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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진리
마태복음 10:34~42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정치적인 평화는 물론이고 경제적 번영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유대는 시리아 지역에 자리 잡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의해 민족적 모욕과 종교적 수모가 극에 이르다가 주님 당시에는 로마에 의한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수탈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하는 메시아의 사역은 당연히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번영이 필수조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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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아 사역에 나서는 처음부터 정치와 경제를 배제하셨습니다. 사십일 금식을 하신 후에 악마에게 이끌려 세 가지 시험을 받을 때(마 3:1~10) 이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일은 경제 메시아의 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 문제는 지도자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악마가 제시하는 경제 메시아의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 무탈함을 만민에게 보이라는 것인데, 이는 인기와 권세를 위한 영합의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악마에게 절하므로 높은 산에서 본 영광을 취하라는 것인데 이는 고난 없이 메시아의 길을 가라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정치적이고 경제적 메시아의 길을 걸으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시며 메시아의 길이란 희생의 길이며 신뢰와 순종의 길이고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메시아의 길이 고난을 수반하는 대속의 길이듯 제자의 길 역시 영광과 번영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의 길임을 (마 10:16~22) 열두 제자에게 분명히 고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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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마 10:34~35 새번역).
1세기 제자들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본받았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사는 이들을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가치와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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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 10:39 새번역).
예수님은 제자에게 고난을 각오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불행에의 강요가 아니라 행복에로의 초대라는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죽음, 곧 끝없는 자기 부인과 성찰을 통하여서만 ‘살아있음’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죽으면 지금도 살고 내세에서도 영원히 삽니다. ‘삶’은 ‘죽음’이 전제된 명제입니다. 죽지 않으면 ‘삶’도 없습니다. 이 가르침은 제자도의 원리이자 핵심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죽어야 산다는 점을 알면서도 살려고만 하는 어리섞음을 용서하십시오. 빈 마음과 낮은 자세를 늘 견지하겠습니다.
● 찬송 : 341 십자가를 내가 지고
2023. 2. 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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