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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7: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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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53877 |
http://dabia.net/xe/1053877
설교보기 : https://youtu.be/KpWQuOJX5E4
성경본문 : 시편 97:1~12
의로운 자의 기쁨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22년 5월29일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인 시편 97편에서 우리는 하나님 신앙의 핵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키워드를 꼽는다면 ‘기쁨’입니다. 첫 구절인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마지막 절인 12절은 이렇습니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기뻐하라는 말로 시작해서 기뻐하라는 말로 끝나는 본문입니다. 중간에 나오는 8a절도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라고 했고, 11b절도 “...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삶 자체가 힘든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인생살이에는 짜증 나거나 울분이 솟구치는 일도 많습니다. 삶이 지루하거나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밤새 선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답답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기쁘게 사는 사람도 드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심리학책을 본다거나, 항우울제 정신과 치료를 통해서 기쁨의 삶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생각과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그것이 곧 ‘메타노이아’(회심)인데, 내면의 생수(요 4:14)와 같은 기쁨은 불가능합니다.
기분과 기쁨
우리가 언제 기뻐하는지 돌아보십시오. 각자 다르겠으나 크게 보면 재산이 늘거나 다른 이에게 인정받을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괜찮은 기분을 성경이 말하는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멋진 옷이나 명품 가방을 들고 친구들 모임에 나갔다고 합시다. 친구들이 여러분을 부러워합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우쭐해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분은 좋아질 겁니다. 그런 기분을 맹목적으로 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똑같이 멋진 차림으로 다른 모임에 나갔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여러분의 외모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멋지다는 말을 기대했다가 듣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처럼 매번 바뀌는 이런 기분을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주어지는 삶의 존재론적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이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이해하시겠어요? 동의가 되나요?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분을 따라다니지 않고 기쁨을 추구합니다. 자기 삶에서 기쁨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런 기쁨 충만한 삶이 곧 성령 충만한 삶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기쁨 충만, 성령 충만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이 뿌려주시는 기쁨의 빛이 반사됩니다. 그 사람 자체는 축소되고 기쁨의 빛만 환하게 나타납니다. 빛으로 충만한 사람!
기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삶의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의 내면세계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뚫어봐야 합니다. 비어있는 내면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게 동물과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예술적인 성취가 있어도,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고 율법이 있는 자나 율법이 없는 자 모두 모두 죄 가운데 놓여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병든 겁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세상살이가 몹시 어려운 사람만이 아니라 부족할 게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간다고 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영혼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중이니까요. 신앙생활도 그런 방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교회 안에서 살았는데도 성경이 말하는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아
본문 12절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걸 실감하기가 쉽지 않기는 합니다.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아야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기에 시 97편은 바로 그 여호와가 하시는 일에 관해서 앞 대목에서 설명했습니다. 2~4절에서는 여호와를 뇌우와 화산폭발 같은 압도적 자연현상에 빗대서 설명합니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번개가 한번 번쩍거리면서 세상을 비추니까 온 땅이 떤다고 했습니다. 5절은 산들도 밀랍처럼 녹아내린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시인은 자연현상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공평을, 즉 그의 심판을 막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지구에 지름 5km 혜성이 충돌하면 아무도 살아나지 못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시인의 이런 외침을 현실에서 뚫어보는 사람이 있고, 공연히 겁주는 말이라고 외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전자는 의인이고 후자는 악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화산폭발처럼, 그리고 번개처럼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세력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세력입니다. 자기들을 신적인 자리에 올리려는 세력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섬김을 받으려는 세력입니다. 그 세력이 여러분에게는 누구, 또는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이 파괴됩니까? 각자 다를 겁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업 실패일 수도 있고요. 정치적인 대립으로 힘들어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일일이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한 가지 실증적인 예를 든다면 부동산 문제입니다. 사실 부동산 문제가 따로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비열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일종의 황금만능주의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정말 막강한 세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막강해 보일 뿐이지 오늘 본문 7절이 말하듯이 ‘조각한 신상’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부동산 열풍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면 투기세력은 다 무너집니다. 이런 점에서 이 현실에서는 그걸 잘 통제하는 정치인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가 화산폭발처럼, 그리고 번개처럼 압도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악한 세력을 어떻게 제압하시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걸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일시적으로는 늘 악한 힘이 득세하는 듯이 보이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침묵하는 듯이 보이기에 여호와의 강한 능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긴 역사를 볼 정도도 우리가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개인의 인식과 경험은 너무 적고 좁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정말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악한 세력을 제압하셨는지를 증언하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시편 기자의 증언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사실 허상입니다. 사람이 조각한 신상입니다. ‘허무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온갖 제국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떵떵거리는 초국가 기업도 어딘가로 사라질 겁니다. 파괴적인 세력을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압도적인 힘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뇌우처럼, 번개처럼, 화산폭발처럼 강력한 힘으로 세상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말입니다.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존하고 지키시고 악인의 손에 건지신다는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제공해주신다는 말씀으로 듣지는 않았겠지요. 그런 생각은 신앙이 아니라 기복주의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살고 싶으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모릅니다. 모르면서 세상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까 우리도 덩달아 찾는 겁니다. 인생살이에서 많은 것을 손에 넣은 분도 있고, 전혀 손에 든 게 없는 분도 있고, 지금도 계속 찾는 분이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상위 10% 안에 드는 삶의 수준에 이르면 충분할까요? 이미 앞에서 그런 성취로는 누구도 기뻐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무조건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가 악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 포악한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방식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미리 계산할 필요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방 총독과 임금에게 끌려갔을 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마 10:19)라는 말씀이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라(마 6:25)라는 말씀이 이를 가리킵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한밤중에 숲길을 갑니다. 아이는 어떤 일을 만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처할 능력도 그 아이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자기를 지켜준다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숲길을 헤쳐나갈 능력이 없는 아버지라면 그런 믿음은 공허하거나 광신에 불과하겠지요. 그 아버지가 번개나 화산폭발처럼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분이라면 이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숲길에서 잠시 불안하기는 하겠으나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정말 분명하다면 역설적으로 그는 그 숲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제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다락방」 5월24일 날짜에는 미국 오리건주에 사는 마트 카터 씨의 글이 나옵니다. 부부가 오래 앓았습니다. 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에 부쳐서 분노와 좌절감에 떨어졌습니다. 그들 부부는 어느 날부터 ‘복의 목록’을 작성해서 냉장고에 붙였습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자기들 삶에서 일어난 좋은 것을 모두 적었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는 대신에 이미 가진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감사할 내용이 많았다.”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삶의 지혜와 태도는 배우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복된 일을 마치 보물찾기하듯이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복된 일들이 보통 때는 숨어 있어서 눈에 잘 뜨이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걱정거리만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나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비슷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순간이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감옥을 생각해보십시오. 은둔해서 산다는 점에서 감옥은 수도원과 비슷합니다. 감옥의 삶이 불행한 것만이 아닙니다. 거기서도 신세 한탄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황홀하게 숨을 쉴 수 있고, 물을 마실 수 있고, 의자와 식탁과 밥그릇을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떨어져도 하나님 경험은 가능합니다. 거꾸로 아무리 멋진 환경에서 살아도 하나님 경험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게 불행한 겁니다. 7절이 가리키듯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랑하던 것이 별 것 아니니까 수치 당하는 겁니다. 저는 무탈하게 노후를 지냈으면 하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지키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 어려운 형편에 떨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
이렇게 살아가는 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시 97:10)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갈망을 가리킵니다. 갈망하는 사람은 갈망의 대상을 배웁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구도적으로 배웁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호와가 누군지를 배웁니다. 여호와의 왕권에 사로잡힙니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지 않고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의 영혼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와 바울 사도는 똑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합 2:4, 롬 1:17)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은 여호와를 사랑함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는 다 잊어도 좋습니다. 다음 한 가지 사실만은 부디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사람이야말로 ‘의인’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했으니 그가 의인 아니고 도대체 누가 의인이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착한 일을 많이 하거나 세상에서 정의롭게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의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만한데도 겉으로만 겸손하게 삽니다. 위선입니다. 세상에서는 위선이라도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야말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나님 사랑하라고, 하나님을 갈망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의인이라고 말하기 곤란하신가요? 오히려 죄인이라고 느끼시지요? 루터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입니다. 여전히 죄에 둘러싸였으나 의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이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이야말로 의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이 된 여러분, 더 정확하게는 의인으로 인정받은 여러분, 이제 어떤 형편에서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 충만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살도록 우리는 허락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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