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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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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22절-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22절-24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물세례’란 물로 씻는다는 뜻이다. 죄를 씻는 의식이다. 고인 물로 몸을 씻으면 그 때가 도로 묻는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씻는다. 지도에 보면 요단강물은 흘러서 사해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요단강물에서 몸을 씻고 더럽고 죽은 것은 다 흘려내려 보내는 거다.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죄를 씻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물로 씻으면 깨끗해진다는 뜻도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물세례는 죄를 씻는 의식인데,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로 향한 자에게 주는 거다. 그 다음에 회개의 세례는 지난 날 죄를 지었던 거,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거,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살아온 모든 정신과 목적과 방향을 천국 쪽으로 바로 잡았다는 의미로서,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행하는 물세례는 죄를 씻고 하나님께 향한다는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는 거다.
그런데 교회 안을 보면 물세례의 의식은 받았지만 회개의 세례를 받지 못한 자가 많이 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는 나오지만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상의 소원 목적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은 의식의 물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회개의 세례가 안 된 거다. 그래서 오늘날 모양새는 세례를 받고 집사요 장로인데도 속이 안 바뀐 교인들이 많다.
세례요한은 살렘 근처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유대 안에서 세례를 주셨는데,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으로 멜기세댁의 거주지였고,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애논은 물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믿음의 풍성함이 연상이 된다.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보면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진리 쪽으로 가게 하는 세례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주신 세례는 진리로 오게 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에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자기가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죽을 지를 전혀 모르고 세례를 주고 있는 거다. 그런데 만일 어느 누가 세례요한에게 ‘너는 조금 있으면 죽는다’ 라고 가르쳐 준다면 세례요한이 어떻게 할까? 1. 세례 주던 일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갈까? 2. 염려 걱정 근심을 하느라고 밥도 안 먹는다? 3. 광야의 바위틈이나 굴 속에서 기도만 한다? 4. 자기 할 일을 끝까지 다 하고 간다? 어느 거냐? 4번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있으면 너를 죽인다’ 라고 한다면? 1. 세례요한처럼 하면 세례요한처럼 죽는다? 무슨 말이냐? 얼마 후에 세례요한이 헤롯의 잔칫날에 목이 잘려서 죽었다. 그러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간다? 2. 안 죽으려고 적당히 대충 하고 간다? 3.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고, 나는 나의 할 일만 하면 된다? 어느 거냐? 4번이다. 정답대로만 살면 된다.
세례요한이 조금 있으면 자기가 죽을 것인 줄을 모르고 세례를 주고 있는 건데, 만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조금 있으면 죽는다고 가르쳐 준다면 세례요한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까? 하던 일을 내버리고 도망을 갈까, ‘나의 할 일은 죽을 때까지 요당강가에서 세례를 주는 겁니다’ 라고 하면서 계속 세례를 줄까? 세례요한은 자기가 어떻게 죽던 죽을 때까지 백성들이 주님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을 한다.
표면적 역사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소개하고서 자기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지금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해서 그 사람이 주님을 알게 되었으면 주님을 찾는 게 정상적이다. 그런데 주님을 찾은 사람 중에는 신앙의 질을 보면 길이요 진리의 생명의 주님을 찾은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래서 예수를 소개하면서 이단이나 거짓을 소개하고, 그런 데로 빠지게 하면 안 된다. 교회 인도자들은 이런 면도 생각을 해야 한다.
25절: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2:6-7에 보면 정결의 예식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의 물이 들어가는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어서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이곳에서 손도 씻고, 발도 씻고, 얼굴도 씻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활의 결례이고, 세례요한은 죄를 씻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의식을 행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세례요한의 제자가 유대인과 결례에 대해 변론을 했다는 것은 세례요한이 행하는 물세례가 깨끗에 대한 것이라고 하니까 ‘그게 진짜 위로부터 받은 거냐? 그리고 아무나 세례를 줘도 되는 거냐?’ 라는 등등으로 변론을 했을 거다.
26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유대인들과 변론하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을 자들이 예수님께 더 많이 간다고 했다. 이 말을 계시가 없이 들으면 경쟁의식의 말로 듣기 쉽다.
세례요한의 운동은 예수님께 밀착시키는 운동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는 세례도 사람을 예수님께 밀착시키는 운동이다. 모두 예수님께로 100% 밀착시켜야 한다. 세례를 받은 사람도 다른 것에 붙으면 안 되고 하는 것마다 예수님께 밀착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운동도 예수님께로 밀착이 되어야 정상이요, 거짓 것에 밀착이 되면 심판이요 형벌이다.
교인이 어느 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옮길 수 있다. 교인들은 다 발이 달렸고 귀가 있기 때문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교회를 옮길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어느 교회에 가도 예수님께 밀착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종도 교인들을 예수님께로 밀착을 시켜야 한다. 교인이 스스로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할 때는 어쩔 도리가 없이 보내야 한다. 이상한 곳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발을 부러뜨린다든지 하면 할 수가 있는 거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자유를 막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자유는 대립이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그 사람이 한 대로 만들어지는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신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없는 거다. 교인이 어느 교회로 가던 그곳에서 예수님께로 밀착이 되면 문제가 안 되는 거다. 그런데 다른 교회로 못 가게 가로막고 여러 가지 술수를 쓰는 건 안 된다. 이건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교인을 잡는 것이니 억압과 강압이 되는 거고, 공갈 협박이 되는 거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거다.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예수님께로 많이 간다고 하니까 세례요한이 이 말을 듣고 ‘에이,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거냐?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건데 이게 뭐냐? 못 해 먹겠다’ 라고 했느냐? 그 소리를 듣고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라고 했다.
하늘의 것은 신령한 것이고, 땅의 것은 물질의 것이다. 신령한 것은 인간만 받는 거고, 물질의 것은 동식물도 받는다. 그러니까 인간이면서 신령한 것을 못 받으면 동식물과 같은 거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신령한 아버지의 본질의 것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의 것은 위로부터 온다. 위엣 것이 아니면 천국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인간은 그 어디서도 하늘의 것을 받지 못한다. 땅에서 나온 것은 땅의 것이지 하늘의 것이 아니다. 하늘의 것을 받아야 하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자랄 수 있다.
28절: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요한의 이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마음과 교훈이 하늘에서 주신 것인지, 땅에서 올라온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땅에서 올라온 마음이라면 인격적 소원적으로 세상을 등지고 천국을 향할 수 있느냐? 근본적으로 안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간다고 할 때 세례요한의 마음 속에서 시기질투가 올라온다면 그 마음이 하늘에서 준 거냐, 땅에서 올라온 거냐? 땅에서 올라온 거다. 하늘에서 주신 게 아니다.
본 절의 말씀은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순적히 만날 수 있는 길을 닦으려고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러 간다는 것은 더욱 기뻐할 일이라는 거다. 또한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에게 하늘이 주는 마음을 받아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구원에로 밀착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데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말이기도 하다.
교인들이 장차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께서 여러 말씀을 하실 텐데 이 때 예수님의 말을 듣고 ‘우리 목사님은 예수님만 높인 진짜 하늘의 종이었구나’ 라고 할 런지, 아니면 ‘가짜다’ 라고 할 런지? 이런 면에서 주님의 종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사명을 다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내보내서 전도를 하게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전도를 듣고 예수님께로 왔다. 이렇게 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전했기 때문이다. 만일 바로 안 전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지 않고 헤롯 쪽으로 가게 된다. 세상 쪽으로 가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전도자가 많은데, 이들이 진리본질을 전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있느냐, 아니면 돈 자랑, 물질 자랑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세상을 향하게 하고 있느냐? 교회의 목사님들은 세례요한은 아니지만 세례요한의 역할이 들어 있는 건데, 목사가 세상 것을 들어서 예수를 소개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세상 쪽으로 나가게 되고, 질적으로 바로 전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늘에서 받은 마음을 가지고 진리이치의 말씀 깨달음,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성품화 되는 것, 하나님의 진리본질에서 수종드는 것, 그 다음에 말씀으로 실력화 능력화 되어야 하는데, 이게 아닌 인간 타락성에서 나온 세상의 욕심을 따라 땅의 것을 위해 주님을 믿는다면 이것은 세상을 자기의 왕으로 삼은 거다. 땅의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이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자기의 왕으로 삼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을 인간 자기의 종으로 삼은 셈이 되는 거다.
목사가 세상 종교적 사역적 사업적인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서 준 게 아니라 타락성에서 온 거다. 인간 자기의 장기를 가지고 예배당에 사람을 채우려고 하는 것, 종교적 조직화로 존귀 영광 자리에 앉는 것, 종교적인 큰 업적을 이룬 것을 목회 성공했다고 하는 것 등등은 하늘의 일이 아닌 땅의 일이요, 사람을 하늘의 사람으로 적중으로 자라게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을 하는 거다. 하늘로부터 받은 교훈이 아니면 하늘의 신령한 것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게 안 나오고, 세상 죄를 씻고 하늘의 것을 받는 마음과 각오와 결심이 안 나오고, 옳은 게 안 나온다.
이사야 40:3-5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고 말라기 4;5에 보면 말라기 선지자가 세례요한의 일을 예언해 놨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들의 말도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보내심을 말씀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에 목사님들의 외침에 대해 세례요한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천사들이, 주님이 세례요한처럼 하늘로부터 받아서 한 것이라고 인정을 해 주시겠는지?
29절-30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주신 일을 했고, 이제 자기가 소개한 주님이 오셨으니 자신은 당연히 쇠하는 것이고, 주님이 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신랑은 신부를 가지게 되고 신부는 신랑을 얻게 되면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적 결합이 된다. 이것을 보는 신랑의 친구, 즉 세례요한은 시기 질투가 나는 게 아니라 크게 기뻐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종이 위로부터 받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성도가 주님과 인격적 결합이 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우리교회에 나오네. 안 나오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성도가 주님과 인격적 결합이 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한다. 이게 세례요한의 마음이다. 그런데 타락되고 속화된 인간은 선악과 먹은 옛사람 부패성적인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사망적인 길로 가게 한다. 이건 넓은 길, 사망 길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제 주님이 오셨으니 세례요한의 일 즉, 물세례, 회개의 세례는 점점 줄어들면서 하나님의 질적 본질을 받아서 이 본질로 점점 성장 확장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렇게 되지 않고 물세례, 회개의 세례가 점점 커지면 이 신앙은 잘못된 거다. 무슨 말이냐? 주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건 없이 맨날 죄를 지어놓고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를 하며 물세례를 또 받고, 또 다시 죄를 지어놓고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를 한다면 이게 바로 된 거냐?
세례를 한 번 받았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곧장 올라가야 한다. 이게 이 사람에게서 주님이 흥하는 거다. 주님은 이걸 기뻐하신다. 세례요한도 이걸 기뻐한다. 목사의 입장에서 어느 교인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내가 참 세례를 잘 주었다’ 이런 말이 나와야지 ‘세례를 줬더니 교회는 안 나오고 엄한 곳에 가서 죄 짓는 일만 하는구나’ 라는 말이 나온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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