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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일서 4:11~21
우리말 ‘사랑’에도 다양한 느낌을 들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비, 자애, 긍휼, 박애 등 사랑을 묘사하는 단어이지만 저마다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히브리어도 그렇습니다. 헤세드(hesed)는 인자와 자비로 이해하는 사랑, 아하브(ahav)는 온전한 사랑입니다. 자궁을 뜻하는 라훔(lahum)은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사랑을 여러 단어로 이해하였습니다. 에피투미아(Epithumia)는 육체적 탐욕, 에로스(Eros)는 감성적 사랑, 스톨게(Storge)는 가족애를 뜻하고, 필레오(Phileo)는 우정이나 동료애 등 감정과 인격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아무것도 바라는 것없는 무조건의 사랑인데 우리는 이런 사랑을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세속의 사랑에는 조건을 붙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매력이 있고 예뻐서 사랑하거나, 돈이 많거나 능력이 있어서 사랑합니다. 안정된 직장과 좋은 자동차와 훌륭한 저택에 사는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됩니다. 특히 돈벌이가 탁월하면 사랑의 대상이 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나는 그런 사랑을 ‘그래서’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에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걸기도 합니다. 이번 시험에 전교 1등을 하면, 또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면 사랑하겠다는 식입니다. 나는 이것을 ‘만일’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보상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지를 묻고 싶습니다.
사랑받을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사랑받을 조건도, 자격도,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아무런 이유와 조건이 없는 자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그런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고 마침내 실천하셨습니다. 성탄절이란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의 계획이 구체화 된 날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우리말에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고기를 잘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본능이기도 하지만 경험에 의하여 고결해지고 섬세해집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의 방법이 서툴거나 제대로 사랑할 줄 모릅니다.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영원을 부정하고 절대자를 비웃는 패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진리와 평강을 변함없이 추구하며 빛으로 살고자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사랑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위대한 사랑이 구체화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여전히 흑암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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