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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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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20절-21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20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한다. 그래서 빛으로 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다. 일반세상에서는 행동을 안 좋게 하면 악하다고 한다. 행동 활동으로 사람에게 악한 짓이 나와야 악하다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서 사람에게 해를 안 입히면 악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남을 도와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엇을 악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과는 안 먹고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이는 세상 물질성에 속한 것에 소원 목적을 두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니 이걸 악이라고 한다. 사람이 생명과를 안 먹으면 자동적으로 선악과를 먹게 된다. 그 중간은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악한 행동을 했고, 어떤 사람은 선한 행동을 했고,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 사람은 무죄인이냐? 이 사람도 악한 거다.
선악과를 먹은 데서 나온 타락된 지식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이 남에게 악한 일은 안 해도 이 사람 속에는 선악과를 먹은 물질적 이해타산이 들어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수단 방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정죄를 받게 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빛 앞에 나오면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를 않는다.
빛은 사람의 속을 드러내 준다. ‘선악과를 먹었느냐. 생명과를 먹었느냐?’ 하는 정신과 마음의 근원을 밝혀낸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인데, 예를 들면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세상 소원 목적 들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치가 자기의 그 속을 드러내기 때문에 말씀이치를 미워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진리 앞에서, 이치 앞에서 자꾸 도망을 가고, 안 오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언행심사가 하나님 앞에 바른 이치는 하나도 없고 움직이는 세상 것에 맞추려고 한다.
움직이는 것에 자기의 삶의 목적을 두는 것은 어두운 지식으로 사는 거다. 이건 하나님 앞에 악하다. 이런 사람은 남을 원망한다.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의 근원적 본질에서 이탈이 되면 집을 떠난 사람과 같아서 떠돌아다니게 된다. 안착이 안 된다. 이건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에 대처를 못 한다. 그러니 결국은 악을 행하게 된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 앞에 오면 자기가 자꾸 드러나니까 이 빛이 미워서 빛으로 오지 않는다. 자기가 행동적으로 악한 일을 안 했을지라도 빛이 자기가 가진 물질적 소원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이라고 자꾸 드러내니까 그게 싫은 거다. 특히 이룰구원은 초를 다투는 건데 목사이면서 이 면에 심각성을 느끼는 목회자가 별로 없다. 이는 이룰구원에서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게 아주 예리한 건데 이 면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감각적인 요소에 두고 믿기 때문이다.
이룰구원의 사상은 믿는 자기가 한 순간이라도 비진리적으로 연관을 가졌다면 그 부분은 전부가 죽은 거고, 죽여 놓은 건데 이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일부터 다 해 놓고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무딘 신앙양심을 가지고 교인들을 가르치게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은 막 죽어나간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영적인 활동이라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모든 순간순간을 세심히 살피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세계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참 많다. 그러니 행동적으로 청렴결백이나 부르짖고, 이방종교와 손을 잡는 거다. 인간 자기의 청렴결백은 신앙이 아닌데 이걸 자기의 신앙으로 보이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수법이다. 이방세상은 이런 사람을 착하고 진실하다고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귀신들린 자로 보신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라고 했는데 이들이 이 명령을 어기고 그만 선악과를 먹고 불순종을 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양심에 부끄러워서 나무그늘 속에 숨었다. 이게 오늘날 영이 죽고 저주 받은 타락된 사람들의 행위다. 하나님 앞에 안 오려고 하고, 세상 큰 회사나 큰 단체에 가서 숨으려고 한다.
이런 그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이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세상사람들의 수법이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 햇볕에 마르면 금방 부서진다. 이런 것으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못 가린다. 신앙양심의 수치, 인격의 수치를 뭘로 가리느냐? 물질로 가리느냐? 못 가린다. 죄를 지은 사람이 저 앞에서 순경이 오는 것을 보면 마음이 콩닥거리는 것은 자기의 양심이 자기의 죄를 증거하는 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눈에,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썩고 불타고 말라 없어지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가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심성, 즉 신앙양심을 볼 줄 알아야 사람을 바로 보는 거지 물질을 많이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사람을 바로 보는 눈이 아니다. 믿는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이 이렇게 무디고, 이런 이해타산을 가지면 안 된다. 아닌 말로 자기 집에 불이 붙으면 달아나는 수법을 써야지 방안에 있는 물질을 안고 같이 죽겠다고 하면 그게 사람이냐? 그런데 사람들이 가치판단에 혼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물질적인 소원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물질 이해타산 앞에서는 부모형제나 처와 자식도 버리게 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옳은 정신을 가진 거냐? 사람이라면 옳음을 좇아야지 자기 기분대로 살면 되느냐? 세상만사가 자기 기분대로 되는 거냐? 어쨌든 세상 것은 다 날아가는 것이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과 세상 것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사용 활용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지 않고 세상물질이 없으면 죽겠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다. 자기가 붙잡은 게 다 날아갈 때 그 물질과 같이 죽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 영원히 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물질을 따라가게 되면 진리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언젠가는 나를 떠나게 되고, 그 사람이 나를 떠나기 전에 내가 그 사람을 버리게 된다. 물질을 따라가는 나는 마찰과 충돌과 대립과 시험과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 이게 지옥살이다. 예수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세상 것을 주려고 오신 게 아닌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소원 목적을 구하고 있다면 이는 헛된 믿음이고, 하나님 앞에 선악과를 먹는 악한 사람이다.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자꾸 먹고 있으면 이 사람은 아무 짓을 안 해도 악한 사람이고, 그래서 하는 짓마다 악한 짓이 나오게 된다. 병 속에 참기름이 들어 있으면 한 방울만 흘려도 고소한 냄새가 나지만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게 들어 있으면 계속 나쁜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내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빛은 구별 분별케 하고, 생산이 되게 하고, 기쁘고 즐겁게 해 주고, 열매도 맺히게 한다. 모든 식물은 빛을 좋아해야 열매가 열린다. 빛이 꽃에 비취면 향기가 날려서 나비와 벌이 찾아오고, 이러면 열매가 맺고 생산이 된다. 인간은 다 빛을 좋아하는데, 그러나 빛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으니, 빛을 미워하면 어두움을 좋아하는 것이라서 이 사람은 어두운 생각, 어두운 일, 즉 사망권 안에 사는 것이고, 죽는 일만 하다가 결국은 멸망과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이 목적을 따라 만들었으니 믿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자기가 현재에서 생명이치의 말씀을 깨닫는 게 있고, 이 말씀을 따라 사는 열심에 불이 붙으면 희망이 있는 거지만 물질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 방법만 찾는다면 이 사람은 자기 살아생전에 빛을 못 찾고 어두운 채로 그냥 살게 된다.
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진리진실로 살려고 하는 자는, 즉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빛으로 온다. 이 사람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고 있는 건가?’ 라고 하면서 자기 믿음의 질을 알고자 빛으로 온다. 이런 사람은 좀 더 밝고, 좀 더 깊고, 좀 더 높고, 좀 더 곧고, 변질이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요, 말씀의 이치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요, 말씀 앞에서 자기를 늘 살피는 사람이다.
그런데 말세의 교인들은 ‘어느 교회에 가면 구경거리가 많을까? 어느 교회를 가면 나를 알아줄 자가 많을까? 어느 교회에 가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올까?’ 이런 것을 보고 교회를 찾아 나간다. 왜냐? 그래야 자기 발판을 닦아줄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목사 중에는 남의 설교거리를 찾는 목사가 있고, 또 자기를 볼 줄은 모른 채 ‘누가 이단이 아닌가?’ 하면서 이단을 찾아다니는 목사도 있다. 그러면 속속들이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알려고 찾아다니는 목사는 몇이나 될까? 일부러 이단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그 이단을 드러내서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건데, 이것을 이룰구원의 정신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를 심사해서 너부터 고쳐야 할 게 태산인데 왜 그 일은 안 하고 이단을 찾아다니느냐?’ 라고 하신다. 성경을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해도 자기 인생이 짧은데 이단을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거냐?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서 없어진 이단이 있느냐?
각 교회마다 목사님들이 진리이치의 말씀을 잘 캐내서 명확히 전하면 교인들은 이단과 거짓을 그냥 알게 된다. 거짓말을 알려고 거짓말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더냐? 그럼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신앙자들이 많다. 지기 속에 이단의 성질이 들어 있으면서 문자적 교리적인 이단을 말을 하면 뭐 하느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으니 먼저 자기 속의 이단성을 찾아서 고친 후에 이단을 찾든지 말든지 하라.
빛을 사모하는 중에 진리를 만난 사람은 자기가 살 길이 빛인 줄로 알고 이 빛을 놓지 않지만 오다가다 빛을 만난 사람은 자기의 계획이 따로 있어서 자기의 이 계획을 따라 살 길을 찾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우주만물의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의 구원목적에 따라 돌아가는 건데, 어떤 사람을 위해 돌리느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을 위해 돌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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