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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읽기038] 창문 -김태길
[최용우책1040]
<독서일기>
철학자 김태길 교수의 글을 월간<샘터>에서 자주 보았다. 그래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의 수필은 위트가 넘치고 경쾌하면서도 읽고나면 무엇인지 모를 묵직한 감동을 준다. 김태길 교수가 살았던 혜화동 집은 지금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되었다. 그분의 서재에서 하룻밤 잠을 살 수도 있다. -최용우
종로 유진 한옥 게스트하우스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5-43 https://eugenehouse.modoo.at/
<책소개>
한국철학계의 3대 거두인 김형석 안병부 김태길... 그 중에 한분인 김태길 교수의 명저, 아! 20세기는 그랬구나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수필 모음집
우선 글이 재밌다. 주관적인 지수이지만 지금까지 읽은 범우문고 수필 베스트 3위 안에 든다. 지은 이의 관찰력은 거의 비디오 캠을 찍는 수준이어서 읽기만 해도 스르르 광경이 펼쳐진다. 동네에서 보게 된 영결식장면, 유학 중일 때 하숙집 창문에서 길거리로 내려다 본 미국인들의 일상, 산책을 하며 길 하나 사이로 빈부의 격차가 나뉘는 풍경, 세 딸을 낳고 네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주변사람을 포함한 아내와 자신의 심적인 변화곡선, 법정관계자들의 고압적인 재판광경을 경험자로서 날카롭게 묘사한 사회비판적 시선이 담겨있다.
그가 보스턴 공원에서 관찰한 노인의 외로움에 대한 사회적문제는 60년 전 글인데도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미리 내다본 듯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다만 노인의 주거및 생활복지가 해결되어 있는 미국보다 우리의 현실이 더 잿빛이라는 점은 우울하다.
<저자>
1920년 충북에서 태어나 2009년(향년 90세) 소천했다. 경성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퇴임 후 철학문화연구소 소장, KBS 이사장, 학술원 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강단에서 규범 윤리와 메타 윤리를 주로 강의했으며, 계간지 <철학과 현실>을 발행하고, 일반인들을 위한 철학 교양 강좌를 열면서 보통사람들과 함께 삶과 도덕을 이야기하며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썼다.
<내용>
창문 (글의 배경은 1959년 '미국'이다)
창문 아침에 잠이 깨면 우선 또 커튼을 올립니다. 커튼 이랬자 그 이름이 연상시키는 그런 호사스런 것은 니고 2차대전 때 방공용으로 쓰이던 검정 유품에 불과합니다. 집주인 할머니에게 갈아 달라고 부탁을 한들 검소의 덕이 높은 그분이 움직일리 없고, 내 주머니를 털어 개비할 정도의 열성도 없는지라 영구불멸의 상相을 띠고, 여전히 유리창을 덮고 매달려 있습니다.
커튼을 올리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건너편 경찰서 붉은 벽돌집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경찰서는 왜 건물마저 무시무시하고 충충하게 생겨 먹었답니까. 우리나라 같으면 씨름판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는 육중한 체격들을 일광거리면서 정복의 순경들이 뭉게뭉게 정문으로부터 나옵니다. 아침 교대 시간, 그들의 거동에 어딘지 거만한 빛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아마 어떤 선입견의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묵은 관념에 아낙네가 식전부터 앞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고 합니다마는. 차라리 아침 첫번에 내 창밑에 보이는 행인이 그럴싸한 여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찬물이고 더운물이고 고동만 틀면 거짓말처럼 쏟아져 나오는 욕실을 이젠 신기한 줄도 모르고 세수를 하고 나면. 싫단 말도 못하고 책장을 들추어야 합니다. 온돌방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침대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무릎에 베개를 포개고 그 위에 책을 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유. 빵, 코카콜라, 그리고 또 무슨 콜라 등 가지가지 식료품을 싣고 아침 배달에 종사하는 전용 화물차들의 요란한 소음이 공부를 제대로 하게 두지는 않습니다. 문전마다 세웠다 다시 떠나느라고 발동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인지 또는 모통이 집이라 커브를 꺾느라고 그런 것인지 그 소리가 마치 사변때 탱크의 그것처럼 어지럽습니다. 왜 그놈의 차들은 꼭 내가 공부만 하려면 야단들인지.
홀아비답게 간소한 아침 식사가 끝났습니다. 교회 에서 종소리가 이른 공기 선들바람을 타고 밀려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일. 아직도 사람이 덜 모였단 말인지 가볍고 맑은 종소리는 이어 올립니다.
'쿠우엉엉.....' 하고 황혼의 지평선 저쪽으로 끝없이 달아나는 우리나라 고찰의 그윽한 종소리에 비한다면, 그 깊이와 넓이에 손색이 역연하다 하겠으나 그래도 귀에 익어 싫지 않은 음악입니다. 허나 그 교회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또 거기 사는 목사나 신부가 자기도 믿지 않는 말을 남의 속에 집어넣는데 특기를 가진 웅변가인지 또는 진실로 존경을 받을 만한 아름다운 정신인지를 전혀 모르고 지냅니다.
일요일이란 나에게 특히 상쾌한 날은 아닙니다. 것이 우표도, 계란도 잘 살수 없다는 하찮은 불편에 오는 것인지, 위크엔드라는 축복을 색다르게 가져 보지 못한 나의 비뚤어진 심사의 반영인지 알려고 애 쓰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새에 발길을 옮겼는지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무슨 변화를 희구하는 무의식입니다. '변화' 가 내 방안에서 돌연히 일어날 리 만무하며 그렇다고 면도와 넥타이로 차리고 찾아 나갈 만한 이렇다 할 목표도 없다면, 자연 창문 밖 유리 저쪽 너머 그것을 구하는 것이 손쉬운 일이겠습니다.
순경 아닌 일반인들이 오고 갑니다. 화물차 아닌 승용차들이 비탈길을 오르내립니다. 빠알간 바탕에 은빛 테를 두른 스포츠카 하나가 뚜껑을 열어젖뜨리 달려오더니 언덕길 오른편 층층대 있는 집 앞에 달려오더니 언덕길 오른편 층층대 있는 집 앞에 스스로 멈춥니다. '빵빠앙' 신호가 웁니다. 층층대 있는 집 문이 열리며 말만한 색시 하나가 온통 허리와 등을 다 내놓고 껑충껑충 내려오더니 남자가 열어주는 자동차 안으로 흡수됩니다. 잠깐 애정을 증명하는 가벼운 동작이 있은 다음 스포츠카는 바람같이 언덕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아마 그것이 데이트라는 쾌락 인가 봅니다.
너덧살 가량 되어 보이는 여아가 베개만한 인형을 안고 걸어옵니다. 갈 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음을 밝히려는 듯이 오른편으로 길을 꺾어 쭈르르 앞장을 지르며 달아납니다. 조금 떨어져서 어머니가 뾰족구두로 걸어오고, 그 옆에 젖먹이를 안은 아버지가 바싹 붙어서 따라옵니다. 이 무더운 날 넥타이를 매고 저고리를 입은 것으로 보아 교회에 나가는 것 같습니 다. '덩댕 덩댕.......' 종소리가 또다시 울려옵니다.
수박을 두어 개 집어넣은 듯이 한 아름 잔뜩 되는 젖가슴을 가진 여인이 주위를 위압하고 걸어옵니다. 그 거짓말 같은 가슴을 앞으로 불쑥 내미는 것은, "이것 좀 보시오" 하는 자랑이 아니라 체중의 균형을 얻기 위한 자연스러운 자세라고 믿습니다.
수영복보다는 약간 길어 보이는 버뮤다 팬티를 입은 여자 두 사람이 흔들면서 걸어옵니다. 외양은 완전히 성숙했으나 16,7세에 불과할 소녀들입니다. 한소녀의 다리는 백화점 마네킹의 그것보다 더 미끈하 \게 자랐으나 또 한 소녀의 다리는 어느 전람회에서 입장 못한 '나부裸婦'의 하체처럼 그저 굵을 뿐입니다. 작년에 산 팬티인지 가랑이가 좁아서 끼고 보니, 마치 고무 자루에 기름을 담아서 졸라맨 것처럼 잘록합니다.
살이 너무 찔까봐 여자들은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거의 가정마다 욕실에 체중을 다는 저울이 놓여 있습니다. 식전 배가 꺼졌을 때 목간으로 땀을 빼고, '혹, 좀 줄었을까' 조심조심 올라서 보는 광경이 잡지, 광고 등에 흔히 보입니다. 씨리얼, 설탕, 통조림 등 가지가지 식료품 광고들은 '체중 줄이는 식품', '1온스에 겨우 18칼로리' 따위의 언사를 대서 大書하여 소비층을 유혹합니다. 그러니 우리 같이 마른 사람은 광고에 나지 않은 식품으로 골라서 사 먹어야 될 형편입니다.
덮어놓고 가냘프기만 하면 미인이 되는 것인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허리나 종아리 같은 부분을 비롯하여 전체로는 가늘고 길되 몇몇 특수한 부분만은 도리어 소담스럽게 발달해야 한다니 그 주문이 과연 수월치 않습니다. 아마 그래서 미용 체조 강습회가 세월을 만나고, 홀라후프 따위의 간단한 착안이 세계를 휩쓰는 괴변이 생기는가 봅니다.
굵은 다리도 가는 다리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굵으면 너에게 무슨 걱정이고, 가늘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도시 싱거움을 깨닫고, 창문으로 부터 물러갑니다. 은은히 파이프 오르간의 유랑한 곡조가 들립니다.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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