 어디로 가겠느냐? 그것도 지옥에 가고, 예수를 팔아먹어도 지옥에 가고, 예수를 죽여도 지옥에 가고, 안식일을 안 지켜도 지옥에 가고, 돈을 사랑하면 그것도 지옥에 가고.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천국에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이 돼 버렸다. 그러니 우리입장에는 교회를 대 걱정해야 한다. 그들도 예수 안에서 다 천국 갈 백성들이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자를 보고 ‘내일 오너라. 내일 고쳐주마’ 하면 안 될까? 그 말을 할 수도 있는 게 아니냐? 내일 왔는데 내일도 또 바쁜 일이 생기면 ‘모레 오라’ 하면 안 되는 거냐? 안 된다. 왜 안 되느냐? 예수님의 일을 인간들처럼 내일로 미루면 안 되는 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서 고쳐야 할 사람을 ‘내일 모레 오라’ 하면 안 되는 거냐?
고쳐야 할 사람을 앞에 두고 ‘내일 오라’고 하는 건 예수님의 사랑이 용납이 안 된다. 무슨 말이냐? 당신의 설계 속에 들어있는 오늘의 구원은 그 날 다 이뤄놓고, 또 내일 일은 내일 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왜 염려하느냐?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 일은 오늘로서 족하다’ 하는 이걸 이룰구원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일은, 오늘 일은 오늘 다 하시는 거지 오늘 못해놓고 ‘내일은 어떻게 하나’ 하고 밤새도록 걱정하는 분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당신의 설계 속에 오늘 구원은 오늘로서 다 이뤄야 한다. 구원 이상 급한 것은 없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는 살 때 뭐가 제일 급하냐?
우리의 구원의 일은 예수님에게는 초와 순간을 다투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도 미룬다. 성경을 읽다가 잠이 오면 ‘내일 읽지’ 한다. 그러다가 오늘 밤에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오늘 밤에 죽는다면 오늘 읽을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천국에 가서 읽느냐? 예수님께는 우리의 구원의 일은 초와 순간을 다투는 일이다. 이 일을 미룬다는 것은 당신의 사랑의 마음이 용납이 안 된다.
자기의 아들딸들이 사단에게 매인바 된 것을 안다면 그것을 고쳐주는 일을 내일 모레로 날을 미룰 수가 있을까? 모르면 느긋하고, 모르면 귀신들리고, 모르면 사단의 짓을 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적인 일에는 마음속에서 상당히 민감해야 한다.
외식자들은 동족의식도 없고,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람을 구원할 줄도 모르고, 의식과 제도와 전통과 유전을 가지고 세상을 구하게 하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아서 하나님 앞에 쓸모없게 만들어놓는 짓을 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가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참고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자기의 성격 성질 때문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고, 자기의 육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병이 드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병이 든 사람도 있고, 이런 경우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의 진노로 병이 든 경우이다. 그 다음에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를 주는 것도 있다. 사도바울의 경우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와 같은 은혜를 자기에게도 준다면 자기에게는 가시를 안 줘도 좋겠느냐? 사도바울보다 가시가 몇 개 더 따라오겠느냐?
17절에 모든 반대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부끄러워졌다. 이들은 영적인 상태를 모르고 육신만 고집하여 세상의 안락만 가르치고 따라가는 그런 자들, 그리고 사람의 참 자유를 모르는 자들, 또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구원을 가르치지 않고 주장치 않는 자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온전자로 만들어지는 것을 미루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18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자기가 몇 년 몇 십 년을 묶여져 있었을까 그걸 생각을 해 봐라. 내 성격 성질을 고칠 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땅만 보며 살았을까? 있을 거다. 성경에서는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그걸 보여주는 거다. 소원 목적적으로 땅만 쳐다보는 성격 성질적으로 꼽추처럼 돼 있으면 참 힘들게 사는 거다. 이런 사람은 바로 믿기가 힘들다. 이런 사람은 자동적으로 변명이 많아진다. 어렵게 예수를 믿게 된다.
세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잡아 돌린다. 그래서 세상은 돌아가는 거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은 돌아간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지구도 돌아가고, 밤낮도 돌아가고, 사람도 돌아가고, 출생을 하면 그만큼 또 죽는 거다. 이게 다 우리의 구원을 깨달으라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영광스런 일을 기뻐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안다고 자처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모르는 이 무식자들보다도 못하구나. 무엇이 영광스럽고 훌륭한 일이냐? 무리들은 사람이 고쳐지는 것을 보고 영광이라고 했는데 바리새 종교인들은 종교적 사역에 놓고, 일에다 놓고 영광이라고 한다.
사람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죄에서 풀어내서 참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 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이 능력이 참 능력이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이다. 사람을 바로 인도하고 사람이 바로 돼 나온다는 것은 참 능력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닮게 역사되어 나오는 것이 참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오늘날 속화된 교회가 예언 방언이나 하고, ‘식식’ 하면 능력을 받았다고 한다. 이건 쓸모가 없다. 왜 쓸모가 없느냐? 천국에는 병자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면 그런 건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그게 참 능력인 것처럼 교회를 온통 쑥밭으로 만들어 놨으니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올려져 있는 거다.
예수를 믿는데도 왜 귀신이 잘 안 뽑히느냐? 자기의 성격 성질이 그런 걸 딱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맞아도 되게 맞아야 한다. 사단 마귀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막을 수 없다. 가로 막는 사람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18절-19절: 하나님의 나라를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을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사람으로 비유를 했다. 자기 밭에다 심은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 사람마다 자기 밭이 있다. 마음의 밭이 있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을 심어서 자라면 지극히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서 살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자기 밭에 갖다가 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지극히 작은 씨앗 속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들어있다. 생명은 사람의 눈에 안 보인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큰 나무로 성장케 하는 능력이 들어있다. 생명이 있으니까 살고, 또 자라난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라난다.
씨가 죽은 것을 심는 사람은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심는 사람은 없다. 씨는 제일 좋은 것으로 삼는다. 씨가 좋지 않은 것을 심으면 자라는 것 자체가 병적이고, 자라다가 죽고, 설령 열매를 맺어도 씨로 다시 쓸 수 없는 열매가 되고, 사람이 먹기에도 힘들고 짐승의 먹이밖에 안 된다.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생명의 말씀의 씨를 받지 못한 교인들이 많고, 아무리 목숨을 바친 충성봉사라 해도 생명을 가지지 못한 교인들이 허다하다. 생명이 없는 신앙은 자라지를 못한다. 자라지 못한 믿음이 많다. 내 속에서 천국의 성질이 커지는 것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자기 속에 천국의 성질로 커졌느냐, 아니면 아직까지 세상 것으로 따지고 있느냐? 우리 모두가 교회란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커져야 옳은 교회냐? 이제 예수 믿는 걸 알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예수 믿는 건 이런 거다’ 하고 말을 해 줄 수 있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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