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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54 추천 수 0 2022.10.01 18: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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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3:22-30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322-30: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22-23: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총을 겨누고 있다고 할 때 좁은 문 쪽을 지키고 겨누고 있을까, 넓은 문 쪽을 지키고 겨누고 있을까? 넓은 문이다. 이게 보통 상식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살려고 한다면 어느 문 쪽으로 가겠느냐? 좁은 문 쪽이다.

 

지식 면이나 지혜 면이 일반 도덕성은 하늘나라 천국복음의 가르침이 아닌 넓은 문이다. 신적인 도덕성 즉, 선 사랑 거룩 진실이 아닌 세상의 도덕성은 신령천국에 연관이 안 된다. 이 세상 도덕성은 부활 시에 다 빠진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일반 도덕성적인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아무리 예수이름을 둘러씌우고 성경구절을 둘러씌운다고 해도 그 속 뿌리는 선악과 먹은 사상일 뿐이다. 그리고 예수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종교적인 개념의 선행이 돼 버린다. 우리는 성격 성질이 종교적인 선행이 아닌 그 이해타산 평가성이 진리 자체화로 된 신령한 하늘나라의 즉, 성령열매로 된, 신의 역사로 된 도덕성이니 그 질은 신령천국에 속하는 것이다.

 

보통들 교회에 가면 다 좋은 말을 가르친다고 한다. 사회 어느 단체나 어느 강의도 다 상식적으로 좋은 말을 한다. 그러나 5+5=10. 정답은 하나다. 많은 사람이 10을 썼다면 많은 사람이 정답을 쓴 거다. 그런데 5+5=9를 썼다면 틀린 것이다. 9로 썼어도 완전히 틀린 것이지 조금 틀린 게 아니다. 11을 썼다면 정답보다 많으니 좋은 답이냐? 이것도 틀린 것이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신적인 도덕성의 척도는 하나님의 의사에 정확히 맞아야만 정답으로 인정을 해 주신다. 이게 천국복음이다. 그래서 이방 종교인들이 선하게 착하게 삽시다하며 일반적으로 선행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주님의 도덕성과 비슷한 거냐,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른 것이냐? 뿌리가 다른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보시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회들에서 하는 거짓운동은 진리와 비슷한 거냐, 질적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냐? 다르다. 주님의 도덕성과 세상의 도덕성은 그 뿌리가 하나는 하늘이고, 하나는 땅으로 돼 있는 건데 오늘날 교회들이 왜 같이 보고 있느냐? 자기가 신앙하면서 왜 같은 것처럼 사고방식을 그렇게 가지느냐?

 

오늘날 교인들이 눈에 안 보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그 질을 못 본다. 못 보면 신앙을 바로 못 하게 된다. 본문이 이걸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들이 예수이름으로 세상 축복운운 하면 그게 마귀의 말인 줄을 알까? 마귀가 예수님에게 그런 정신을 가지고 꾀였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목사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가 땅으로 들어가 있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 땅의 것, 땅의 종교인,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게 교인을 만들면 그 기준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다. 이런 걸 안 가르칠 바에야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실 필요가 없는 거다.

 

세상 땅의 것은 눈을 높이 안 들어도 된다. 땅에 속한 것은 신앙처럼 안 해도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자기가 사는 것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성으로 인격화 속성화 되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그네 생활에서 이걸 준비해야 한다. 딴 거 아무 것도 없다. 아무리 천석꾼으로 쌓아 놔봐야 자기 죽을 때 못 가지고 간다. 못 가지고 가는 것은 천국 것이 아니다. 못 가져가는 것에 신앙하지 말아라. 그게 인간이 사는 게 아니다.

 

하늘나라 천국복음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전부 세상 자기 주장대로 마음대로 세상 소원 목적을 둔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의 넓은 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주관성을 내려놓지를 않는, 그러니까 자기 주관성을 이용하면서 자기의 세상 소원 목적을 위해 나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앞에서는 자기의 신을 벗는다. 말씀을 받는 앞에서는 자기의 세상 주관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타락성적 악습적인 거 즉, 세상 일반인이 볼 때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다해도 그 좋다고 하는 것이 좋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좋음으로 성격도 성질도 바꿔 넣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사건 환경에 부딪히면서 자기 속에 들어있던 좋지 않은 것이 나오지를 않게 된다. 예수님의 것으로 바꿔놓으면 오히려 크고 작은 사건에 부딪힐 적마다 그것을 여하히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나온다. 안 바꾸면 지혜가 안 나온다.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대립이 될 테니까.

 

어쨌든 세상정신의 소원 목적에 성경구절을 붙인다면 이건 전부는 넓은 길이요 사단 마귀의 짓이다. :에 보면 용의 머리가 일곱 개다. 실지로 머리가 일곱 개가 달린 짐승은 없다. 그러니까 교회흉내를 잘 낸다. 또 뿔은 열 개다.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니까 뭔가 혐오스럽고 기이하다. :에서 용을 옛 뱀이라고도 했고, 사단이라고도 했고, 마귀라고도 했다.

 

성경의 용은 상징적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 안에 무형적인 이 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용의 대가리가 일곱 개 즉, 머리가 많으니까 이거는 조직을 말하는 거다. 머리가 많은 데는 조직이 생긴다. 즉 교회의 제도를 흉내를 내면서 교인들을 잡아먹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이 그렇다.

 

기독교 안에 세상의 허락을 맡은 이러한 조직들이 있으면 교인들은 이것이 하늘의 성격의 띤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건 눈에 보이는 것만 시인을 하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시인을 못하는구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눈에 안 보이게 자기 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시인을 안 하려고 하고 있구나. 아주 악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을 속이고 있으면서 사람 앞에서 기독교 종인 것처럼, 교회인 것처럼 간판 붙이고 십자가 붙이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걸 보고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 바뀌어졌느냐이다.

 

신학공부 하러 오는 목사님 교회에 어느 날 신사 한 분이 와서 어느 교단이냐고 물어서 독립교단이라고 하니까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예수님은 장감성 중에 어느 교단에 속했느냐? 예수님이 무교단이라면 나도 무교단이면 된다. 예수님 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치가 그렇지 않느냐?

 

요즘 하도 이단이니 뭐니 하고 기독교계에서 떠드니까 성문적 교리적으로 이단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느 교단에 속해있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그 다음에 이룰구원에 대한 신앙성질적인 면에서 은밀한 것을 아느냐? 그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거짓이고 누가 이단이 되는 거냐?

 

오늘날 기독교 안을 사단 마귀가 완전히 눈을 감겨 놨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더 지독하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사람을 더 죽인다. 그런데 그걸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뭐가 되며, 그 사람의 정신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이냐? 그런 거짓 종과 이단성을 가진 자들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있다. 거짓 종 속에는 그 성질이 이단성이 또 들어있다. 그래서 거짓은 이단과 잘 통하는 거다. 성경에 거짓이 이단을 몰고 온다고 했다.

 

누가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어느 파요?’ 하고 물으면 예수 직통파라고 하라. 예수 직통파는 우리교회밖에 없다. 우리교회의 교훈은 죽음 저 넘어 영원 궁극적인 세계이다. 다른 교회에서 이렇게 가르친다면 그곳도 같은 궁극교회다. 그 교훈은 천국복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예수 믿는 걸 장난 식으로 믿고 있다. 타 종교인들처럼 그냥 하나의 종교인으로 믿고 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의 종교인으로 지킨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주일을 지키는 거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예배를 하는 거다. 이건 종교인으로서 지키는 것과는 질이 다른 거다.

 

자기 마음대로 넓은 길을 가면서, 그런 정신을 갖게 하면서 성경을 이용하면서 가르치는 건 다 넓은 길이다. 그러는 그들이 아무리 자기는 좁은 길이라고 우겨대도 그건 아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이 좁은 길인지, 넓은 길인지 어떻게 아느냐?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이해타산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면 그건 넓은 길이다.

 

세상 이방인들은 넓은 길을 간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 길, 좁은 길, 영생 길이다. 그러면 영생 길을 가는 건 어떻게 아느냐? 오직 하나님의 의사단일성,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걸 보고 알 수 있다. 예수를 안 믿는 이방인들과 세상적으로 흐르는 기독교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 안의 종교인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과 그 질이 똑같이 들어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단일성이란다면 여기는 하나님의 온전이라고 하는 것이 붙는 거다. 이건 천국복음이다. 하나님의 온전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아니다. 의사단일이 아니면 온전이 아니다.

 

본문에 보니 넓은 문은 사람들이 많이 가느냐, 가끔씩 간혹 들어가느냐? 많이 들어간다. 많이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는 이방인들의 소원 목적과 같다 그 말이다. 이방인들과 같은 질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게 넓은 길이다.

 

넓은 길로 가는 교회가 있고 교인이 있다. 성경에서 봤지만 주님의 집에서 먹고 마셨으니했으니 이게 불신자냐? 예수 안 믿는 사람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것도 목사가 앞서서 인도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좁은 문을 분별을 해야 되는데 영의 눈과 귀가 어두우면 이 좁은 문은 못 찾는다. 넓은 길로 다니는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들을 때는 뭐 이러냐그렇게 들린다.

 

예루살렘에 보면 양의 문이 있다. 양의 문에는 이리도 양도 들어가느냐? 양만 드나드는 문이다. 영의 눈과 귀가 없으면 좁은 문은 못 찾는다. 이건 꿈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기도한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니다. 진리이치에서 정신 사상적으로 나오는 거다.

 

문이 좁으면 짐을 머리에 지고, 손에 들고, 짊어지고, 업고서는 못 들어간다. 문이 좁으니까 한 사람의 몸만 빠져나갈 수 있다. 한 사람만 빠져나가는데 진리로 주님 닮은 것만, 자기 실상화된 것만 빠져나간다. 이게 좁은 문이다. 우리가 가는 문은 그런 문이다. 우리가 날마다 사는 문이 그런 문이다. 좁은 문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된 것만 들어간다. 아무나 들어가기 쉽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는 거다.

 

24: 이걸 보면 좁은 문이 항상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문이 닫히면 찾지를 못하는구나. 왜 그러냐? 벽에 문이 있으면 자세히 보면 그 문이 표시가 날 수가 있지만 이건 아예 찾지를 못한다.

 

그러면 이 문은 무엇에 속한 거냐? 이런 경우 좁은 문이란 하나의 기회를 말함인데, 기회가 왔을 때에 말씀을 듣고 그 분의 의사단일성에 맞추는 것이 좁은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예수님 당시 때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동리에 오셨을 때 만나서 말씀을 듣고 그 분의 의사성으로 들어가는 게 좁은 문이다.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의사성에 맞춰진 신앙사상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예수님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신앙사상이 되는 것이다. 지금 신앙의 영적 정신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어느 동리에 와서 가르쳤다 그랬을 때 자기는 뭘 하느라고 못 듣고 있다가 부랴부랴 왔는데도 예수님이 이미 떠났다면 들을 기회를 놓친 거고,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건 놓친 것이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가면서 대화로, 회당에서 안식일 날 가르치고 하는 게 그 때 그 때마다 기회요 좁은 문이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의사단일성에 합해져야지 거짓된 교회 교인들처럼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깨닫는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이건 좁은 문이 아니다. 그건 네 식으로 믿는 거다. 이건 예배당에 온 게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의사단일에 합해져야 한다. 내 것이 아무리 좋아도 내 것은 버리고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룰구원 차원에서 구원을 얻는 거다. 자꾸 성장이 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자리까지 그 구원이 자꾸 충만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게 성령 충만이 되는 거다.

 

그런데 성경도 안 읽고, 거짓된 종들이 하는 짓을 따라 밤새도록 철야나 하고, 자기 성격 성질도 못 뜯어고친 상태에서 무슨 성령이냐? 성령이 그런 성령이냐? 성령은 거룩한 신이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깡패 같은 자들에게 들어와서 역사를 하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신사 식으로 믿어라. 왜 무당 푸닥거리 식으로 믿으려고 하느냐? 그건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영적 정신 사상적 교훈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한 동리에서만 머물러 있지를 못하는 거다.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의 각 교회마다 그 종의 입으로 통해서 어떤 교훈을 하더라도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같이 올라가자고 하면 따라갈 수 있게 하는 교훈이라야 한다. ‘신령한 예루살렘으로 신앙사상이 올라가자 올라가자 올라가자. 너의 존귀 영광성이 클라이막스까지 되는 그 위치까지 올라가자 올라가자.’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그건 못 보고 그저 복을 달라고만 하고, 배만 부르면 되고, 자기 집에 돈 푼 꽤나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게 불에 안 타지느냐?

 

우리가 그런 걸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안 구하면 안 주는 것이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그런 걸 구해서 가진 것이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그리 어리석고 둔탁하고 이치에 안 맞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듣고 있을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며 머물러 있는 그 동안이 기회다. 크게 보면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이 기회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어떤 환경 장소가 기회다. 이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다. 성경에 보면 선지자들이 항상 살아 있겠느냐? 선지자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 말씀을 듣는 게 너의 기회다. 이 기회를 붙잡은 사람이 말씀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의사성 의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다. 그 분의 의사단일로 쑥 들어가는 것. 그게 자기 구원이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교인들이 지옥에서 천국하는 그게 아니다.

 

좋게 말해서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예수 믿으면 지옥에서 천국 간다고 하는데, 이건 네 마음대로 간 거냐?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독권적인 역사로써 들어간 거다. 그러니 네가 예수 믿느냐? 이제 너는 그 면에 신경 쓰지 말아라. 그 면에 신경을 쓰도록 만드는 게 마귀의 수법이다. ‘열심히 해라. 부지런히 해라. 그래야 네가 천국에 들어간다하는 건 바른 교훈이 아니다. 마귀의 수법이다. 주님이 이뤄놓은 걸 왜 인간 네가 걱정을 하느냐?

 

오늘날 대표적으로 장감성이니 신학박사니 해도 도마는 세상으로 갔고하는 성결구절을 도마는 세상으로 갔으니 지옥에 갔다고 하니 그게 어찌 신학박사고 교수냐? 성경의 영적인 말 한 마디가 성도들의 죽고 사는 게 들어있다. 그 자들이 이 책임성을 아느냐? 모른다. 그러니 교인들이 얼마나 사단 마귀의 역사에, 거짓 종들의 역사에 휘말리겠느냐? 계시적으로 보면 이건 애굽의 바로 왕이 목사가 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려먹는 것과 같다.

 

그리고 교인들은 자기 속에 애굽성이 들어있어서 바로만 만나면 이 바로와 짝이 맞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기 속의 새사람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은 다 죽어버린다. 이건 자기 마음대로 믿는 거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몸이다. 이런 인식을 하고 사는 신앙은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현세에서 이루는 성도이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 보면 대부분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의 복 받는 쪽으로 나가고 있고, 그나마도 주관성이 강한 자는 주일날이라도 밖에서 할 일이 있으면 그리로 가고 한다. 이건 기회가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은 기회고 뭐고 모르는 거다. 성경을 읽어도 모르는 거다.

 

교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다닌다면 이건 내 인생의 교과서요, 나는 성경대로 삽니다. 나는 떳떳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하고 선언을 하는 셈인데, 성경내용에 있는 정신대로 살면서 성경을 들고 다닌다면 참 교인이지만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만 대부분 그냥 악세서리로 가지고 다니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세 끼 밥을 먹듯이 먹어야 한다.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찾아먹으면 몸이 건강하듯이 영인성장 면에서 성경을 꼬박꼬박 찾아먹으면 영이 건강하다. 아니면 자기 사는 면이 육 쪽으로 들어가 있다. 자기가 말을 하는 것이다.

 

기회는 주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게 아니다. 그 기회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이 세상에 머물 동안만이다. 이 기간 동안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룰구원의 은혜를 만들어 주기 위한 기회이다. 아닌 말로 주님이 날 데려가면 기회는 없다. 또한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진리본질의 기회를 만들어 주셔야만 한다. 안 그러면 양들은 흩어지게 된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흩어지게 되는 것이 원리다. 집안에 아버지가 없으면 온 가족이 흩어지기 쉽다. 이 세상에 머물 동안 주님을 떠나면 기회는 없다.

 

오늘날 각 도시 각 마을마다의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에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적중성으로 살려는 신앙인지? 그게 교훈적으로 나오는 자기에게 기회인데, 말세교인들이 그런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심은 우리 모두 자기를 보고 하는 말씀이다.

 

:에 보면 끈질긴 과부의 기도 끝에 재판장에 늘 찾아가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데, 그 원수는 개인감정으로는 안 되고 법으로라야 된다. 법으로 갚는 원수. 그런데 그 말끝에 보면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했다.

 

과부로 통해서 그 말씀이 나오고 있는데, 그 과부는 재판장으로부터 원수 갚음을 받았다. 응답을 얻었다. 그런데 그 말씀 이후에 예수님의 말씀이 인자가 올 때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했는데, 그러면 그 믿음은 무슨 믿음이냐? 원수 갚는 믿음은 없구나.

 

어느 성경에 말세의 성도들이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원통? 누구에게?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해서 남에게 속고 속히고도 모르고, 이룰구원에 완전히 손해당하고 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원수를 모르는구나. 그러니 배만 부르면 이게 천국인가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 자기가 몰라서,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해서. 이룰구원 차원에서 마귀에게 넘어가고 거짓 것에 넘어가고 이룰구원에 엄청난 손해가 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원통함을 못 푸는 것은 몰라서요, 그게 실감이 안 나는 것이다.

 

사람은 인격을 가진 존재인지라 남에게 속고 사기를 당하면 분하고 원통하고 자기가 그런 자기를 생각할 때 내가 이렇게 못났다하며 자기가 밉다. 그런데 그 원통을 못 푼다. 뭐가 원통한 건지, 무엇이 자기를 속였는지를 모르니 남 쪽으로만 자꾸 생각을 한다. 어찌 됐건 그렇게 되면 손해는 자기가 보는 거다. 자기가 몰랐건 남이 자기를 속였건 속임을 당하는 것은 자기가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능해서이다.

 

여기 과부라고 한 것은 남편과 문제가 된 것이다. 자기 평생을 손해를 보는 여자도 있다. 얻어맞으며 살고, 남편이 돈도 안 갖다 주고 맨날 술만 퍼먹고 여자 집에나 가고 한다면 얼마나 울분이 터질까? 자기 무식, 자기 무지, 자기 무능에서 이게 된 것이다. 그 원수 좀 갚아라. 그 원통함을 풀어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부터 풀어야 한다. 그게 신앙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기회는 다 놓치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어찌될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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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3 요한복음 (계시보기)중복적 거듭남이 없으면 회개가 안 된 거다. 요3:3  김경형목사  2022-09-23 64
17592 고린도후 질그릇속에 담긴 보배 고후4;7-18  전원준목사  2022-09-22 364
17591 요한복음 광야에서 외치는 자 요1:6-15  강승호목사  2022-09-21 125
17590 마태복음 예수를 따르는 자 마16:24-28  강승호목사  2022-09-20 195
17589 누가복음 천국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넣어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눅13:20-21  김경형목사  2022-09-18 126
17588 요한복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1-3  김경형목사  2022-09-18 74
17587 열왕기하 좋은 소식을 전하라 왕하5:1-7  강승호목사  2022-09-15 196
17586 히브리서 (계시보기)안식일, 토요일이냐, 주일이냐? 히4:11  김경형목사  2022-09-14 62
17585 에스라 슬픔과 기쁨의 예배 스3:8-13  강승호목사  2022-09-14 134
17584 에배소서 (계시보기)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라. 엡4:13  김경형목사  2022-09-12 76
17583 누가복음 천국은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 눅13:15-19  김경형목사  2022-09-11 85
17582 요한복음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요2:23-3:2  김경형목사  2022-09-11 48
17581 에배소서 (계시보기)인간의 가치를 아는 게 인간이다. 엡2:10  김경형목사  2022-09-10 72
17580 고린도후 빛 된 사역을 이루자 고후 4;1-6  전원준목사  2022-09-08 129
17579 데살로전 주님의 일꾼 살전2:1-6  강승호목사  2022-09-07 161
17578 잠언 하나님을 공경하라 잠3:1-10  강승호목사  2022-09-06 103
17577 누가복음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눅13:10-17  김경형목사  2022-09-04 62
17576 요한복음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2:11-22  김경형목사  2022-09-04 88
17575 요한복음 (계시보기)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정신. 요5:24  김경형목사  2022-09-04 48
17574 요한일서 너희는 예수와 사귀라 요일1:1-10  강승호목사  2022-08-30 189
17573 고린도전 (계시보기)생명으로 연결되는 삶과 사망으로 연결되는 삶. 고전15:54  김경형목사  2022-08-29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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