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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요한복음 궁극이............... 조회 수 81 추천 수 0 2023.01.01 10: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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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1-1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41-1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누가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게 세례요한보다 많다는 말을 했느냐?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바리새교인들이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을 들으셨다.

 

바리새교인들이 어떤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인 말인데 부정적인 뜻으로 말을 하는 게 있고, 표면적으로는 부정적인 말인데 긍정적인 뜻으로 말을 하는 게 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말하는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을 해야지 표면만 보고 판단을 하면 시험에 들게 된다.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바리새교인들이 어떤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하는 말투를 보면 세례요한으로 시기 질투가 나게 해서 세례운동을 방해하려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세례를 주던, 세례요한이 주던 목적은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것인데 누가 세례를 주던 무슨 상관이냐? 그럼에도 바리새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찔리는 자기의 양심을 숨기고 시험을 거는 거다. 악한 자들이다.

 

3:22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을 했는데, 유대인의 말인즉 집에 들어가면서 손발을 씻으면 되었지 왜 꼭 요한의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 라고 하면서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에 대해 시비를 걸어왔는데, 세례요한의 물세례와 유대인들의 결례가 같은 거냐?

 

집에서 머리를 감는 것과, 교회에서 회중 앞에서 약식으로 물세례를 받는 게 같은 거냐? 믿는 사람이 아침마다 머리를 씻을 때 내 머리를 하나님 앞에 깨끗케 씻어주십시오라고 하느냐? 하나님 앞에 손을 씻는 것과,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게 같은 거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과,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같으냐? 물세례는 한 번만 받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발을 씻기라라고 했으니 이건 여러 번 씻는다는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반성이 같으냐?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자기의 생각과 소원과 목적을 여기에 맞추는 거고, 반성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양심적으로 느끼고 다시는 안 그래야지하는 정도다.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예수님께서 왜 유대를 떠나신 거냐? 누구를 위해 떠나신 거냐? 당신을 위해서냐, 세례요한을 위해서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위해서냐? 말 많은 바리새교인들이 하도 물고 늘어지니까 안 싸우려고 유대로 가버린 거냐? 주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3:24에 보면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떠난 게 아니라 세례요한이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대로 세례운동을 계속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떠나신 거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서 죽기 전에 그가 할 일을 다 하고 갈 수 있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순교 전까지 할 일을 다 마치고 갈 수 있게 해 주시는구나.

 

계시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요, 부활 승천하여 가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요, 이 땅에 계실 때 어느 지방에서 무슨 일을 하시다가 버려두고 가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요, 어느 곳을 향해 가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인간생각으로 풀 수 있다. 성경을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차원으로 보게 되면 그 속에 숨겨진 뜻은 안 나오기 때문에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된다.

 

교회에서 어느 성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본질의 천국복음의 일을 잘 하고 있는데 교회 인도자가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이 구원의 일거리를 뺏으면 안 된다. 물론 잘못하면 뺏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는 거지만 잘 하고 있는 성도의 이룰구원의 일을 무시하고 빼앗으면 안 된다. 바로 잘 하고 있으면 계속 하게 해야 하고, 그래야 상이 되고 기쁨이 된다.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데, 가시면서 이 성경을 보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의 한 장면을 보여주신다.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를 다들 비켜 다니는데, 그 이유는 앗수르 군대가 이곳을 점령해서 이곳의 남자들을 잡아가고, 다른 곳에서 잡아온 남자들을 이 사마리아에 풀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자들과 이방남자들 사이에서 혼혈의 자식들이 나오게 되었다. 신앙적으로 말을 하면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세상이 섞인 이질적인 신앙이 되었다. 반면에 남조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후에 그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북조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을 해서 사마리아 길로는 다니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하시며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은, 1. 통행할 길이 이 길밖에 없어서? 2. 갈릴리로 가는 게 사마리아 길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3.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가까이에 있는 사마리아의 우물물을 얻어먹으려고? 4. 사마리아 여자의 남편 여섯을 떼어놓으려고? 5. 점심때가 되어서 사마리아 여자를 따라가서 점심을 얻어먹으려고? 6. 죄 많은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시키려고? 어느 거냐? 6번이다. 구원목적으로 가시는 거다. 구원목적으로 가시는 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가신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은 유대인들의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을 뚫어버려야 하겠다는 거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기존적으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뚫어버려야 하겠다는 거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욕을 먹더라도, 배를 곯더라도 뚫어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행하시다가 배가 고파서 기진맥진해서 우물가에 주저앉게 되었을지라도 잘못된 생각을 뚫어버려야겠다는 거다.

 

오늘날도 신앙 면에 진리본질로 가지 못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담이 쳐져 있는 게 많이 있다. 우리는 이걸 뚫어야 한다. 진리말씀을 받게 되면 오늘날 기독교가 물질개념의 설교가 많음을 알게 된다. 이런 설교는 진리신앙과는 보이지 않는 담이 쳐져 있는 것이니 우리는 배가 고프더라도,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못 살더라도 목숨을 걸고 이걸 뚫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정신이라야 이걸 뚫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정신밖에 없다. 오늘날 교인들 90% 이상이 한 마디로 선악과 따먹은 물질적 개념의 신앙이다. 우리는 이걸 뚫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 사상을 깨내는 말씀이라야 이것을 뚫을 수 있다.

 

5-6: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안에 수가라는 마을이 있고, 그리고 야곱의 우물이 있다. 옛날에는 어느 동리든 우물이 있었다. 깊은 바위틈에서 나는 우물도 있고, 비가 오면 물이 차고 가물면 물이 줄어드는 건수가 나오는 우물도 있다. 그리고 우물마다 물맛이 다르다.

 

구약 때 야곱이 세겜 동리 앞에 장막을 쳤는데, 장막을 친 밭을 추장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은 일백 개로 샀다. 400년이 지나서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요셉의 유골을 메고 나와서 여기에 묻었고, 또 이곳이 요셉의 자손들의 기업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하셨고, 아브라함이 여기에서 단을 쌓기도 했다.

 

신약의 사마리아 수가성이 구약의 세겜 땅으로 여겨지는데, 이곳에 야곱이 준 우물이 있어서 야곱과 그 아들들과 짐승들이 이 물을 먹었고, 그 후손들도 짐승들도 이 물을 먹었다. 목이 마르면 퍼서 먹었고, 때를 따라 늘 길어다 먹었다. 짐승들도 우물물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육적인 정신으로 말씀을 먹는 것을 말한다. 이 우물은 육신의 목이 갈할 때 먹을 수 있지만 진리 생명수는 육신적 물질 축복적 신앙사상으로는 먹지 못한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본 절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의 말에서 귀한 우물을 후손들에게 넘겨준 야곱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자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때가 제 육시쯤, 즉 정오에 행로에 지쳐서 이 야곱의 우물 곁에 주저앉았다. 제자들도 같이 가는 길인데 예수님께서 왜 지쳤을까?

 

같이 길을 걸을 때 서로 대화를 하면 지루하지도 않고, 먼 길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 다 왔는지도 모르게 목적지에 도착을 한다. 그러나 대화가 없으면 금방 지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길을 걸으면서 왜 성경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지 않았을까? 우리교회는 11시 예배시작 2-30분 전에 미리 와서 성경에 대해 대화를 하며 새김질을 하는데, 이걸 하다 보면 금방 예배시간이 된다. 그런데 이게 없이 예배 30분 전에 예배당에 와서 11시까지 기다리려면 지루하다.

 

소와 말이 같이 밭을 갈 수 있느냐?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와 이방인은 소원 목적 정신 사상이 다른데 대화가 되느냐? 믿는 내가 안 믿는 친구와 대화를 하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 돈 버는 얘기, 시집장가 가는 얘기, 취직자리 얘기 등 전부는 세상에 속한 거다. 하나님의 자녀와 이방인, 즉 빛 된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는 대화가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들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에게 이용물이 될 수 있다.

 

이들과 대화를 할수록 이들의 정신에 감염이 되고, 결국은 이방인이 자기를 포로로 삼아서 끌고 가게 되고, 자기는 좋아서 따라가게 된다. 이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안 믿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어쨌든 정복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를 믿게 하면 같이 있어도 대화를 해도 마음이 편하고, 오고 가는 대화가 고상해지고, 물질을 초월해서 친하게 된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7-8: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예수님께서 정오 때쯤에 야곱의 우물곁에 앉아 있으니 한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 남 먼저 온 것을 보니 부지런하다. 그리고 점심때에 맞춰서 물을 길으러 왔으니 때를 잘 아는 여자다. 이 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리로 들어갔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다가가서 물 좀 달라고 했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신앙적으로 깨닫는 것은 제자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예수)을 버려두고 육체의 삶의 해결을 위해 큰 마을로 들어갔구나. 큰 마을로 들어가면 사람이 많이 사는데, 목회자 같으면 배고픔 해결을 위해 헌금이 많이 나오는 사람 쪽을 택할 거냐, 아니면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가 있는 쪽을 택할 거냐?

 

주님께서 기진맥진해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니 제자들이 동리도 먹을 것을 얻으러 간 게 일반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일이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이치가 틀렸다. 이럴 경우에 제자들이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하겠는데 이게 없이 그 상황을 보고 인간적인 판단을 해서 먹을 것을 얻으러 가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거다.

 

9-10: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말에 대해 이 말을 한 거다. 여자의 이 말을 보면 사마리아가 역사적으로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이 여자의 말 속에는 앙금이 들어 있다. 무슨 말이냐? 죽 올라가서 보면 솔로몬 왕의 범죄로 이스라엘이 두 조각이 나서 열 지파가 국호를 북조 이스라엘로 삼고 여로보암 왕이 다스렸다. 남조는 두 지파로, 국호를 유다로 삼고 르호보암이 다스렸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이 남조유다에 하나밖에 없고, 제사장들도 거기밖에 없기 때문에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마다 남조로 넘어와서 예배를 드리니까 북조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이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북조에 있는 단과 벧엘에 우상을 세우고 이것이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했다.

 

이걸 지금으로 가지고 와서 보면 세상나라에서 보면 백성들이 국가의 지도자에게 불만을 품거나 반역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려고, 또는 부강한 나라 건설을 위해 백성들이 다른 곳에 정신을 돌리지 못하게 여러 가지 축제를 벌이거나 축구나 야구 등의 경주를 하게 해서 국민총화를 도모한다. 과거에 북조 이스라엘이 이런 짓을 했고, 지금도 보면 자기 교회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교회에 주상을 세운다. 무슨 주상이냐? 교회의 목표를 하나 세우고 온 교인들이 이 목표를 위해 총 매진하게 한다. 기둥에 조각을 해서 이걸 신으로 세워놓고 이것을 바라보며 육신적 소원을 비는 게 주상이다.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주전 721년에 호세아 왕을 끝으로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는데, 이 때 앗수르 왕이 북조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죽이거나 앗수르로 잡아갔고, 다른 나라에서 남자들을 잡아다가 북조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풀어놓으니 이 사이에서 혼합된 자손들이 나오게 된 거다. 이건 필연적이다. 이건 순수한 자식들이 아니다.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이질을 알 수 있는 거지 본질이 아니면 이질을 모른다. 혼합적인 신앙사상을 가지면 본질로 가지 못한다.

 

남조유다 백성들은 주전 586년에 시드기야 왕을 끝으로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많은 백성과 관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성전을 짓는데, 이 때 북조의 혼합된 신앙자들이 얼마나 방해를 하는지? 그러니 남조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록 포로생활을 했지만 신앙정조를 지켰다고 하면서 혈통적 신앙적으로 혼합이 된 북조 이스라엘을 개로 여겼다. 이런 일로 인해 남조와 북조는 서로 앙숙이 되어서 남조사람들은 멀리 돌아서 갈지언정 사마리아 길로는 통행하지 않고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이런 뼈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한 거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런 정신을 깨뜨리려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거다. 즉 신령한 영생수를 주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거고, 영적인 교제를 하자는 거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대뜸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하실 때 이 여자는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자기 감정만 앞세울 게 아니라 자기가 야곱의 후손이라고 해도 사마리아의 역사가 그러니 만큼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자기 스스로도 남편이 여섯이나 있으니 북조 이스라엘 왕들의 치리나, 비진리로 흐른 북조의 신앙이나, 자기 자신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이 여자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감정적으로 대했는데, 니고데모도 자기를 거듭나게 해 주려고 메시아가 자기 왔는데도 못 알아보고 당신은 능력이 많으니 나와 손잡고 유대를 위해 같이 일을 합시다라고 했다.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항상 하나님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그 사람을 정신 사상적으로 빨리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신 게 꼭 물을 먹고 싶어서냐, 아니면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냐? 사실 이 여자가 늘 퍼먹는 야곱의 우물물도 주님의 거다. 그리고 없는 물을 달라는 게 아니라 있는 물을 달라고 하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네 몸 좀 빌리자라고 할 때 깜짝 놀랄 일이다. 오해가 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지은 몸을 빌리자 하실 때는 돌에 맞아 죽게 하려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주시려는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네 몸 좀 빌리자라고 하는 것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는 거다. 마리아는 이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 그래서 잉태가 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었느냐? 성경이 가는 곳마다 영원히 존귀영광의 대우를 받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이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구별 분별하지 못하면 이용당하고, 도둑맞고, 형벌을 받고, 심판을 받는다. 목사의 말이라고 해서 다 주님의 말이냐? 겉으로는 나를 위해주는 말인데 속으로는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아야 한다. 말 속의 뜻을 모르면 그만 속아 넘어간다.

 

세상의 선물은 아무리 비싸도 물질에 속한 거다. 하나님의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하늘의 거다. 이 땅에 없는 거, 돈으로 살 수 없는 거, 영원히 가는 거, 하나님 당신에게 있는 최고로 좋은 걸 주신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거냐? 우리 모두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더 큰 은혜를 받게 하고, 더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시려는 거다.

 

사마리아 여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다. 그러면 여자가 하는 짓을 보면 안 찾아오실 것인데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자로 지어졌기 때문에 찾아오신 거냐, 아니면 창조의 목적 면에서 제 1목적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찾아오신 거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창세 이후로 이 말씀을 한 자가 있느냐? 이 여자는 지금까지 목이 마르면 야곱의 우물물만 퍼먹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이 말을 알아들었을까? 그냥 들으면 둘이서 몇 마디 주고받으며 한 말이지만 예수님의 말을 들여다보면 영원히 없어지는 않는 보화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이 여자가 이걸 알아들을까?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여자의 이 말을 보면 예수님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먼 길을 일부러 오셨는데 이 여자는 자기 감정으로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육덩이 감정으로 말씀을 들으면 사단 마귀가 이 사람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게 된다. 예수님은 영적인 의미로 말씀을 하시는데 이 여자는 육적인 개념으로 듣고 있다. 지금까지 야곱이 파놓은 우물물만 먹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본 절의 여자의 말을 들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으러 오면서, 그것도 지금 처음 온 게 아니라 날마다 와서 우물물을 길어 먹었는데도 두레박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러니 깊은 우물물을 어떻게 길을 것인가?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두레박도 없이 온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은 실지로 물을 얻어먹으려는 게 아니라 영적인 생수를 주려고 말씀을 한 건데 이 여자는 육적으로 받아들인 거다. 이 여자는 육적인 개념으로 말을 했는데, 이 말을 영적으로 생각을 하면 딱 들어맞는 말이다. 전도서를 표면만 보면 세상을 사는 게 다 헛되다고 하니 자살하기 딱 맞는 말이지만 이걸 뒤집어서 보면 천국을 깨닫게 된다.

 

영원한 생수는 야곱의 깊은 우물 안에는 없다. 세상에는 생수를 퍼 올릴 그릇이 없다. 영원한 생수는 이 우물에 있는 게 아니라 간절히 찾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계속 퍼 먹을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주신다. 신앙의 세계는 그렇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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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0 에스더 바사왕의 잔치 에1:1-9  강승호목사  2023-01-04 134
17699 열왕기하 (계시보기)엘리사가 죽은 아이위에 엎드려 살린 게 주는 교훈. 왕하4:19  김경형목사  2023-01-01 103
17698 누가복음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31-33  김경형목사  2023-01-01 100
» 요한복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요4:1-11  김경형목사  2023-01-01 81
17696 신명기 (계시보기)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이 놓여 있다. 신30:19  김경형목사  2022-12-30 81
17695 신명기 주님을 향한 성도의 마음 신6;5-6  전원준목사  2022-12-29 300
17694 베드로전 거듭난 자로 살라 벧전1:13-25  강승호목사  2022-12-28 232
17693 요한복음 (계시보기)태초에 계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의미는? 요1:1  김경형목사  2022-12-25 68
17692 누가복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눅14:25-30  김경형목사  2022-12-25 107
17691 요한복음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3:36  김경형목사  2022-12-25 117
17690 미가 야훼께서 원하시는 자 미6:6-8  강승호목사  2022-12-23 121
17689 열왕기하 (계시보기)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에게로. 왕하2:11  김경형목사  2022-12-21 106
17688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마1:18-25  강승호목사  2022-12-19 361
17687 요한복음 (계시보기)누가 택자이고 누가 불택자인가? 요3:16  김경형목사  2022-12-18 47
17686 누가복음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눅14:25-27  김경형목사  2022-12-18 74
17685 요한복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3:35  김경형목사  2022-12-18 43
17684 누가복음 주의 길을 예비하라 눅3:1-6  강승호목사  2022-12-14 198
17683 호세아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11:1-11  정용섭 목사  2022-12-12 129
17682 누가복음 성령을 주시리! 눅11:1-13  정용섭 목사  2022-12-12 122
17681 아모스 말씀’이 없는 시대 암8:1~12  정용섭 목사  2022-12-12 153
17680 골로새서 아들의 나라 골1:1-14  정용섭 목사  2022-12-12 82
17679 누가복음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10:1-11, 16-20,  정용섭 목사  2022-12-12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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