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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여 오소서!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3 추천 수 0 2022.12.12 21: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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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6:12-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5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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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asJHk9N7kuw 

성경본문 : 요한복음 16:12~15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2022년 6월12일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이자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아버지, 아들, 영의 일체로 보는 개념입니다. 낱말 뜻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그것의 실질적인 깊이를 이해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우리와 똑같이 믿는 유대교인들은 삼위일체 개념을 거부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질이라면 결국 자신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입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 모독죄로 징계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오해를 넘어서려면 삼위일체 개념을 일단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시는 영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나오지는 않고, 간접적인 설명만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6:12~15절입니다. 우선 요 16: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τ? Πνε?μα τ?? ?ληθε?α?’의 번역입니다. 이 헬라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은 진리를 알리고 밝히고 전달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 부활의 영, 창조의 영, 양자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립니다. 성경 전반으로 볼 때 성령은 토네이도나 화산폭발처럼 우리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생명’의 강력한 힘을 가리킵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을 가리키는 듯하나 반드시 그것에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도 성령은 활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도 근본에서는 성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구약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일도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성령에 의해서 시작했으며 지금도 늘 성령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입니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그런 경험을 했을지 모릅니다. 도저히 헤쳐나가기 어려웠던 상황을 버텨낸 데에는 어떤 힘이 함께했기 때문이라는 경험 말입니다. 진리의 영이 ‘오신다.’라는 표현에서 중요한 점은 그 영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게 아니라 우리 밖에서(extra nos)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반복해서 ‘veni sancte spiritus’라는 기도문을 암송하고 찬양 노랫말로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타종교, 대표적으로 불교와 다른 점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불성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걸 깨달으면 윤회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즉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세상살이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까지 가능합니다. 부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모두가 돼지로 보인다는 어느 고승의 말이 유명하지 않습니까. 심리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실용적입니다. 유명 승려들이 진행하는 집단상담이 크게 인기를 끄는 이유가 사람 마음을 정확하면서도 실용적으로 분석하고, 처방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심리치료(psychotherapy)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런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과적인 문제로 당장 일상생활이 어려운 분들입니다. 이런 심리치료가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 과도한 현상을 보입니다. 예컨대 고전음악이나 교회 활동도 여흥을 끌어들여야만 사람들의 대중적인 주목을 받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개인과 사회가 실제로 치유될까요? 제가 보기에 그런 접근은 대증요법입니다. 당장 급할 때는 그런 대증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대증요법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을 붙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령이 오기를 기도하고 노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의 방향성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그 죄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 편히 먹는다고 해서 정말 마음이 편해지던가요? 마음을 비운다고 다짐한다 해서 마음이 비워지던가요? 비워진 마음에 다른 악한 영이 들어갈 겁니다.

 

영의 인도하심

 

본문은 진리의 영인 성령의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라고 했습니다. KJV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he will guide you into all truth.” 성령은 일종의 ‘가이드’입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영입니다. 이는 곧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우리는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인식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쁠지 모릅니다. 이렇게 반론을 펼치겠지요. 사람에게는 뛰어난 인식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인류가 이런 방식으로 문명을 발전시킨 거 아니고 말입니다. 다른 건 제쳐두고, 오늘날의 과학 발전을 생각하면 인간의 인식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현대인은 정말 아는 게 많습니다. 제 생각에 그런 모든 지식은 정보일 뿐입니다. 정보가 진리 자체는 아닙니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율법사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율법 조문을 잘 알았습니다.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근본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전문적인 율법 지식은 예수를 알아보는 데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을 많이 아는 이들이 자연을 실제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법 조문을 많이 아는 법조인들이 법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결국 기후 변화를 몰고 왔으며, 법 지식은 종종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마치 사람을 위해서 법이 있는 게 아니라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듯합니다. 정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진리를 아는 게 전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무엇이 진리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무엇이 참되게 옳은 겁니까?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할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에게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여러분은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셨나요? 비슷한 이야기가 요 8장에도 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 뒤로 논쟁이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 자유 운운하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8:45) 요한복음이 전하는 이런 일련의 말씀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궁극적인 능력입니다. 우리가 언제 자유롭게 되나요? 자유는 생명을 얻는 데서 주어집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던 사람이 구명 튜브를 붙들고 목숨을 건졌다면 그는 죽음의 물길인 홍수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으니 예수야말로 진리이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근원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실감하기 어려우신가요?

 

알레테이아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탈’이라는 접두사 ‘아’와 망각이라는 뜻의 ‘레테이아’의 합성어로서 탈(脫)망각, 또는 탈은폐라고 합니다. 은폐된 세계가 밖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곧 진리입니다. 물리학도 그 은폐된 세계를 드러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우리의 개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세상이 제시하는 모범 답안을 거의 기계적으로 따라갑니다. 이게 행복한 거야, 저게 행복한 거야, 하면서, 또는 인생이란 원래 그렇다는 말 뒤에 숨거나 그저 무탈하게 살거나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조금 좋은 조건으로 산 것만으로 행복했다고, 또는 만족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를 속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진리의 영인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알게 한다는 겁니다.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실체를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진리의 영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인도한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의 영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라고 생각할 겁니다. 돈이 우리의 삶을, 요즘 젊은이들의 어투를 따르면, 얼마나 ‘간지나게’ 하는지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압니다. 거꾸로 돈이 없을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언론이 선정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세상에서 얻어들은 경험에 고착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하는 태도이고, 진리의 영인 성령을 거절하는 태도입니다. 비유적으로, 놀음판에서만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읽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영에 기민한 사람이 어떻게 진리의 영에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계시는가요? 그래서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기도를 오늘도 절박한 심정으로 드리시나요? 삶이 그저 맹숭맹숭한가요? 아니면 무언가에 쫓기고 있나요? 대답하기가 간단치 않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무작정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기도를 무한 반복해서 드리면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깨닫게 하는 이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리의 영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14절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오늘 본문에는 ‘알린다.’라는 표현이 다른 형태로 반복됩니다. 이를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이드’한다. 말한다. 선포한다. 영광을 돌린다. 알린다. 성령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것’(14절)을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예수의 것은 곧 ‘아버지께 있는 것’(15절)입니다. 이런 표현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표현은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아파트나 땅을 유산으로 받는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운명에서 하나님의 실체가 온전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이를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호모우시우’(동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분이십니다. ‘호모우시오스’는 삼위일체 개념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서 단순히 들은 자가 아니라 본 자이기에 예수를 본 사람들은 곧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의 물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는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거꾸로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인식과 경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지 영혼의 울림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니, 즉 생명 충만을 통한 자유를 느끼지 못하니까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형식적인 관계만 맺은 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향으로만 줄달음치듯이 살아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분들에게는 제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냇물을 목말라하는 사슴처럼 영혼의 해갈을 갈망하는 분들에게 ‘우리 함께 그 길을 가보자.’라는 뜻으로 이미 앞에서 나온 말씀을 다시 짚어드리겠습니다.

 

성령 경험의 일상성

 

‘진리의 영이 오신다.’라는 표현을 기억해두십시오. 의기투합할 수 있는 친구가 온다고 해도 약간 즐거운데, 진리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다니, 얼마나 설레는 말씀입니까? 이런 거룩한 설렘이 없이 어떻게 이 팍팍한 현실의 삶을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어떤 궁극적인 세계는 우리가 노력해서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연인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자기가 상대방을 찾은 게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에게 왔다는 경험입니다. 엄마들도 자기가 아이를 낳은 게 아니라 아이가 자기에게 왔다고 느낍니다. 시인들도 그렇게 말하고, 예술가도 다 그렇게 말합니다.

 

진리의 영이 오신다는 말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인 하나님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복, 심화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진리는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집이나 자동차가 아닙니다. 우리 이름으로 등기를 마치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거래 방식으로만 세상을 경험하기에 하나님 경험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성령이 오시기를 진심으로 바라십니까? 관심이 없으신가요? 이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늘려야 한다는 강박에 떨어진 사람은 그런 기도를 드릴 수가 없을 겁니다. 세상 사람은 어쩔 수 없으나,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산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구체적인 삶을 외면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더 성실하게, 전력투구하듯이 살아갑니다. 더 투쟁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유하고, 더 사랑합니다.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 더 관용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일에 더 철저합니다. 그 모든 치열한 삶의 능력이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순전한 마음으로 ‘베니 상태 스피리투스!’라는 기도를 화두처럼 입에 달고 삽니다. 지금까지 어땠는지 모르나 이제부터라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일단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기도를 시작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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