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돌아온 한 명

누가복음 최주훈 목사............... 조회 수 179 추천 수 0 2022.10.09 06:54:19
.........
성경본문 : 눅17:11-17 
설교자 : 최주훈 목사 
참고 : 중앙루터교회 

(교회력설교)20221009 성령강림일 후 열여덟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눅 17:11-17

돌아온 한 명

 

‘나병 환자 열 명이 치료받았지만, 돌아와 감사한 것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감사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아직도 이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친한 친구들한테 ‘너 붕어냐?’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붕어 기억력이 3초밖에 안 된다는 속설을 아실 겁니다. 말 그대로 속설인데, 제가 워낙 깜박거리다 보니까 친구들이 그렇게 말했던 같습니다. 

 

오늘 교회력 복음서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내가 확실히 그 붕어가 맞겠다’ 싶어 더 찔립니다. 치료받은 이는 열 명인데, 돌아와 감사한 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이제껏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복음의 이 말씀을 읽고 말해왔는데, 내 이야기로 돌리고 보니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굳이 하나님 은혜까지 멀리 가지 않더라도 부모, 형제, 친구, 스승, 선배등등, 이제껏 살면서 수많은 혜택을 입고 살았지만, 제대로 밥 한 번 대접 못 하면서 배은망덕하게 사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감사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걸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런 팍팍한 우리네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듯 오늘 말씀에서 감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감사라는 주제에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짧은 복음서 말씀엔 감사라는 주제만큼이나 특별하게 새겨야 할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병 치유

 

우선, 이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부터 시작해 보지요.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건, 기적 같은 치유 때문입니다. 나병은 이전에 문둥병으로 불리던 한센병입니다. 당시엔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에선 하나님의 저주로 불렸고, 나병에 걸린 사람은 성문 밖으로 쫓아내서 격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에 언급된 나병 환자 열 명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라며 힘을 다해 외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격리된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피부의 약한 부분부터 괴사시키는 병의 특성 탓에 성대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 이것은 절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들에겐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이 병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얻은 병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억울하게 사회에서 내쫓김 당했고, 자유를 박탈당했고, 정상적인 관계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차별 당하고 내몰린 것, 이 억울함은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열 명은 같은 아픔을 부둥켜 안고 서로 이해하며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는 돌맞아 죽을 각오로 사람들 앞에 발을 내디뎠고,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짜냅니다. 지난주일 제가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존재의 용기”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그런 용기로 사람들의 눈총을 뚫고 예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치료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그러자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나요? 우리는 미리부터 예수님의 자비롭고 신비로운 치유능력을 떠올리며 감탄할 준비부터 하지만, 복음서 말씀은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가복음 17:14 말씀을 함께 찾아서 읽어봅시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치료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여기엔 예수님의 다른 이적이나 치유 사건들처럼 만져주거나 어떤 치료의 신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네가 나을 것이다!’라는 선언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작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달랑 이 말 하나 가지고 주님이 치료했다고 보기엔 사실 무리입니다. 

우리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서 혹시 이 구절을 치유의 말씀으로 들을지 모르겠지만, 전후 맥락 없이 이 구절만 읽으면,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규정된 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게 좋을 겁니다!’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치료를 위한 말씀이라느니, 아니면 이들의 믿음을 측정해 보려고 이런 명령을 했다느니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저 확실한 건 예수님이 직접적인 치료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열 명이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을 듣고 가다가 완치되었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열 명이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멘’하면서 ‘이제 나 다 나았어!’하면서 제사장에게 힘차게 갔을까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너무 건조하게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화 가운데 숨겨진 예수님의 감정도, 그리고 이 열 명의 감정도 오늘 본문만으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것으로 봐서 이 사람들은 모두 간절히 치료받길 원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따라서 했더니 가던 길에 치료 받았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돌아온 한 명

 

또 한 가지 이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열 명이 치료받았는데 한 명만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돌아온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다고 성경이 설명하는 데, 이것으로 보아 돌아오지 않은 아홉은 유대인인 게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17~18절 말씀에서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데, 언뜻 보면,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오지 않은 아홉 명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예수님이 직접 치료해 준 것도 아니고, 가다가 나았습니다. 어쩌면 그 아홉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사장을 찾아가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느라 오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불치병이 나았으니 꿈에 그리던 가족에게 달려가느라 오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누구에게서 치료받은 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아홉 사람을 두고 감사할 줄 모르는 몹쓸 인간이라고 미리부터 매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홉은 어디있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을 두고 그 아홉명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읽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온 한 명에 온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게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순수혈통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피가 섞인 잡종입니다. 순수혈통이 아니라서 애초에 하나님이 버린 저주받은 종족, 지옥의 땔감 정도로 이해합니다. 사마리아인도 자기들을 그렇게 멸시하고 천대하는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찬찬히 읽어보면 참 이상해요. 열 명 속에 아홉은 유대인이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열 명이 예수님 말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다가 병이 싹 나아 버립니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의 율법 명령에 따라 유대인 제사장에게 갈 이유가 없습니다. 가봤자 거기서 쫓겨날 게 뻔하기 때문이지요. 

아마, 이 사람은 마지못해 아홉과 같은 길을 가면서도 자기에겐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가기는 가는데 맘에도 내키지 않고, 가봤자 상처만 받게 될 그런 길을 걸어갔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왜 그 길을 갔을까요? 

 

말씀과 공동체 의식

 

제 생각에 두 가지가 이 사람의 걸음을 이끌었다고 여겨집니다. 첫째는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 두 번째는 아픔을 함께 나누던 동료에 대한 연대의식, 이것입니다. 가기 싫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이 길을 걷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잊고 싶지 않은 귀한 묵상 주제 하나를 보게 됩니다. 

저 열 명은 힘없고 약할 땐 모두 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였습니다. 출신성분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열 명은 힘을 합쳐 살려달라고, 고쳐달라고 큰소리를 내며 군중 속으로 용기 있게 달려갑니다. 그런데 낫자마자 구분선이 다시 생겨버립니다. 누구는 유대인, 누구는 사마리아인……. 힘없을 땐 서로 격려하며 하나였던 사람들이 몸이 멀쩡해지자 매정하게 관계를 끊고 제 이익을 찾아 떠나버립니다. 의리나 정 같은 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붕어 같은 우리 본성을 폭로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나도 몸이 아플 때만, 억울하고 기분 안 좋을 때만, 내가 손해 보았을 때만, 도움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나 어려울 때만 친구, 의리, 사랑 찾다가 상황이 좀 나아지면 제 갈 길 찾아가는 얍삽한 아홉 명 중 하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돌아볼 일입니다. 

 

오직 예수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누가복음이 기록되었던 1세기 상황으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는 불치병이 완치되는 기적과 그 기쁨에 마음이 가지만, 정작 복음서 기자가 1세기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목표는 한 장면을 뚜렷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18~19절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와 찬송을 예수님께 돌리는 장면인데 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8-19)

 

1세기만 해도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니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유대인의 율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따를 것인지 모호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길이 모호하던 시절, 누가복음은 방금 읽은 이 구절을 통해 ‘예수가 바로 우리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라고 과감히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 통해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세상, 기댈 곳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통해 오늘을 살아낼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이 말씀은 1세기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과 용기의 방향입니다. 누가복음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우리에게 설명하고, 예수님의 입을 통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합니다. 세상 가장 막다른 곳에 다다를 때,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고 억울할 때라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사마리아인과 우리의 찬송이 됩니다. 

 

이웃 사랑

 

한 가지만 더 묵상하고 마칠까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딱 두 번 나오는데, 오늘 함께 묵상한 누가복음 17장과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이 둘을 연결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25 이하를 읽어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답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는데, 거기서 사마리아인은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주인공으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 본문인 누가복음 17장에서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소개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이야기는 서로 한 쌍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선 이웃 사랑을, 그리고 뒤에선 하나님 사랑을! 그리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무척 도발적인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5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웃사랑’을 덧붙이면서 이것이야말로 온 율법의 핵심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온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모범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사람 취급도 않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유대인의 모범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지나쳐 버립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치료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아홉은 어디 있고 이방인만 왔느냐?”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통해 유대인의 무관심과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대조시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이번 주의 교회력 본문의 요점은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이 이 대조를 통해 강조하는 바는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저주하는 원수는 정말 죄가 중해서 원수인가? 진짜 원수가 아닌데도 원수로 지목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혐오의 대상이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난민, 때로는 나와 다른 성향과 기질을 타고난 성소수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방인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예수의 복음 안에 있다면, 출신성분이나 자격 요건을 따지지 않고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의 길을 닦아나가야 합니다.

 

우리도 이방인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인과 동일한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얻기 위해 한 마리의 양과 사라진 동전 한 닢을 찾듯이 힘썼고(눅15장), 결국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늘 우리가 쌓아 놓은 경계 밖 이웃 한가운데서 발견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늘 불가능과 한계의 벽을 넘어 우리를 기다리고 기쁘게 맞아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자녀가 되어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어디에서 발견되어야 할까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이 교회 담장 안에서뿐 아니라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웃 한 가운데서도 발견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7223 잠언 분별력이 우리를 지켜 준다 잠2:1-11  김기석 목사  2021-10-29 302
17222 누가복음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5-13  김경형목사  2021-10-26 147
17221 히브리서 끝까지 붙잡아야 할 우리 신앙 히6;1-3  전원준목사  2021-10-23 465
17220 데살로전 사랑의 관계로 살전2:1-8  강승호목사  2021-10-21 205
17219 아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2:8-13  정용섭 목사  2021-10-20 223
17218 에배소서 전투하는 교회 엡6:10-20  정용섭 목사  2021-10-20 2003
17217 요한복음 예수와 영생 요6:52-58  정용섭 목사  2021-10-20 137
17216 요한복음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6:35, 41-51  정용섭 목사  2021-10-20 195
17215 에배소서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4:1-16  정용섭 목사  2021-10-20 131
17214 시편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14:1-17  정용섭 목사  2021-10-20 219
17213 에배소서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2:11-22  정용섭 목사  2021-10-20 115
17212 마가복음 왕-선지자-그리스도 막6:14-29  정용섭 목사  2021-10-20 106
17211 누가복음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눅11:5-13  김경형목사  2021-10-19 153
17210 야고보서 하늘의 제혜를 행하는 신앙 약3;13-18  전원준목사  2021-10-16 237
17209 마태복음 역경을 이기는 지혜 마22:15-22  강승호목사  2021-10-13 310
17208 누가복음 (주기도문)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눅11:3-4  김경형목사  2021-10-12 115
17207 야고보서 성숙한 신앙인의 말(대화) 약3;1-12  전원준목사  2021-10-09 321
17206 이사야 앵무새 신앙 넘어서기 사29:13-14  김기석 목사  2021-10-08 352
17205 고린도후 우리가 바라보는 것 고후4:16-18  김기석 목사  2021-10-08 528
17204 시편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시36:5-10  김기석 목사  2021-10-08 395
17203 누가복음 시므온의 결정적 순간 눅2:25-35  김기석 목사  2021-10-08 295
17202 마태복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마1:18-25  김기석 목사  2021-10-08 416
17201 이사야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처럼 사26:16-19  김기석 목사  2021-10-08 230
17200 시편 말씀이 비추는 길을 따라 시119:105-112  김기석 목사  2021-10-08 313
17199 누가복음 사가랴의 어떤 하루 눅1:8-17  김기석 목사  2021-10-08 242
17198 누가복음 (주기도문)나라이 임하시오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눅11:2-3  김경형목사  2021-10-05 79
17197 시편 복된 인생의 길 [1] 시371-9  전원준목사  2021-10-02 508
17196 마가복음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6:1-13  정용섭 목사  2021-09-30 155
17195 마가복음 딸아! 막5:25-34  정용섭 목사  2021-09-30 184
17194 고린도후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6:1-13  정용섭 목사  2021-09-30 197
17193 마가복음 하나님 나라와 씨 막4:26-34  정용섭 목사  2021-09-30 177
17192 사무엘상 왕의 출현 삼상8:4-11, 16-20  정용섭 목사  2021-09-30 147
17191 이사야 충만! 사6:1-8  정용섭 목사  2021-09-30 143
17190 요한복음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16:5-15  정용섭 목사  2021-09-30 156
17189 시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1:1-6  정용섭 목사  2021-09-30 28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