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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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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성전에 모인다’는 말과 ‘예배당에 모인다’는 말이 같으냐, 다르냐? 행2: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는데, 성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대로 지어졌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상징이다. 성전에 갈 때는 하나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예배당은 예배나 교회의 행사를 위해 모이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지게 한다. 그런데 성전에서 ‘세상에서 복 받아라. 잘 먹고 잘살아라’라고 한다면 이것은 성전의 일이 아니다. 창:에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거룩하게 지켜라’라고 하는 것은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땅에 편만하라는 거다. 이 일이 성전의 일이다. 예배당에서도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오늘날 예배당에서 하는 것을 보면 성전에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전에 모였다. 사도들은 집에서 모였다. 어느 게 바로 된 거냐? 어느 곳에서 모이든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되게 가르치는 게 천국복음이요, 하늘나라의 복음이요, 이 일을 하는 게 성전이다. 이런 마음과 정신과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배당에 모인다면 장소는 예배당이지만 이 사람은 성전에 올라가는 거다.(시:)
인간의 말로 예배당을 ‘제 1성전, 제 2성전’ 하면서 자랑을 해도 이 예배당에서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거룩한 말씀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강도의 굴혈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예배당에 앉아서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의 온전이 아닌 세상축복을 원하고 있다면 이것은 강도들의 마음이요 예수이름을 놓고 장사를 하는 거다.
‘교회’라고 할 때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는데,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속에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닮은 무형교회가 있다. 무형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이다. 자기의 소원 목적이 이 본질에서 벗어나면 믿음이 없는 거고, 세상적인 사람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교회에 다니면서 이방인처럼 살고 우상을 섬기면 벼락을 맞는다. 얻어맞는다는 거다. 얻어맞는 방편은 여러 가지다. 사건으로 얻어맞고, 전쟁으로 얻어맞고,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얻어맞게 된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에서 복 받고, 자식이 잘되고 하는 쪽으로 마음의 저울추가 내려져 있으면 이 사람은 생명과를, 거룩한 말씀을 안 먹은 거다.
원칙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빌어먹는 법이 없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예수 믿으면서도 돈밖에 모른 채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자로 살다가 늙어지면서 몸에 병이 드니 이 병을 고치겠다고 재산을 다 날리고, 자식들은 떠나가고, 완전히 바닥에서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돈 돈’ 한다면 이 사람은 자기가 당할 대로 당하고서도 회개할 줄을 모르는 거다. 회개하는 것을 못 배우고 못 깨달으면 회개를 못 한다.
사람이 미련하면 얻어맞으면서도 왜 얻어맞는지를 모른 채 그 원인을 자꾸 남 쪽으로 돌리며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팔자타령을 하면서 속에 가시 같은 마음을 품는다. 자기 몸 안에 가시가 있으면 누가 더 아프냐? 남 탓을 하는 것은 알고 보면 남을 찌르는 게 아니라 자기를 찌르는 거다. 마찬가지로 사기를 치려면 자기가 자기부터 속여야 남에게 사기를 친다. 또한 남을 두들겨 패려면 자기부터 힘을 내야 남을 때린다. 그러니 자기부터 힘이 드는 거다. 이런 이치를 어기고 예수 믿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우리는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한 말씀에서 이치를 찾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느냐? 죄를 안 지으면 자기 마음을 다스린 거냐? 아니다. 반드시 생명과를 먹어야 자기 마음 다스림이 나오고, 자기 주위 다스림이 나오고, 자기 위치와 신분과 언행심사를 다스림이 나오고, 지혜가 나온다. 지혜가 나오기 때문에 주위 환경을 다스림이 나오는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했는데 이게 얼마나 큰 복이냐? 이 복은 이룰구원으로 나가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거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말씀이 능력화되어서 자기의 언행심사로 통해 현실을 정복해 나가는 거다. 세상은 다 죽이는 정복이지만 우리는 살리는 정복이다. 이룰구원으로 나가는 것은 살리는 정복이고 사는 정복인데 이 일에 왜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고 죽는 것을 무서워하겠느냐?
생명과 속에는 만물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는 게 들어있다. 우리가 생명과인 말씀을 귀로 듣고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자기가 진리로 자체화 되는 거다. 이러면 영감성이 빠르고 민첩하다. 믿는 우리는 몸은 쇠퇴해 가더라도 신앙정신은 민첩하고 빨라야지 영적인 면이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무디고 더디면 쓰겠느냐? 이러면 언제 믿음으로 쑥 들어가겠느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한 것은 ‘예배당에 모이기를 힘쓰더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전에 모인다는 것은 영적인 뜻이 들어있다. 예배당에 모이는 것은 하나의 행사다. 예배당에서 집회를 하면 성전의 집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전과 예배당을 구별해야 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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