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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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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주훈 목사 |
참고 : | 중앙루터교회 사순절 둘째 주일 |
(교회력설교)20230305 사순절 둘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요한복음 3:1-17
예수와 니고데모
사순절 둘째 주일 교회력 복음서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성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요한복음 3:16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워낙 유명한 성구라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요한복음 3:16에 담긴 풍성한 뜻을 알아채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성공 하나님의 구원
오늘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이 둘을 비교해 보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대비되는 부분이 참 많아요. 니고데모는 평생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한 유대인의 지도자이고, 지식과 권위를 모두 갖춘 인물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처럼 양질의 교육과정을 거치지도 않았고, 성경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못했지요. 그저 비천한 출신에 가난한 삶을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비천한 예수님이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묻는 니고데모에게 그 답을 알려주십니다.
이 둘의 만남은 단순하거나 우연한 만남 이상으로 보입니다. 여러 면에서 니고데모는 지식, 권위, 권력을 중시하는 세계상을 대표하고,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을 중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합니다.
이런 대조는 이미 니고데모와 예수라는 이름 속에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다 아실 겁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니고데모는 정반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리스어 이름인데, ‘승리’를 뜻하는 νίκη(nike)와 ‘사람’이라는 뜻의 δῆμος(demos)라는 단어를 합친 말입니다. 나이키는 다 아시지요? 니케라는 니고데모의 앞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승리라는 말과 사람이라는 말의 조합이 니고데모예요. 그러니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사람의 승리’ 또는 ‘성공한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한쪽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사람이 서 있고, 다른 한쪽은 사람이 승리한다는 이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표하는 예수님과 인간을 대표하는 니고데모가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 둘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빛과 어둠, 하늘과 땅으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모습으로 읽힙니다.
요한복음은 1장에서부터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날카롭게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선 거의 보기 힘든 이야기 전개 방식입니다. 자칫 이런 맥락으로만 본다면, 오늘 본문은 소위 말하는 좋은 놈과 나쁜 놈이 대결하는 이원론에 빠지고 맙니다. 어찌 보면, 요한복음이 그런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하늘과 땅, 어둠과 빛, 하나님과 세상이 만났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리고는 이 만남 뒤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오늘 말씀을 처음부터 살펴봅시다.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진짜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적은 행할 수 없는 게 분명합니다.” 2절에 나온 내용이지요. 여기서 니고데모가 표적(기적)을 보고 찾아왔다고 하는데, 이전부터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봤던 것 같습니다. 바로 앞장인 요한복음 2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 들어가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대결하고 성전에 나와선 수많은 사람에게 베푸는 이적이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성전에서 예수님의 기백과 용기도 보았고, 성전 밖에서 보여준 자비와 기적도 눈여겨보았던 것이지요. 이런 모습을 보고 니고데모는 생각이 많아졌을 겁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참고로,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인물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3장에서 처음 등장하고, 두 번째 등장은 요 7:50에서, 세 번째는 요한복음 19:39에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종합해서 보면, 니고데모는 유대인에게 존경받는 바리새파 국회의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유력한 인사가 한밤중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말에 주목해봅시다.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여러 이유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인데, 성전 제사장들의 미움을 사는 사람을 대낮에 찾아간다는 게 눈치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시 바리새인들이 충실히 지키던 교육의 의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일과 중에는 배울 수 없으니 자투리 시간을 써서 밤에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는 요한복음서 기자가 의도적으로 밤에 찾아왔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앞서 언급한 대로, 요한복음은 상징과 비유를 탁월하게 사용하는데, 요 3장을 읽어보면 ‘빛과 어둠’이라는 말을 통해 두 개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빛은 구원의 세계, 그리고 어둠은 심판의 세계 또는 아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어법을 ‘밤에 니고데모가 찾아왔다’라는 말과 연결해보면, 니고데모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불완전과 갈등, 흔들림, 즉 아직 구원의 진리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
요한복음 3:2에서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찾아왔다’라는 말이 이런 상태를 보여줍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이런 니고데모의 심리상태가 3절부터 시작하는 예수님과 대화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화를 잘 들어보세요. 서로의 말이 헛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고, 니고데모는 ‘그럼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하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고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응수합니다.
서로 이야기의 초점이 잘 안 맞아요. 어찌 보면 동문서답입니다. 지금 둘이서 대화하고 있는데 서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거듭난다’라는 한 단어 때문에 그래요. ‘거듭남’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아노텐’(ἄνωθεν)이라는 단어인데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첫째는 한글 번역 성경대로 ‘다시’라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위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우리말에도 이런 중의어가 많아요. 예를 들어, ‘우리 엄마는 손이 크다’라는 말은 손이 정말 크다는 말일 수도 있고, 때로는 씀씀이가 후하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중의어가 나오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봅시다. 니고데모는 ‘아노텐’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그럼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뜻이 아니라 “사람이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건 세상에서 일어나는 방법,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땅의 방법을 말하고, 예수님은 하늘의 방법을 말합니다.
놋뱀과 십자가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갑자기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명 불뱀 사건으로 불리는 이야기입니다. 광야로 나선 히브리 백성이 노예 시절 처참한 과거를 깨끗하게 잊었고, 광야에서 그들을 안내하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고, 진주 같고 기름진 고기 같다던 만나는 하찮은 음식이라고 웃어버리는 상황이 되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징벌하고, 놋뱀을 보는 사람만 살아남았다는 사건을 아실 겁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불뱀이 나타나 사람을 죽였는데,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걸 쳐다보는 사람마다 살았다는 내용, 게다가 죽음도 치유도 그 원인이 모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참 이상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민수기에 나오는 불뱀 사건을 오늘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결론만 말하면, 하나님은 두려움과 공포의 근원인 동시에 ‘치유와 구원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공포와 두려움은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그렇기에 치유도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공한 사람, 니고데모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예수의 세계에 모든 열쇠가 있다는 걸 여기서 엿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아픔과 괴로움을 만납니다. 도대체 이 시련과 두려움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디서 끝날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하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책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시련을 끝내고, 치유하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모세가 놋뱀을 들어 올립니다. 이것이 먼 훗날 니고데모에게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예수님의 대답 속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놋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올려세우십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치유와 구원의 놋뱀이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여기서 물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회개를 선포했던 세례요한을 기억나게 합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하나님 앞에 과거의 죄를 자백하고 청산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비방했던 나의 입술, 이익만을 탐했던 나의 마음, 악한 것을 알고도 모른 채 침묵했던 우리의 과거를 철저하게 책임지고 갚고 청산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과거를 잊은 백성은 미래가 없다는 말도 이런 맥락 아닐까요.
‘성령으로 난다’라는 말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영’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매일 매일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도록 하는 게 성령입니다. 또한, 성령은 내가 주인 되었던 내 입술, 내 눈과 귀, 내 마음을 하나님이 주인 되도록 만드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았다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저울 위에 자기 양심을 올려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어제나 오늘이 똑같으면 성령 받은 것인지 의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냉정히 돌아봅시다. 예수 믿기 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우리의 마음과 말, 행동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건 허투루 예수 믿은 겁니다.
여기서 ‘영성’이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많이 사용되지만, 이말의 기본적인 뜻은 ‘초월’, 즉 ‘나를 넘어선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를 넘어선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생긴 이래 ‘영성’이라는 말은 언제나 나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기독교적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측은지심의 마음, 즉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걸 성경에선 ‘성령의 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고전 12:4에 보면,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오는데, 잘 보시면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 깊은 사람은 혼자서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과 아픔을 공감하고, 그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영성 깊은 기도라는 말도 똑같아요. 기도하면서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한다 해도, 그것으로 끝나면 그리스도의 영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지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방법, 영생하는 방법을 물과 성령을 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 되어 사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길에 나의 마음과 삶을 가지런히 놓는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나를 넘어 타인을 배려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며 사는 삶을 뜻합니다.
기다리는 예수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뜻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아직 땅의 세계에 어두워진 밤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 그리고 니고데모처럼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땅의 사람은 가망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어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히 버림받고 말까요? 아니요. 요한복음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읽어보면, 니고데모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랐는지 아니면 떠났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니고데모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요한복음 7:50과 19:39에 다시 등장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는지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7:50에서는 예수를 잡으려는 제사장과 바리새인 무리 앞에 그가 나타나 예수의 무죄를 변호합니다. 요한복음 19:39에서는 더 인상적입니다. 몰약과 침향이라는 귀한 기름을 ‘100 리트라’, 환산하면 대략 32kg 정도의 기름을 들고 예수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 앞에 찾아옵니다. 이건 대단한 용기입니다. 당시 문화에선 십자가형으로 죽은 죄인의 시신은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이른 아침 기름을 들고 정성스레 수습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처음에 어둠 가운데 있던 그가 예수를 만나 변했다는 뜻 아닐까요!
니고데모의 모습을 요한복음에서 따라가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저주하고 심판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3:16-1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절은 니고데모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의 사람, 불안의 밤을 걷는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약속이며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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