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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세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0 추천 수 0 2022.12.12 21: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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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호11: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56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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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tXtDZh_l17I 

성경본문 : 호세아 11:1~11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2022년 7월31일

 

호세아 선지자는 기원전 8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부터 2천7백 년 전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호세아는 문서 선지자 중에서 유일한 북이스라엘 출신이라고 합니다. 말이 2천7백 년이지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조선보다 훨씬 이전 시대니까요. 그렇게 오래전에 선포된 말씀인데도 오늘 살아있는 선지자의 설교처럼 생생하게 들립니다. 그런 생생한 경험이 무엇인지를 오늘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바알 숭배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짚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2절 말씀이 그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북이스라엘은 핵심 도시 두 군데인 사마리아와 벧엘에 하나님께 제사를 바칠 수 있는 성소를 만들었습니다. 남북 분단 이후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선지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고급 성직자들은 가나안 토착종교의 신인 바알에게 제사했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거부하고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했습니다.

 

호세아가 볼 때 이들의 바알 숭배 행태는 애굽의 삶으로 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1절)이라고 했는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애굽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애굽은 그럴만한 메리트가 있는 제국이었습니다. 피라미드만 보더라도 애굽의 국력과 기술과 문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나일강 유역의 고센이라는 비옥한 지역에서 목축에 종사하면서 나름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소수민족으로서 불이익은 받았겠지만, 일방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출애굽기의 보도는 과장입니다. 애굽도 그렇고, 바빌로니아나 로마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정도 규모와 체제를 갖춘 제국은 소수민족을 무조건 내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제국이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국, 러시아, 미국에도 소수인종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의 체제를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서로 어울려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대로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먹을거리와 마실 물이 떨어지자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돌아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때는 모세가 레위 자손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 3천 명을 죽이게 했습니다.(출 32:28) 일종의 내전 같은 상황입니다. 모세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 겁니다. 그래도 출애굽을 감행한 이유는,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인용하신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는(신 8:3)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만 생각했다면 그들은 애굽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선택은 일종의 출가 수도승의 길이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었던 셈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당시 선진국인 애굽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태양신을 섬기고 바로를 신의 아들로 여기는 애굽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살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바칠 수 있느냐, 하는 종교 형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애굽이라는 제국 안에서 전방위적으로 작동하는 통치 메커니즘을 그들은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막장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거스르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간 유목민으로 살면서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충분한 수련을 마쳤습니다. 율법 종교의 기초를 다진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사탄에게 시험을 치른 과정과 비슷합니다.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정착한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의 풍요와 다산 신앙에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습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계속 살았다면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더 나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광야에서의 삶과 가나안에서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광야에서는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풍부한 농산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부가 쌓이니까 문화도 발전합니다. 추수가 끝난 뒤에 멋진 축제를 엽니다. 가나안 젊은 여자들은 미모가 뛰어났고 남자들도 건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성적인 매력이 넘쳤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문명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알 숭배의 위험성을 이미 알았던 선지자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고, 거래하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게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호세아의 마음이 전달될 겁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모세를 중심으로 한 고대 이스라엘은 출애굽만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여 ‘백척간두진일보’의 심정으로 애굽을 떠났으나 결과는 다시 애굽 정신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통탄할만한 결과가 벌어졌습니다. 아들을 조폭 집단에서 빠져나오게 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들은 다른 조폭 집단에 들어간 거와 같습니다.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5~6절에서 호세아는 앗수르 사람들의 ‘칼’을 언급합니다. 당대 제국이었던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성읍을 치고 빗장을 깨뜨릴 것입니다. 호세아의 활동이 끝날 즈음에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이것으로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장입니다.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흘렀습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했던 호세아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간혹 세상이 이렇게 비루하고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무기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긴 합니다. 세상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심정이 들곤 합니다. 사람들은 이럴 때 ‘나도 모르겠다.’라거나 ‘될 대로 되라.’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나쁜 상황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호세아 당시에도 그의 설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

 

절망적인 상황에서 호세아는 전혀 다른 관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선지자의 음성이 8절에서 울려 퍼집니다. 호세아의 심정으로 들어보십시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에브라임은 열두 지파의 한 지파를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파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자연재해로 몰락한 도시로 보입니다. 호세아는 자기 조국 북이스라엘의 파국을 내다보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살아날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호세아는 9절에서 절규하듯이 외침을 이어갑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내려야 할 ‘맹렬한 진노’를 내리지 않고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과 달리 ‘거룩한 이’라는 데에 있다고 말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타지는 않으나 불이 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천사들의 합창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좋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응징하고 심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정의는 바로 악을 응징하는 겁니다. 호세아가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소위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를 첫째 아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그렇다 치고,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 이유는 둘째가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어도 긍휼을 포기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착한지 아닌지, 회개했는지 아닌지를 초월합니다. 악한 이들에게도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듯이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악을 초월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긍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호세아는 그 사실을 전하려고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파멸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이 긍휼하시기에 그들을 지키신다고 외쳤습니다.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는 표현은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정말 불쌍해 죽겠어.’라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똑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진노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듯이 들리긴 합니다. 그런 표현을 신학자들은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라거나 의인화(擬人化)라고도 합니다. 호세아는 다른 표현 방법이 없어서 인간적인 감정으로 하나님을 묘사했으나 정작 말하려는 핵심은, 그분만이 거룩한 분이라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과 달리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바알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하는 북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고, 즉 하나님이 불쌍하게 여기는 길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긍휼하신 분으로 알고 경험하는 게 최고 수준의 믿음입니다.

 

두 가지 관점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끄럽게 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 순서에 사죄 기도가 있습니다. 그 순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삶을 견뎌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게 없이 바알에게 제사를 바치고 우상 앞에서 분향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인정할 겁니다. 우리가 늘 뻔뻔하고 부도덕하게 행동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삶이 상대적으로 괜찮다는 생각 자체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게 사는지는 우리 자신이 압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저도 하나님이 저를 불쌍하게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은퇴할 때까지 설교자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의 삶이 생명 충만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삶이 감사하고 기쁘고 자유하고 즐겁습니다. 만족스럽습니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순간마다 노래하고 춤추고 싶을 지경입니다. 어떤 분은 현재 삶의 조건이 실제로 괜찮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망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그 백성들의 삶도 파괴됩니다. 패전이나 죽음이라는 상황에서도 생명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긍휼을 보증합니다. 그걸 실제로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저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삶의 중심을 점점 더 소소한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누구나 보고 놀랄만한 큰일이 아니라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일에서 삶의 신비를, 즉 행복을 누리는 겁니다. 그 작은 일을 경험하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 거의 공짜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을 가장 즐겁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문 여닫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방문을 여닫는 일은 신비롭습니다. 손으로 손잡이를 잡을 때 특별한 느낌이 전달됩니다. 문을 잡아당기거나 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을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겁니다. 동양 가르침으로 말하면 문 여닫기도 도(道)입니다. 만약에 저에게 손이 없다면 발로, 눈이 없다면 순전히 촉감으로만 그 일을 해야겠지요. 제가 여전히 손을 쓰고, 발로 걷고, 눈으로 보며, 방향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제가 장애인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는 마십시오.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생명 충만감 외에 우리가 더 욕심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닌가요?

 

설교 앞 대목에서 호세아가 본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은 풍요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바알 숭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알 숭배 역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자기 성취와 자랑거리에 매몰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긍휼을 모르니까 자기 성취에 매달리고, 자기 성취에 매달리면 긍휼에서 멀어집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이방인들의 염려에 떨어지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천착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관한, 즉 그가 우리를 얼마나 불쌍하게 여기시는지에 관한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자기연민과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세상 이치에 길들어서 ‘믿음’이 무언지를 모르는 겁니다. 거칠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속는 셈 치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실제로 믿어보십시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거룩하심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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