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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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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35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버지께서 왜 만물을 아들의 손에 다 주었느냐?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면 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부(富)가 있지만 미움을 받으면 부가 없다. 그러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 아들이 어떤 아들이냐?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아버지처럼 들어 있다. 이런 게 없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겠느냐? 즉 당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이 아들에게 어떻게 만물을 다 주시겠느냐?
그러면 아들에게 왜 만물을 주시는 거냐? 우리의 구원운동에 쓰라고 주신 거다. 이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어떻게 쓰더라도 그 씀씀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심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아들에 아버지에게 ‘이거 어디에 쓸까요?’ 하고 물어봐서 아버지가 쓰라고 하는 대로 쓴다는 게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아버지의 지혜지식을, 아버지의 도덕성을, 아버지의 능력성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이 어떻게 써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시게 된다. 구원 얻을 백성이 아무리 많아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의 구원을 위해 쓰심이 된다.
우리는 신앙 믿음의 이치가 옳아야 하겠는데, 설교를 할 때 어느 성경본문을 놓고 제목설교를 하게 되면 그 제목에 관계가 되는 것만 강조를 하게 되어서 그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다른 말씀은 무시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사람이 똑같은 구절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각각의 깨달음을 주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보실 때 ‘너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구나. 너에게는 지식이 필요하구나’ 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 맞게 깨달음을 주신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어느 성경이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면으로 주신 거다.
그런가 하면 설교를 하는 분은 어느 면을 깨닫기를 바라고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면으로 깨닫고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도 있다. 또는 우리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나는 우리교회 교인들이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데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이 와서 듣고 은혜를 받는 일도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어지는 거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방편이 다양한 건데, 분명히 할 것은 어떤 말씀을 전해도 진리본질을 어그러뜨리지 말아야지 본질이 아닌 부분적인 것을 기준으로 세워놓으면 이상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두고 시대마다, 지방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각각 역사를 하시는 것이니 믿는 우리는 그 속에서 자기의 변할 수 없는 구원거리를 찾는 거다. 이게 아닌 어떤 표면적인 것을 가지고 와서 이걸 기준으로 세워놓으면 하나님의 본질에서 멀어진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만물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운동에 쓰라는 것이니 당신의 원대로 쓰실수록 너와 나와 우리의 구원이 된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신다’ 라고 하는 말과, ‘당신이 어떻게 쓰시던 그 쓰심이 전부는 우리의 구원으로 들어간다’ 라는 말은 목적은 똑같지만 ‘어디에 무게를 두고 하는 말이냐?’ 하는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앞의 말은 말 그대로 주님은 만물을 우리의 구원에 쓰신다는 거고, 뒤의 말은 주님은 그 속성이 잡히는 것마다, 보는 것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는 분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뒤의 말은 주님의 속성 자체를 말하는 거다.
그러면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분인데 왜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냐? 누구 들으라고? 믿는 우리로 들으라는 거다. 우리는 다 아들이니 믿는 나도 예수님처럼 아들 안에 들어 있는 거다. 그리고 ‘아버지, 아들’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존재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인지, 어떤 일을 두고 하는 말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심성을 말을 하기 위해 이 사람이 하는 일을 말을 할 때가 있는데 듣는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심성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일을 잘하고 못하는 쪽으로 받아들이는 게 있듯이 성경을 볼 때도 사람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활동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인본주의 신앙으로 나가게 된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나 그 무엇을 잡고 말을 하더라도 사람이 구원이 되는 쪽의 말인데 여기에서 벗어나는 해석은 잘못된 거다. 이러면 그만 인본주의로 돌아가게 되고 자꾸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게 된다. 예를 들면 성경에 성전에 모이라고 하는 말씀을 들고 예배당을 성전 시 해서 예배는 반드시 성전에 모여서 드려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전은 인간의 설계가 아닌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어졌고, 이 안에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나와야 바로 되는 건데, 이 교훈은 없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알게 되면 그 교회는 인본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인본주의 신앙은 선악과를 먹은 지식에서 나오는 거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비유나 비사나 형상이나 존재를 가지고 와서 말을 해도 하나님의 온전에 맞아야 한다.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맞아야 하고, 지혜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맞아야 하고, 선 사랑 거룩 진실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공의가 된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기도라야 인격적 성품적으로 성령님에 감화된 기도가 된다. 우리가 이런 자로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이는 마치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하는 식이 되어버린다.
아들이 무엇을 붙잡고 쓰면 쓸수록 우리의 구원이다. 바다에 풍랑을 일으켜도 우리의 구원이 되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도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렇다면 아들 된 우리도 매사를 구원목적으로 하야 하는데 이게 아닌 세상에 목적을 두고 물질을 쓰고 축적을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가겠느냐? 아들 된 자가 물질을 축적하면 복음의 일이 커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아들이 이방 세상사람들처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 분을 믿는 우리는 기도도 그렇고, 자기의 소원성도 그렇고 물질에 두면 안 된다. 이런 정신으로 세상을 살면 어디를 가던 사단 마귀가 들락날락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게 사단 마귀에게 노출이 된 상태다.
아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던지셨듯이 우리도 자기의 전 삶을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산다면 이 사람은 순생애로 사는 거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와서 죽었을 때 순교가 되는 거지 순생애로 살지 않던 사람이 어찌 어찌 하다가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니다.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던지셨으니 이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모든 만물을 나의 구원을 위해 다 사용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살리시고 먼저 죽으셨고, 또한 먼저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죽지 않는 부활의 참 생명을 주셨는데, 이 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세상의 것을 구하면 되겠느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이 목이 마르다고 하자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마시지 않았다. 다윗이 이 물을 마시지 않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다윗이 이 물을 받아서 벌컥 벌컥 마셨다면 그 신앙의 심성이 어떤 거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자원적 자유로 오셨다. ‘네가 가라’ 하니까 ‘내가 꼭 가야 합니까?’ 라고 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다. 이 땅에 와서 살으심도 억지가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원적 자유로 사셨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신앙도 ‘당신의 종이오니 당신의 말씀대로 되어지이다’ 라고 자원적 자유로 받아들였다. 이래서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었느냐? 거지가 되었느냐? 지금도 그 이름이 드러난다. 우리도 자타의 구원이라면 자원적 자유로 나간다면 이 사람은 크게 될 인물이다.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원적 자유요, 당신이 부활하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원적 자유요, 하늘로 승천하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원적 자유다. 그러니까 누가 ‘하라. 마라’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당신의 참 자유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대로 하시는구나. 당신의 몸까지도 죽음에 내어주신 분이니 만물을 당신의 원대로 부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만 그렇다는 거냐, 우리에게도 그런 맛이라도 보게 해 주려고 지금도 역사를 하시는 거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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