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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5: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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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52531 |
설교보기 : https://youtu.be/0gFF2IWCQAc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5:11~14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부활절 셋째 주일, 2022년 5월1일
오늘 설교 본문인 계 5:11~14절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각자 다르겠으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들린다는 생각에서는 비슷할 겁니다. 일단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이 너무 생경합니다. 보좌, 생물들, 장로들, 천사, 어린 양 등등입니다. 고대신화의 한 장면에 관한 묘사처럼 비칩니다. 아니면 SF 영화나 애니메이션 동화처럼 들립니다. 요한계시록이 고대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글이라서 그렇습니다. 묵시문학은 극단적인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글쓰기 유형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일종의 마법과 비슷한 세계 안으로 안내하려고 단단히 각오를 다졌습니다.
하늘의 외침
오늘 본문에는 두 번의 외침이 나옵니다. 한 번은 11절과 12절에 나옵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하늘 보좌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물과 장로가 나옵니다. 그들을 둘러싼 천사의 수가 ‘만만’이고 ‘천천’이었습니다. 그들이 큰 음성이 들립니다. 하늘 천사들의 대합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여기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도 어린 양 개념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예수를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어린 양은 제단에 드릴 제물로서 가장 연약한 동물에 속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고난받는 종’을 서술하는 사 53장에서 이에 관한 영적 통찰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요한은 13절에서 또 다른 외침을 듣습니다. 하늘, 땅, 지하, 바다와 거기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외침입니다. 13b절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여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고, 어린 양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놓은 셈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도신경의 문구와 서로 통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외치는 내용이 네 가지 단어로 나옵니다.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입니다. 이 두 합창을 요약하면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동격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존엄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5장에서 언급된 어린 양은 6장 이후부터 세상 심판에 관한 일곱 개의 봉인을 차례대로 열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의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그리고 이런 요한의 환상을 오늘 우리는 실감할 수 있나요? 여기에 대답하려면 우선 네 항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찬송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찬송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찬송하는 사람은 자기를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중심에 놓거나 오히려 높이려 하기에 찬송의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행이나 백화점 등에서 점원이 고객에게 민망할 정도로 극존칭의 태도를 보이긴 합니다. 그런 태도는 돈벌이에 관계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찬송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찬송에는 그런 사적인 손익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입니다. 예를 들어서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그 풍경에 압도당합니다. 자기는 낮아지고 자연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런 경험이 우리의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 머뭅니다.
둘째, 존귀를 돌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존귀를 honour로 번역했습니다. 명예롭다는 뜻이겠지요. 국가에서 훈장을 받을 때 보통 명예롭다고 말합니다. 명예 교수나 명예 장로라는 직함도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명예를 돌린다는 말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그에게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찌든 오늘날 우리는 명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순수 명예직으로 한다면 서로 맡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아니면 그들에게 교사들만큼의 연봉만 준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에게 존귀를 돌리라는 말은 그에게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명예가 있다는 사실을 뚫어보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 명예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셋째,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영광은 헬라어 ‘독사’(δ?ξα)의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고르라면 ‘독사’가 그중의 하나일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에서 보는 대로 영광은 하나님께만 해당합니다. 이 단어는 오늘날 제대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귀한 손님이 자기 집을 방문해주면 “영광입니다.”라고 반응합니다. 거꾸로 귀한 집에서 자기를 초대해줘도 그렇게 반응하는 정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절정의 생명 현상입니다. 이사야의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영광은 거룩한 두려움(누미노제)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요한계시록 기자의 말은 거룩한 두려움의 깊이로 들어가라는 명령이자 초대입니다. 재산 증식만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버린 오늘날 우리가 과연 우리의 일상에서 영광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을까요?
넷째, 권능(크라토스)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크라토스는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대지진이나 화재나 화산 폭발이나 쓰나미나 토네이도 등, 막강한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는 그런 힘을 느낍니다. 지금 2년 이상 지구촌을 마비시키는 코로나19 팬데믹도 크라토스입니다. 권능 앞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무기력합니다.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나 재산도 권능 앞에서는 미미합니다. 권능은 파괴적인 성격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모든 파괴적인 세력을 압도하는 더 큰 권능이 있습니다. 작은 예로, 씨에서 그런 권능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는 씨가 땅에서 썩으면서 대지를 밀치고 나옵니다. 이보다 더 큰 권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린 양에게 권능을 돌리라는 말은 그에게서만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뚫어보라고, 그러니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라는 외침이자 명령이며, 호소입니다.
예수 vs 로마 황제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항목이 요한계시록 기자가 살던 시대에 어떤 이에게 해당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을 사람은 당시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로마 체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황제 앞에서 ‘율로기아, 티메, 독사, 크라토스’를 바쳤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칭호를 어린 양인 예수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당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유럽 연안의 모든 민족과 나라, 라인강 서쪽 지역까지, 그리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까지 지배하던 로마 황제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유대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서른세 살쯤의 나이에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비교해보십시오. 당시 역사가 중에서 예수를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이는 없습니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 무명의 유랑 랍비로 사는 동안 로마 황제는 당시 최고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로 시작하는 ‘팔복’에 관해서 설교할 때 로마 황제는 ‘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를 전파했습니다. 예수가 하늘의 새와 들의 야생화에 속한 존재론적 신비와 능력을 노래할 때 로마 황제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는 로마법과 예술과 시와 건축과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예수가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탄식할 때 로마 황제와 그 귀족들은 고급스러우나 탐욕에 근거한 연회를 즐겼습니다. 결국, 예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사회 소요죄라는 누명을 쓰고 마치 제물로 제단에 놓인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은 당연히 당대의 승자인 로마 황제에게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그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후예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을까요?
이 말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당을 더 크게 짓고, 정치인들도 교회에 와서 도움을 청할 정도도 정치적 위상도 높이고, 그리스도인을 집단 세력화해서 차별금지법을 막아낼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유럽 교회가 망했다는 말로 교인들을 교회 성장의 전위부대로 몰아가는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대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승리해야만 하나님의 승리가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정권이 바뀌든 않든 봄날에 새싹이 나오듯이 하나님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는 이미 생명 심판자이십니다. 교회의 외적인 힘이 줄어든다고 해서 예수의 영적 권위가 손상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망한다고 해서 예수가 망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이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 편에 계십니다. 그에게는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이미 담보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그 사실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발현하는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관념적이어서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실제 삶은 2천 년 로마 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출세하려면 그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야 합니다. 로마 체제에서는 그 로마 체제에 올라타야 합니다. 적당하게 황제 숭배를 하고, 라틴어 공부를 잘하고, 여러 가지 스펙을 쌓고, 가능하면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게 엘리트가 되는 코스입니다. 대한민국 새 정부의 각료 인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대개가 돈이 많고,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 가족에게 온갖 혜택이 돌아가게 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부도덕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물론 개인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오늘의 시대 정신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들은 로마 체제에서 출세하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자본주의 체제에 잘 적응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체제가 바로 찬송의 대상이고,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대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떨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며,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로마 정권과 똑같이 썩었으니까 우리는 오직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 곧 찬송과 영광의 삶이라고 생각할 분들은 없겠지요. 우리는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두 발을 거기에 딛고 살아야 합니다. 싸울 때는 싸우고 참을 때는 참고, 비판할 때는 비판하고 연대할 때는 연대해야 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은 일상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그 일상의 심연 안으로 들어가서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그럴 의지와 용기가 있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그럴 생각이 없이 그냥 상식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종교적 교양이나 액세서리는 아니니까요.
삶의 심층을 향하여
자,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찬송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항목도 이 문장에 맞춰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언제 존귀(honour)라는 느낌이 들고, 어떤 순간에 영광이라는 감정이 일어나며, 어떤 일을 대했을 때 권능을 만났다는 느낌이 듭니까? 이 네 단어가 종합된 경험은 언제 일어납니까? 여러분이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기쁜 순간을 손에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연봉이 오르면 기분이 조금 좋아지겠으나 존귀해진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멋진 옷을 입었다는 말을 들으면, 또는 예뻐졌다는 말을 들어도 잠시 우쭐할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손주를 보거나 이국적인 나라에 여행을 가면 기분이 상쾌해지기는 하나 조금 지나면 잠잠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행운을 만나지 못해서 자기 인생이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과잉과 일상의 공허 가운데서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모조품 찬송과 유사 존귀와 사이비 영광과 가짜 권능을 기를 쓰고 만드는 중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묘사된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은 우리의 찬송이 없어도 원래 존엄한 존재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다음의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를 찬송하면 우리도 찬송을 받습니다. 그를 존귀하게 여기면 우리도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그에게 영광을 바치면 우리도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에게 권능을 돌리면 우리도 권능의 빛에 휩싸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바뀌는 겁니다. 따라서 가난과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에서도 여전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외로움으로 인해서 오히려 봄꽃과 벌레와 퇴비와 바람과 구름, 책상과 책과 밥그릇과 커피와 피아노 소리가 생명의 빛으로 경험됩니다. 그런 믿음의 경지로 더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생명 빛에 싸여 찬송과 영광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경지에서 현재 자기의 삶이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소위 ‘잘나가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느라 지쳤을 수도 있고, 이만하면 됐다 하고 무사안일하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찬송’과 ‘영광’의 세계는 여러분이 습관적으로 따라가는 그 세계보다 훨씬 심층적입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근본에서 다릅니다. 모조품이 아니라 진품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만 않는다면 지금은 황제 숭배를 강요받는 세상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라도 언젠가 ‘존귀’와 ‘권능’의 삶 안으로 용감하게 들어갈 기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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