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1:3-19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창:의 첫날의 빛은 말씀의 빛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만들어 놓고 어떤 작업을 하시느냐? 빛이니까 구별 분별이 나오고, 그다음에 만물을 창조하신다. 창조는 생산이다. 빛이 들어가니 ‘뭐가 나라. 뭐가 나라’ 하게 된다. 그다음에 질서를 잡는다. 그런데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서 징조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했다. 이 빛은 징조를 알아볼 수 있는 빛이다.
원 빛은 첫날에 만들었다. 그리고 넷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첫날의 빛에 합해져 버렸다. 그래서 인간과 만물이 햇볕의 혜택을 받듯이 말씀의 빛을 받으면 영의 세계를 보게 되는 거다. 아울러 말씀의 빛은 영적인 빛이니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영적인 낮과 밤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은 신앙 면에 아직도 밤이구나. 죄악의 밤이구나. 어두움 속에서 사는구나’ 이걸 알게 된다.
해가 지고 뜨고 하며 돌아가면 일 년 사시사철이 되고, 이 빛에 의해 ‘아 뭐가 오는구나. 어떤 바람이 불면 뭐가 오는구나’하는 것을 알듯이 말씀의 빛을 받으면 ‘지금 신앙 사상적으로 교회 안에 물질사상의 바람이 불고 있구나. 어떤 바람이 불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만물을 보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성경을 통해 안다.
인간에게는 오각의 오감성이 있는데, 우리 몸은 소리로써, 접촉으로써, 먹음으로써 오는 감성이 있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살살 말을 하면 귀가 간지럽다. 이것은 발이나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눈으로 보는 눈맛도 있다. 눈이 시릴 때 눈물이 나온다. 하루살이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시리고 눈물이 난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도 눈이 맵고 눈물이 난다. 이것은 입으로 고추를 먹어서 매운 것과는 다르다. 또 코로 냄새를 맡는데, 신 냄새, 고소한 냄새 등등을 안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을 혀로 다섯 가지 맛을 알 수 있게 지었는데, 그러면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을 합치면 무슨 맛이 날까? 이런 것을 음식 면에서도 생각해 보고, 생활 면에서도 생각해 보고, 신앙 면에서도 생각해 봐라. 믿는 사람들은 신앙의 맛을 알아야 하는데 이 맛을 안 보려고 한다.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다섯 가지 맛을 먹어야 건강을 유지하는 건데 편식을 해서 여러 가지 맛을 먹지 않으면 힘을 못 쓴다. 신앙 면에서도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건과 환경과 존재를 통해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성장해야 하는데 안일만 추구하면 이게 안 된다.
‘무슨 독을 먹을지라도 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거지만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아무거나 먹어도 소화가 잘되는 건강체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난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서 신체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 한두 가지냐? 인간이 먹을 게 엄청나게 많은데 이걸 다 골고루 먹어야지 자기 입에 맞는 것만 먹으면 자기만 손해다.
우리 교인들은 처음 사랑이 식지 않아야 하고, 그다음에 영적인 사랑으로 상대와 관계를 짓다 보면 상대의 육적인 흠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지 못하고 만나면 맨날 서로 싸우면 어찌 구원이 되겠으며 평안이 있겠느냐? 영적인 사랑은 육적인 사랑 위에 있다. 육적인 사랑은 죄적인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사랑을 위해 행동과 활동으로 육적인 사랑을 쓰는 거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일반적인 성격이나 성질이나 생활의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생활에 애착감이 크면 믿음으로 못 들어가고 은혜도 못 받는다.
잠9:에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라고 했는데,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각가지 재료를 잘 배합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각가지 맛을 내는 많은 이치가 들어있으니 우리는 말씀에서 신앙의 여러 이치를 깨달아서 다각적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부모가 매를 들고 자식을 때리면 겉으로 보기에는 미움으로 보이지만 이 안에는 사랑이 들어있다 이것을 깨닫는 자식은 훌륭하게 자란다.
교회에서 아무리 성경을 들고 말을 해도 일반 세상적 이성이 바탕이 된 말은 최고로 올라가도 신적인 도덕성에는 미치지 못하고 세상의 도덕성에 머물 뿐이다. 세상의 도덕성은 사람을 감화 감동시키거나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사람을 지식적으로 인격적으로 바꾸는 작업은 신의 역사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침이 진리이치가 분명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가는 메시지라야 이 말씀을 듣는 사람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변화가 된다.
어느 교회에서든 설교를 들을 때 뭔가 다르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귀맛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이때 자기의 기존지식에 맞기 때문에 뭔가 다르다고 한다면 이것은 생명의 말씀 때문도 아니고 성령의 감화도 아니다. 또는 구별 분별이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하는 식으로 다르다고 한다면 이것은 혼합이요 혼잡이다. 이런 것은 인간의 것이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역사를 안 하신다. 간장이나 된장이나 고추장을 담그려면 항아리를 깨끗이 해야 하고, 좋은 간장에 새 간장을 섞으면 새로 섞은 간장도 맛이 좋아지듯이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 사모할 때 내 속이 진리본질의 말씀에 담가진다.
잠5:에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고 했는데, 타인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은 자기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다.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자기에게만 필요한 거지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받으라고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메시지를 전할 때 자기의 물질성적 세상성적인 것을 기준해서 전하면 안 되는 거다. 인간 자기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이치가 나온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