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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희망 없음
사무엘 하 17:15~29
엄혹하고 치열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현실에 적용하며 그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려는 거룩한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인 위에 주님의 함께하심을 빕니다.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다윗 왕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잘난 압살롬을 왕으로 옹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순서를 무시하고 힘을 동원한 것은 잘못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좋은 인품과 지도자 수업을 가르쳐 정당한 방법으로 지도자 경쟁에 참여하게 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히도벨은 사람을 잘못 골랐습니다. 사람이 시원찮으니 희망도 없습니다. 지도자에게 철학과 안목이 없으니 절망입니다. 아히도벨은 죽음이 차라리 희망없는 삶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삼하 17:23 새번역)
지방색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색은 정치적 지형을 동과 서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남과 북으로 나뉜 현실에서 정치가 국민을 통합하고 하나 되게 하기는커녕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동서로 나뉜 장본인이니 정치에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는 정치보다 더 복잡합니다. 본래부터 존재하던 지방색에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른 외국 선교부의 사역이 이를 심화시켰고(물론 네비우스가 그런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같은 교단 안에서도 지역 갈등이 심화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예장 합동측의 사분오열은 파벌을 조성하는 지역감정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민심을 통합하고 조화를 만들어야 할 정치가 지방색을 부추겨 존재하는 것이 모순이듯, 세상에 평화를 실현하고 하나님 나라 가치를 추구해야 할 교회가 지방색에 빠져있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지역감정도 극복하지 못하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운하는 것은 개가 웃을 일입니다.
다윗이 요단 동편으로 피난 간 것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방색입니다.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등 요단강 서편의 지파들이 다윗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유다 지파는 반란을 꾀한 압살롬의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사태가 이렇자 다윗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과 암몬을 향했던 것입니다. 특히 마하나임은 압살롬의 반란에 대처하는 다윗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에 이르자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도망에 지친 다윗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 일행이 지치고 굶주렸을 것으로 생각하여 “침대와 이부자리와 대야와 질그릇도 가지고 오고,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씨도 가지고”(삼하 17:28 새번역) 왔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이들의 영접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다급한 처지의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주님을 돕는 일입니다.
하나님, 지금 이 땅에도 지도자답지 못한 자를 추켜세우는 아히도벨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희망 없음에 이르기 전에 절망을 비켜 갈 지혜 주시기를 빕니다.
찬송 : 452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https://www.youtube.com/watch?v=FghQYw8kVb4
2022. 10. 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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