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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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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3절-4절: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지난 설교 보충.
요:에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행한 이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거다. 성경에 이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은 ‘너희들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먹어라’ 이 말이 아니라 맛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맛있는 사람이 되라는 거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음식은 간이 맞아야 맛이 있다. 그래서 미개지역에도 소금이 필수다. 사람의 몸 속에 소금이 없으면 죽는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들고 우리로 깨닫게 해 주신다.
맹물보다 포도주가 맛있는데, 이걸 보여주시는 것은 포도주처럼 세상을 살면서 맛을 내는 사람이 되라는 거다. 사람이 포도주를 먹으면 기쁘듯이 변화된 자기로 인해 가는 곳마다 참 사는 맛을 내라는 거다. 말씀으로 변화가 되면 부지런해지고,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사랑을 베푸는 희생적인 사람이 된다. 이런 게 다 사람의 맛이다.
사람이 맛없는 사람도 있고, 고약한 사람도 있고, 고양이 같은 사람도 있고, 악어 같은 사람도 있고, 눈 흘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욕을 잘 하는 사람도 있고, 게을러서 꼭 갖다 줘야 먹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무슨 일을 하라는 거냐? 안 믿는 사람도 일을 하려면 밥을 먹고, 밥을 먹으니 일을 하고, 일을 하니 수입이 있다. 이렇게 해서 먹고 산다.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날마다 영의 양식을 먹고 자타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서 코에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 이 말이다. 인간 자기는 영육 결합체로서 영 주격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영이 성장을 해야 하는데, 육의 양식은 물질성으로 입으로 먹고 뒤로 빠지고,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받아서 영이 먹는다. 귀로 말씀을 먹고 영의 사람이 점점 자라면서 하루 이틀, 십 년 이십 년 계속 믿어가면서 새사람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성품의 말, 뜻, 활동이 드러나게 되니 참 맛을 내게 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데,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니 안식일을 지킨다면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을 만나면 구원의 말씀, 진리이치의 말씀, 하늘나라의 소식, 천국복음, 사람이 변화되는 말씀을 듣게 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나비의 애벌레는 배춧잎을 먹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과 성품이 점점 커져가는 거다. 이게 참 매력 있는 사람이다.
안 믿는 사람은 돈을 좋아하고 돈을 따라가다가 목숨을 빼앗기기도 한다. 믿는 우리들에게 이걸 보여주는 것은 ‘예수 믿는 너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바람을 따라 공중에 날아다니는 비닐봉지처럼 살다가는 이용당하고, 썩고, 죽고, 망한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거다.
사람이 맛없는 사람이 있고 맛있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를 믿어도 욕심은 많고, 심술스럽고, 게으르고, 움직일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만한데도 꼭 얻어먹으려고만 하고, 살살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맛이 없다. 예수를 믿는다면 물질을 초월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안 그러면 마냥 이용당한다. 사람이 순하더라도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가 없으면 마냥 이용을 당한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말해준다. 세상사람들은 죄만 짓지 맛이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은 부지런한 맛, 지혜로운 맛, 참신한 맛, 참 사람의 맛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 맛있는 사람이다. 예수 믿으면 예수의 맛이 나와야 한다. 말이나 행동이나 물질이나 시간 등 모든 면에서 예수의 맛이 나와야 한다. 예수의 향기가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고 찬송을 부르고 하는 것은 바꿔지려고 하는 거다. 참 사람이 되려는 거다.
예수님의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냈다. 생명을 살려내는 게 주님의 역사다. 영적인 생명을 살려내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죽어가는 거, 죽은 거, 병든 것을 살려낸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는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수십 년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의 부지런, 지혜, 성품, 마음으로 살아나지 못한다면 뭔가가 잘못된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만드셨으니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실 수 있는 건데, 우리들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은 영의 생명을 주격으로 살라는 거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살아생전에 세상의 어떤 바람이 불어도 속지 말고, 날아가지 말고 영적인 생명을 건강하게 성장시켜야 한다. 그런데 말씀을 못 먹으면 힘없고 맥없고 믿음생활을 하는 게 죽은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 다음에는 소경을 고치셨는데, 소경에는 육적인 소경과 영적인 소경이 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는데도 사물을 보지 못하면 육신의 소경이요, 눈을 뜨지 못해서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도 육신의 소경이다. 이런 육신의 소경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영적인 소경을 알라는 거다. 성경을 읽으면 구원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바리새교인들은 영적인 소경이라서 육신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소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소경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본다고 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성경을 읽지만 영적인 눈이 뜨여야 깨달을 수 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영적인 말씀을 들어야 영적인 눈이 뜨이는 거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자’ 라고 하는 설교를 들으면 영의 눈이 뜨이지도 않고 그 인격이 말씀으로 거듭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주일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이치를 캐야 한다.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거니’ 하고 들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 말세에는 거짓 종이 많다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말씀이고 천국복음이니 천국의 이해타산, 천국의 소망,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가르치셨지 언제 ‘내 이름으로 세상 것을 구하라’ 라고 하셨느냐?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자기 마음 속에 심령천국이 된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다스림이 되고 자기 마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가 된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어디서 이적 기사가 나타난다. 어디에서 안수해 준다’ 하는 것에 속지 말라는 거다. 이런 것은 말씀의 이치를 찾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천국의 이치가 들어 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진 사람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말씀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구별 분별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이해타산 평가성, 소원 목적을 항상 세상에 내리게 되고, 천국에 관한 이해타산을 따질 줄 모르게 된다.
잠:에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라고 했다. 교회에서 세상목적으로 가르치면 이 교회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물질봉사, 노력봉사, 시간봉사를 하라고 한다. 천 일 제단을 쌓는다고 하면서 매일 교회에 나올 때마다 헌금을 하라고 한다. 이런 것에 속으면 죽도록 일을 하고도 얻어맞는다. 이치적으로 보면 이건 믿음이 아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나 이해타산이나 가치판단 평가를 따질 줄 모른다면, 즉 영원히 가는 자기의 행복, 부요, 존귀영광, 기쁨을 모른다면 소경이다. 우리는 성령의 눈을 가져야지 성령의 눈이 없이 일반사람들의 가치판단을 가지면 소경이다.
본 설교.
3절: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절뚝발이.’ 다리 하나가 불구인 사람이다. 걷고 뛰고 할 때 자신은 물론이고 그걸 보는 사람도 보기가 불안하다. 사람이 한 쪽 다리에 힘을 줘서 걷다보면 몸 전체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성한 다리마저 무리가 가서 주저앉게 된다. 그래서 다리 한 쪽이 안 좋으면 성한 다리마저 망가지지 않게 하려면 보기 흉하다고 하지 말고 지팡이를 짚어라. 왜 자기 체면만 차리느냐?
사람이 사대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인 면에서 절뚝발이가 있는데, 무엇이 영적인 절뚝발이냐? 앞에서 말했듯이 절뚝발이는 걸을 때 불안하게 보인다. 그런 것처럼 몸은 건강한데 영의 눈으로 보면 불안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영적인 절뚝발이다. 깨닫는 면에 열심이 없는 사람은 참 불안하다. 세상에 이해타산을 두고 믿는 사람도 세상의 바람을 따라 날아갈 것이니 불안하다. 이런 사람은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려서 공중으로 올라가면 계속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게 아니라 언젠가 바람이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듯이 언젠가는 땅에 처박히게 된다.
자연법칙을 통해 영적인 면을 깨달으면 사람이 지혜로워진다. 바다의 어느 섬은 세계의 쓰레기가 다 모인다고 한다. 파도에 떠밀리는 것은 반드시 파도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 아무리 큰 고래라고 해도 파도가 칠 때 바닷가에 있으면 파도에 쓸려서 모래 위에 올려져 죽게 된다. 파도를 따라 놀다가는 이 모양이 된다.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거냐? 자기의 지능지수가 딱 그렇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면에서도 이걸 못 속인다. 믿는 자기의 지혜지식성 도덕성의 차원이 그만큼이면 그만큼 걸려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늘 불안하다. 그런데 본인은 당하기 전에는 자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른다. 이렇게 살다가는 언젠가는 내리꽂히게 되는데, 이러면 변명이 붙는다.
마귀가 인간 자기보다 영리한데 마귀의 졸병처럼 산다면 이런 자기의 수준이 안 내리꽂히겠느냐? 오늘을 사는 자체가 땅의 일이요, 내일을 사는 자체가 땅의 일이요, 생애 자체가 땅의 일인데 안 내리꽂히겠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라고 하는 거다. 말씀을 잘 깨닫고 하나님의 가치판단을 따라 살면 자기에게 그만큼 유익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 다음에 게으른 자가 불안하다. 사람이 게으르면 얼마 안 가서 주저앉게 되고, 얼마 안 가서 다른 사람이 너를 끌고 다닌다. 그 다음에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이 불안하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영의 말씀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주장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이러면 믿음의 길로 가기가 불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끌려 다닌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예배에 한 주일 나왔다 한 주일 까먹고 하는 식이면 불안하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혈기 마른사람.’ 몸이 자꾸 굳어져가고 말라간다. 영의 눈으로 보면 영의 생명이 점점 고갈되어 가는 사람이 있다. 이건 신앙적으로 생명적 기운이 없는 거다. 믿는 우리는 예수 믿는 기운이 펄펄해야 하겠는데, 말씀 깨달음이 펄펄해야 하겠는데 이게 아닌 분위기에 휩쓸려서 펄펄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이면 펄펄하고, 노느라고 펄펄하면 이건 영적 생명이 고갈되어 있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가면 기운이 솟는지 느낄 수 있다. 세상 것으로 인해서인지, 주님의 것으로 인해서인지 느낄 수 있다
영적 생명이 고갈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팍 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말라가기 때문에 자기가 잘 못 느낀다. 이걸 빨리 알아차려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먹지 않으면 결국은 기운을 못 쓰고 죽게 된다. 중생된 영은 죽지는 않으나 죽은 거와 같이 된다.
자기가 예수 믿는 쪽으로 살려면 어느 쪽의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자주해야 되겠느냐? 조금 있으면 명절인데 일은 여기서 하고 있지만 벌써 마음은 고향에 가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늘 하나님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면 믿는 쪽으로 살게 되는데, 그러나 자기의 깨달음이 부족하거나, 못 깨닫거나, 잘 모르면 마음과 정신이 자동적으로 세상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경은 아무 것도 모르니 오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항상 정지상태다. 절뚝발이는 다리가 아파서 오래 걷기가 힘들고, 혈기가 마른 사람은 몸이 말라 들어가니 기운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행각에 모여서 누워 있는데, 누워 있는 이들의 상태를 영의 눈으로 보면 요행을 바라는구나. 세상사람들은 요행을 바란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 하나님께 예쁘게 보여서 역사를 하시게 해야 한다.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각종 병자들이 행각 안에 누워 있는 이유는 천사가 내려와서 못의 물을 동하게 할 때 제일 먼저 이 물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거다.
이들은 하늘의 요행만 바라고 있다. 이들에게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 먼저 못에 들어간 자는 낫는다고 하더라’ 라고 하는 것을 복음처럼 여긴다. 이 때 당시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가 이미 한참이 되었는데, 이 병자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예수님께로 오지 않고 못가에 모여서 요행만 바라고 있다.
지금도 요행만 바라는 교회가 많은데, 요행을 바라보는 게 육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요 마귀가 넣은 생각들이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고 그 사람에게 역사를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신다.
이 연못은 깊지 않은 연못이다. 깊으면 사람이 빠져 죽을 텐데 몸이 불편한 병자가 이 못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는 걸 보면 깊은 연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연못은 간헐천 같다. 그래서 비가 오고 나서 빗물이 못의 바닥 위로 솟으면 못의 물이 동하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천사가 그렇게 한다고 한 것 같다.
이건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되는 거다.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영으로 되어지는 게 아니라 육에 속하는 거다. 그래서 요행을 바라는 것은 복음의 생각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도 부흥집회에 가면 요행을 바라면서 난리를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자가 낫는다고 하는 것은 선착순이라는 말이다. 물이 동할 때 들어간다는 것은 그 분위기에 확 휩싸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만 병이 낫는다고 하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병을 고쳐준다는 집회를 열어서 병자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놓고 이 사람의 병이 안 나으면 ‘네가 믿음이 없어서 안 나았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그리고 이 베데스다 연못은 넓은 연못이 아닌 듯하다. 넓다면 동시에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선착순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못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이 왜 나왔을까? 한국에도 유황 온천, 마그네슘 온천, 탄산 온천, 염분 온천 등등이 많은데, 이런 곳에 가서 목욕을 하고서 병이 나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 못도 질병이 치료가 되는 온천일 수도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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