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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4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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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49절-54절: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49절: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주님은 아이가 있는 곳에 가지 않고 ‘말씀대로 되어지이다’ 라고 해도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건데 아비는 예수님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했다. 나사로의 경우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주님이 여동생들에게 오빠 나사로가 살아날 거라고 하시니까 마르다는 이 말을 믿지 못하고 마지막 날 부활 때 살아날 줄 믿는다고 했다. 이에 주님께서는 지금 믿으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을 하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한 것은 다른 말로는 ‘오라비가 죽기 전에, 즉 나흘 전에 와서 낫게 해 주시지 왜 죽은 뒤에 오셨습니까?’ 라는 거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성은 예수님이 그 자리에 가시던 안 가시던, 장소나 시간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밤이던 낫이던 상관이 없이 나타난다. 이런 하나님을 믿느냐? ‘상관없이’ 하는 여기에는 ‘없는 가운데서도 만드시고, 만든 것을 없애기도 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네가 믿느냐는?’ 라는 거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다.
왕의 신하는 이것을 모르고 아들이 살아나는 것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을 살리는 것을 직접 봐야 만이 믿겠다는 거다. 이건 예수님께서 보실 때 당신의 능력을 못 믿는다는 말이 된다. 아비와 예수님 중에 누가 정확하냐? 예수님께서 보시는 게 정확하다. 모든 것의 기준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동일이다.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이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 와서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이 서로 통하지 않는 엄청난 간격이 있는 거다.
5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라고 하시는 말씀이 과연 믿어졌을까? ‘믿고 가더니’ 라고 했으니 믿어졌기 때문에 간 거다. 만일 가더라도 의심을 하면서 내려갔다면 아이가 나을까? 말씀을 하셨으니까 낫기는 할 거다. 그러나 자기의 믿음은 그만큼 퇴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인간이 안 믿더라도 그 말씀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당신의 입으로 나온 말씀은 역사화 사건화 되어서 반드시 나에게 임하는구나. 구약성경에 아버지로 통해 아들에게 축복과 저주가 내려지는 게 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예언한 그대로 축복과 저주가 임했다. 그런데 저주의 예언을 받은 사람이 자기가 고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그 저주의 예언이 자기에게 임하지 않는다. 예언을 하는 것은 그 예언이 오기 전까지 고치라는 거다. 안 고치면 예언대로 되는 거다.
이걸 지금으로 가지고 와서 보면 성경에 예언된 저주의 예언이 그 사람에게 그대로 임한 것을 보는 내가 나를 살펴서 저주를 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고쳐야 한다. 안 고치고 있으면 그 저주의 예언이 나에게 그대로 온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에게 미리 고치라고 성경에 그 예언을 기록해 놓은 거다. 고치면 복이 임한다.
51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서 내려가고 있는데 종들이 마주 올라온다.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올라오는 거다. 아비가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쁠까? 또한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들도 얼마나 기쁠까? 아들이 낳은 후에도 아비가 예수님에게 ‘내려오소서’ 라고 하겠느냐?
아비가 이제는 내려간다. 말씀을 믿으면 말씀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오기도 하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했다. 명령이다. 안 믿으면 이렇게 건방지고, 시은자가 되고, 명령을 하게 된다. 살아난 아이를 만나려면 내려가야 한다. 교만한 마음이 내려가야 한다. 존재적 개체적으로 보면 네 속에 신앙이 살아나고 싶으냐? 내려가라. 말씀에 순종해서 내려가라. 그래야 살아난 아이를 볼 수 있다. 열 번이라도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야 산다. 살아난 아들에게는 희망, 소망, 건설, 장래, 미래, 사랑이 다 들어 있다. 안 내려가면 이제 말한 게 자기 속에서 살아나지를 못한다.
내려가니 집에서 또 기쁜 소식이 올라온다. 말씀에 순종해서 내려가니 기쁜 소식을 안고 올라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내려가는 것은 사실은 내려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존귀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씀에 순종해서 내려가면 자기에게 희망의 복된 소식이 올라오는구나. 그러나 교만하고 건방지고 시은자가 된 자에게는 무엇이 다가오겠느냐?
이치는 똑같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순종을 안 할 때 천 리 만 리 밖의 나라를 움직여서 정복하고 쳐들어오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중심을 보시고 모든 만물을 동원하신다. 자기가 지혜를 못 쓰면 사기꾼에 당하게 되어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가다보면 모든 은혜를 받게 된다. 순종이 아니면 교만인데, 교만은 불순종으로서 멸망의 선봉이다. 멸망을 당하는 사람 속에는 교만이 들어 있다. 자기 속에서 이런 게 보여져야 하는데, 안 보인다면 앞으로 무엇이 크게 다가와서 자기를 덮칠지 모른다.
52절-53절: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아들이 낫기 시작한 시점을 물어보니 제 7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아비가 생각을 해 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이가 살았다’ 라고 하신 시각이 그 때다. 그래서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었다. 이래서 왕의 신하의 집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과 행복이 찾아온 거다. 알고 보면 이걸 주님이 다 하신 거다.
일반적으로도 한 가정에서 사람이 죽으면 무슨 행복이 있겠느냐? 자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많은 자식 중에 하나라도 죽는다면 소망이 하나 죽는 거고, 행복이 하나 죽는 거다. 영적으로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모든 성도 하나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명이 살아야 한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자기의 신앙생명이 ‘죽어가느냐, 살아서 올라가느냐, 죽어서 내려가느냐, 나이와 함께 짚불이 꺼지듯이 꺼져 가느냐?’ 하는 걸 느껴야 한다. 못 느끼고 있다가 당하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그만큼 늦는 거다.
아들이 살아나니 그 집에는 소망과 행복이 찾아왔다. 이걸 영적으로 생각을 하라. 그리고 그 집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니 이 집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된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에 순종이 되면 사람이 반석 위에 보전이 되고, 사람 속의 마음이 보전이 되고, 지혜로워지고, 그 가정의 물질이 나가고 들어가는 게 바로 되니 헛으로 나가지 않게 된다. 이건 하나님은 특별섭리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들어 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니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됐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면 물맛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의 맛이 달라져야 한다.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야 한다. 소금의 맛은 잃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에 따라 연관성에서 적절하게 나가야 한다. 사람의 맛이 달라졌다는 것은 참 사람으로 변했다는 거다. 자기의 기쁨을 삼는 질이 달라졌다는 거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예수 믿은 후에 자기의 맛이 달라졌느냐, 그대로냐? 그대로 있다면 소금이 없는 거다. 소금역할이 안 되는 거다. 사람이 바로 못 되면 아무리 잘 살아도 오만 곳에 불의다. 기독자는 말씀으로 거듭나서 결혼을 하는 게 좋다.
54절: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두 번째 표적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셨다. 즉 생명의 말씀으로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운동이다. 예수님으로 통해 온 집이 다 살았다. 온 집이 다 구원을 얻었다. 변화되는 운동, 살리는 운동이다.
온 가정이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사는 것이 전부가 살리는 구원운동이구나. 말하자면 사망계로 나가는 것이 없구나. 죽어나가는 것이 없구나. 헛으로 나가는 게 없구나. 살림으로 말을 하면 알뜰살뜰 하구나. 생각이 건설적이고, 살리는 생각이고, 모든 노력봉사가 살리는 쪽이다. 누가 이런 사람을 무시하겠느냐?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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