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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3 추천 수 0 2023.02.12 12:00:17
.........
성경본문 : 눅15:11-32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511-32: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8: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했는데, 부모공경을 말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찾고, 그 기준에 비춰서 내가 부모에게 잘못했구나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통치를 안 받겠다는 것이니 부모공경도 이 기준에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도 옳은 말씀은 들어야 하고, 영적으로도 영원히 옳은 것은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듣기 싫다고 자기 것으로 안 만들면 그 말씀에 자기가 심판을 받고, 또 하나는 자기가 진리지식의 사람으로 안 되기 때문에 안 된 자기 수준으로 자기가 당하고 만다.

 

보통 타가 와서 나를 해롭게 했다이런 쪽으로 많이 보지 내가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처지는 잘 못 본다. 그게 문제다. 그 생각을 고쳐야 한다. 병원의 의사가 나쁘다고 하기 이전에 자기 몸이 안 아프면 그 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남이 나에게 피해를 입히면 남 쪽으로만 생각을 하지 내가 어리석어서 당하는구나하는 것은 생각을 못하니 실력보강을 못한다.

 

작은 아들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것만이 아니라 결단을 바로 내렸다. 이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대한 죄는 물질을 다 탕진해 버린 것. 진리통치를 안 받고 물질을 탕진해 버린 것. 진리통치 안 받으면 물질탕진은 자동적이다.

 

19: 작은 아들이 자기가 거지꼴로 품꾼들 앞에 나타날 때의 자기의 체면, 망신이 연상이 안 돼서 아버지 집으로 가는 거냐?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한 이 말속에는 자기 얼굴이 똥이 되는 각오까지 다 포함된 말이다. 그러니까 회개가 바로 된 사람에게는 인간의 체면, 자기의 권위성 등 내세울 수 있는 자기는 십자가에 다 못박아 버린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과거적인 자기는 저주받고 죽었는가?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안 죽었다면 자기가 앞으로 살아나가면서도 어떤 상황 사건에서 나 안 죽었소하고 탁 튀어나오게 돼 있다.

 

우리는 잘잘못을 늘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지 인간 자기 기준에서 타인의 잘잘못을 찾아서 나에게 해롭게 한 것에 대해 마음을 상하고 있다면 그건 잘못된 거다. 그렇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해서 자꾸 관계성에서 잘잘못을 찾으니 바로 서지를 못하는 거다. 기독자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이니 늘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이 돼서 그 기준을 가지고 잘잘못을 찾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위신, 자기 체면, 자기 권위의식이 펄펄 살아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 신앙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잘 시인을 안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이룰구원을 이뤄놓은 그 면은 부정을 하는 식으로 믿는 거다. 이는 성경구절에 있듯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되는 거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언행심사적으로 구원을 이뤄놓은 그 내용을 속속들이 모른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존재적으로는 믿어놓고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모든 언행심사 모든 관계성을 가지는 것이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이룰구원이 나오겠느냐? 안 나오는 거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자기 체면이 깎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정확하게 바로 된 거다. 자기 체면이 깎인다고 해서 누구 집으로 들어갈 것이냐?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자가 자기의 영적인 면에 영인성장 면이 곤란해져도 자기 체면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 대한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싸웠을 때 대부분 이 교회가 아니면 갈 데가 없나?’ 하고서 다른 교회로 가서는 신앙 있는 척 한다. 이건 잘못된 거다. 이건 일반인들의 자세다. 교인이면서도 일반적으로 놀려고 하지 하나님 앞에 바로 된 중심으로 나가는 신앙은 정말 드물다. 그런데 본문의 작은 아들은 완전히 낮아져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20-23: 본 절의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심정에서 자기를 향한 주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느냐? 주님의 마음이 인격적으로 느껴진다면 그는 벌써 성령님의 역사가 된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온 것처럼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그 포근한 가슴,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 다 날리고 난 뒤 그 신세의 처절성,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쌓이고 쌓인 회개의 눈물,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자 마자 처절성에서 각오한 그 결심은 변치를 않는다(21).

 

회개로 고백하는 아들에게 어떤 대우가 들어갔느냐? ‘살찐 송아지를 잡고, 고운 옷을 입히고, 풍악을 울려라.’ 회개한 자에 대한 대우가 이렇게 좋다. 그러니 회개를 하는 게 좋으냐, 안 하는 게 좋으냐?

 

회개를 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은 물론이고 종들의 얼굴을 다 보게 될 것이니 자기 체면이 다 깎이겠지만 집에 돌아온 아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거기에 하등 개의치를 않는다. ? 하나님 앞에 바로 회개를 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러니까 과거에 잘못한 사람이 지금 회개하고 바로 가고 있는데 바로 가는 그건 못 보고 과거적인 것을 갖고 와서 자꾸 헐뜯는다면 그게 바로 된 사람이냐?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상하게 현재 바로 가고 있는데 과거에 잘못 간 그것을 가지고 와서 자꾸 헐뜯으려는 악성이 들어있다.

 

24절에 보니까 과거는 다 죽었고 이제는 다시 시작한다. 즉 회개가 바로 된 데서 영적인 새로운 것이 나가는 거다. 바로 돼야 나간다. 바로 안 되면 절대로 안 나간다. 주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의 죽은 연장선상에서 되는 은혜가 아니다. 회개가 바로 됐으면 전혀 새로운 것이 나온다. 만일 과거의 죽은 연장선상이라면 그건 사망인데, 회개치 않고 알면서도 자꾸 죄를 쌓으면 시험에 걸려 자기의 부끄러움이 생기게 된다.

 

25-27: 큰 아들의 말속에서 아버지와 같은 긍휼한 자비스런 마음이 보이지를 않는다. 큰 아들의 말대로라면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 그러나 평소에 아버지의 말씀대로 일은 잘 했는데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은 닮지를 못했구나.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야 한다. 잘잘못을 판단하는 데는 칼날처럼 무서워야 하지만 그러나 그 마음은 뜨거워야 한다. 그 마음이 뜨겁지 않으면 칼날이 서지를 않는다. 잘잘못을 딱 자르는 게 안 나온다. 두리뭉실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이 일반적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마음이 좋다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도 좋다. 저 사람도 좋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사람도 좋다. 저 사람도 좋다하는 사람은 이용감이다. 그럼에도 상대가 자기를 이용해먹는 줄을 모른다. 우리 기독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큰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비해 차갑다. 동생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없다. 사람이 마음이 뜨거운 사람은 어떻게 보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다. 사랑이 풍부하면 사람의 마음이 뜨겁다. 같이 살았으면서도 차갑고, 따지기를 잘 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옳고 그른 것만 따지며 자기 할 일은 하지 않는 건 잘못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말로만 가르치면 안 된다.

 

삼라만상은 우리의 구원이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다 우리의 구원에 활용물이다. ‘그러려면 성도들의 머리 씀씀이가 얼마나 지혜롭고 관찰력이 있어야 되겠구나이게 있는 거다.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삶이 그렇다. 다 자기의 이룰구원의 재료들이다. 자기가 노력을 하면 그만큼 습득이 되고, 자기가 그만큼 건강하고, 자기에게 그만큼 사랑이 돌아오고, 부가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가 돌아온다. 사람 속에 살면서 사랑받는 것도 자기 할 탓이요, 미움 받는 것도 자기 할 탓이다.

 

나에게 신학을 배우는 목사님 중에 어느 목사님이 다른 전도사님들 한 열 명을 물질로 돕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 전도사님들을 우리 공부시간(김경형 목사님이 교역자 대상으로 매 주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공부 시간)에 데리고 와라했는데 안 온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럴 경우 와서 배워야 하는 건데 안 온다면 더 이상 도와줄 수가 없는 거다. 물질이 있어도 못 돕는 거다.

 

그래서 목사님이 안 도와주니까 아버지, 아버지하며 따르던 그 전도사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이 달라졌다. 변질됐다고 한단다. 아예 원수처럼 됐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끊으라고 했다. 그걸 그대로 계속 하면 예수이름을 빙자해서 목사네, 전도사네하며 성직을 이용해서 도둑이 되는 거다. 도둑을 키우는 거다. 일반도 안 그러는데 하나님의 집에서 이건 일반 이하다.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부터 일반 공중도덕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 공중도덕을 어기면 못 배운 사람으로 취급이 된다. 성품적으로 심성이 곱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집안에서 동생을 돕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시골에서 보면 겨울인데 발가벗고 있는 동생을 업고 있는 아이를 보면 참 사랑스럽다. 지금은 기계식이고 자동화로 돼 놓으니까 동생을 업어주는 언니 오빠가 별로 없다. 업어주는 데서 사람이 뭔가 느낌이 있는 거다.

 

우리가 그토록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얼마나 가졌는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한 집안 식구가 서로 사랑하면 물고 늘어지지를 않는다.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닮았는가? 오늘날 우리 집 자식들은 하나님을 닮은 마음이 있는지? 아버지의 마음을 닮았는지? 아니면 모두가 제각각인지?

 

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닮지를 못했다. 그 뜨거운 마음을 닮지를 못했다. 그 심성을 닮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이 큰 아들은 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안 가지고 있으면 그 면에 죄인 줄을 모른다. 사람은 마음이 뜨거워야 할 때는 뜨거워야 바로 된 거지 뜨거워야 할 때 차가우면 죄가 된다. 또 차가워야 할 때 뜨거우면 그것도 죄가 돼 버린다. 사람이 못 쓰게 된다.

 

사람이 첫째, 볼 적마다 인사성이 있어야 한다. 별 것도 아닌데 사람이 인사성이 없으면 그게 그만 버릇화 돼서 사람이 이상하게 보여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 기본도 안 된 사람이 많다. 인사성이 없어서 거기서부터 단절이 되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차원이 굉장히 높은 건데 일반차원도 안 된 상태에서 구원, 구원하고 돌아가면 구원이 되겠느냐? 구원을 알고 싶으냐? 밑에서부터 닦아 올라가야 한다. 교회에 처음 온 교인이 있다면 가서 인사도 하고. 예를 들면 식당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힐끗 쳐다보고 만다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왔는데 힐끗 쳐다보고 만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내 집에 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할 줄을 알아야 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닮지를 못했다. 그러면 여기서 큰 아들이 어디 나가서 요즘 자주 들을 수 있듯이 나는 모태신앙이다한다면 어떻게 될까? 떳떳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습관적으로 액면적으로 살아온 그 정신을 참 좋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동생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했는데, 큰 아들이 말한 것은 하늘과 아버지께 선이고 의로운 말이냐?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의 사건에서 형의 그 마음 정신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큰 아들의 원망불평에서 큰 아들 속에 세상의 누림성이 들어있구나. 그리고 회개의 참 뜻을 모르면 동생을 사랑할 리가 없다.

 

오늘날 모든 기독자들이 원수를 맺고, 편당을 짓고,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은 회개의 참 뜻을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다. 알면 그러지를 않는다. 영적 고갈상태는 하나님과 그만큼 의사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른 채 충성봉사를 하는 것은, 사명감을 갖는 것은 회개가 바로 안 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모든 상태는 어떤 환경적 사건이 조여오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건 환경적으로 자기에게 조여오고 있다. 그런데 자기는 그걸 모르고 있다. 우리는 조여오고 있구나하는 걸 알아야 한다. 잘 믿는 사람에게도 사건 환경이 조여오고, 믿는 사람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도 사건 환경이 조여온다.

 

그리고 그 사건 환경이 각 사람을 무시하고 대우하는 게 나오는 거다. 똑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그만큼 바로 닮은 사람은 사건 환경이 그 사람을 그만큼 높이 올려준다. 아닌 사람은 얼굴이 똥이 된다. 이걸 의식하고 살자. 바로 안 된 사람은 미래가 현재되는 그 날에 큰 아들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원망과 불평이 나올 것이 확실하다.

 

형의 마음이 누구 때문에 나타났느냐? 동생 때문에 속마음이 나타났다. 그 때 동생은 어떻게 나타났느냐? 바른 회개를 한 자로 나타났다. 그러면 형이 동생을 드러낸 것이냐, 사건이 동생을 드러낸 것이냐? 사건이다. 관계성에서, 사건 속에서, 존재 속에서 자기가 드러나게 돼 있다. 무엇이든 드러나게 돼 있다. 그걸 알고 살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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