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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04 추천 수 0 2023.04.16 10:20:47
.........
성경본문 : 눅17:1-10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7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6: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데 누구 밭에든, 마음 밭에든 심겨져서 자라게 되면 큰 나무가 되어 모든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 삶의 자리를 찾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한 알 속에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성장적 생명이 들어있다. 그 생명은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생명적 능력이다. 그러니까 씨가 크던 작던 뭐가 중요하냐? 씨 속의 생명이다. 생명이면서 그 생명이 큰 나무로 될 수 있는 씨라야 한다.

 

여기에는 지극히 작은 겨자씨인데, 이 겨자씨는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성장적 생명적 능력이 그 안에 들어있다. 씨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씨를 가져갈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이 씨를 분별을 잘 못하면 농사를 망친다. 우리가 씨를 잘못 사면 농사를 망쳐버린다. 그런데 어떤 씨는 자라나서 맛이 있는 채소가 있고, 맛이 없는 채소가 있다. 우리가 신앙 면에 생각을 두고 깨달을 것이 많다.

 

씨를 잘못 사면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일 년 농사를 망친다. 씨 하나를 심어도 엄청나게 불어날 것인데 이게 다 없어졌으니 이중삼중으로 손해다. 그런 것처럼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한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싸우고 마음이 상해서 그 교회에서 나오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교회에 정착을 하는데, 그런 정도로 말고 정말 하나님 앞에 최고의 옳은 것으로, 신앙사상도 진리에 적중성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교인들이 진리본질의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적중성, 이걸 소원한다. 거기에 또 모든 이치가 맞아 들어가야 한다. 이치가 안 맞으면 모든 면에서 적중성이 안 된다. 적중성이 돼야 개개인마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들어간다. 난 그런 걸 원한다. 교인들마다 그런 신앙이 되길 원한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신앙을 원한다. 그래야 이룰구원에 자기의 노력대로의 격차가 들어가는 거다. 안 그러면 인도자로서 큰 책임이다.

 

그런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했으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는 믿음도 있는 모양이다. 지극히 작은 믿음 그것도 없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순종하였을 것이다.’ 왜 또 뽕나무냐? 뽕나무는 뿌리가 깊이 박힌다.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당신의 의사대로 적중시켜서 당신의 본질대로 우리를 모든 성품적으로 만들어 내는데, 이 일을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달라붙어서 역사를 해도 쉽게 만들어지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그렇게 애를 썼는데 얼마나 만들어졌느냐하는 그 면에 대한 심판이 있는 거다. 이 심판이 없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역사를 안 한다.

 

뽕나무 뿌리는 노랗다. 뿌리가 날카롭고 뻣뻣하다. 그런데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했는데 왜 하필이면 바다냐? 바다와 뽕나무 뿌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바다에 던져지면 그 뽕나무가 어떻게 되느냐? 그냥 죽는 것이냐? 죽기는 죽는데 어떻게 죽는 거냐? 바닷물에 절여진다. 기독자들이 소금에 절여지듯이 복음에 절여져야 하는데 복음에 그만큼 안 절여졌으면 사람이 맛이 없다. 일반사람들은 일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맞으면 사귀고 하는 거지만 진리의 사람들은 사람이 진리로 절여지지 않으면 대화의 맛이 안 난다. 대화의 맛이 나는 사람이 있고, 안 나는 사람이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할 때 무슨 맛을 내라는 것이냐? 사람이니까 적절한 맛을 내라는 것이다. 대화에서, 행동에서, 모든 지혜나 도덕성적인 면에서 적절하게 맛을 내라 그 말이다. 소금이라야 그 맛을 낸다.

 

맛을 내는 데는 적당히이지만 안 썩게 하려면 소금 속에 파묻어야 한다. 쇠를 소금 속에 파묻으면 그 쇠는 삭는다. 쇠가 아무리 강해도 소금은 그 쇠를 녹인다. 인간 보기에, 자기 성격 성질에 , 못 하겠다하는 거지만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이시라. 못하시는 게 없다.

 

뽕나무 뿌리가 지독히 잘 안 뽑힌다. 그러나 뽑혀서 바다에 던져지면 바다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고 그 소금물에 절여서 죽는다. 아무리 독한 뿌리라도 그렇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요술이나 마술을 하는 사람들처럼 남의 뽕나무 밭에 가서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하며 능력을 과시해 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걸 알아보려고 남의 밭의 뽕나무에게 가서 뽑혀서 바다에 심겨봐라하라는 게 아니다. 이치를 말씀하기 위해 하시는 말씀이다.

 

믿음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는 건데, 그러나 저러나 믿음이 뭐냐? 기독교인들이 구원, 믿음, 소망, 진리, 사랑등을 많이 말을 하는데 믿음이 뭐냐? 믿음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것이냐? 믿음이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이니까 없는 것이냐? ‘믿음 믿음하면 그냥 믿음이 생기는 것이냐? 믿음이 어떻게 생겼느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생긴다.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이치로 되는 모든 지혜지식이 자기 속에 들어와야 그 다음에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믿어지니 그게 실력화 되면서 쓰여지고. 이게 다 믿음이다.

 

그러니까 먼저 자기의 모든 믿음은 하늘로부터 온 것. 주님이 와야 내가 믿고, 하늘로부터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내가 그 말씀을 받아서 감화 감동이 되고, 그러면 그 하늘의 것과 질이 같아진다. 그 주님의 것을 가지고 미래적으로나 현재에서 써먹고 바라보고 나가는 게 믿음이다.

 

이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말하는 거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 속의 눈에 안 보이는 하늘의 도로 그 사람을 움직이는 그것이 힘이 돼서 그것을 붙들고 살고, 그것이 자체화 되고, 그 사람이 되고 한 이게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할 때 하늘의 것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 하늘의 것을 진리이치로 갖고 있느냐? 지식성적으로 도덕성적으로 능력성적으로 하늘의 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늘의 것으로 성품화 됐느냐? 그게 믿음이고, 믿음의 사람이고, 그걸 써먹으면 믿음을 써먹는 거다. 그런데 수십 년을 믿었어도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신앙의 성품성이 믿음이 아니다. 일반 도덕성에 불과하다. 가치판단 말하는 것이 일반 도덕성이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세상에서 안 믿는 이방인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뭘 부탁한다든지, 부탁한대로 들어줄 것을 믿는다든지, 약속을 믿어주는 걸 믿음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다. 주님의 것이 들어오고, 들어오면 그게 옳고, 그게 약속이고, 그게 내 능력이고, 그게 내 실력이고, 그게 내 존귀 영광성이 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세상에서 써먹는다. 그게 믿음을 써먹는 사람이다. 그렇게 써먹을수록 그 사람은 자꾸 커진다. 써먹을수록 자꾸 커진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자꾸 커진다.

 

자기 믿음은 커져야 한다. 자꾸 성장이 돼야 한다. 성장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라. 장성하라. 커야 된다. 성장이 돼야 한다. 충만이 돼야 한다. 안 되면 안 된다.

 

믿음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건 하나님의 역사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뿌리박혀 있던 불신이 뽑혀져 나간다. 진리이치의 말씀을 들을 때 처음엔 잘 못 알아듣지만 듣다가 보면 자기 속에 한 가닥 빛이 비췬다. 그러면 자꾸 분별이 들어간다. 그러면 이게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인지, 없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처리를 한다. 없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어봐야 본인이 손해다. 본인이 어두워진다.

 

내가 믿음이 있느냐? 불신은 없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 속에서 그 분의 인격을 믿느냐? 믿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영접이 된다. 아버지를 믿으면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믿는다. 안 믿으면 그 말씀을 안 받아들인다. 그러니 예수님을 수 년 수십 년을 믿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말을 못하는구나. 아버지의 뜻이 안 나오는구나. 성경은 전부가 아버지의 뜻인데, 하늘의 뜻인데 그게 안 나오는구나. 이러면 , 이거 안 믿었구나그렇게 들어간다. 이유는 없다.

 

우리 속에 불신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서 믿음을 더하소서하면 그게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불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을 더하소서하면 더해지겠느냐, 안 더해지겠느냐? 불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만능의 능력을 주옵소서하면 합당한 거냐?

 

형제가 너에게 여러 번 죄를 짓고 너에게 와서 회개했다고 할 적마다 다 용서해 줘라.’ 여기서 무슨 문제가 없는 것이냐? 자꾸 죄를 짓고 와서 용서해 다오하면 용서해 줄게날마다 이런다면 무슨 문제가 없는 것이냐? 여러 번 자꾸 죄를 짓는 사람, 또 여러 번 죄를 자꾸 용서해 주는 사람. 서로가 문제가 없는 것이냐?

 

뭐가 문제일까? 문제는 있다.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잘 생각을 해 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잘 생각을 해야 한다. 그냥 예수 믿어 복 받읍시다하면 그건 안 들어도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생각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궁금한 사람은 자꾸 생각을 하게 되고, 옳은 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자꾸 연구를 하게 된다.

 

7-10: 알곡을 추수하기 위해서 불볕에 논밭에서 하루 종일 김을 매고 갈고 하면 얼마나 고달프고 피곤할까? 또 양이 병이 들지 않게 하려고, 건강하게 키우려고 푸른 초장과 냇물을 찾아서 하루 온 종일 양들을 보살피는 목자가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플까?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고 돌아온 종들에게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라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 그러니 피곤하니까 씻는 건 나중에 씻고 우선 앉아서 먹으라이게 안 되는 거냐? 그런데 그렇게 할 자가 있겠느냐했으니 들리기가 고약하게 들린다. 주인이 사랑이 없거나, 종에게 고약하게 대하는 것은 아닌가? 믿음의 사람은 남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을 생각하지 못하면 그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은 상황 따라 사람에 따라 관계성이 바로 돼 들어간다.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과 관계가 안 되고 자기 욕심만 부린다. 그런데 주인이 꼭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와서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겠느냐.’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다가 ,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와서 앉아서 먹어라하겠습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본인들은 어떠냐? 다른 사람은 그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인의 입장에서 종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라도 자기 종이니까 와서 앉아서 먹어라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8절을 보면 종이 피곤하겠다.

 

9절에 보면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종이 밭에서 돌아왔지만 주인이 먹고 마실 때까지 띠를 띠고 수종을 들고 있다가 주인이 다 먹고 나면 종 네가 앉아서 먹어라 해서 명한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사례를 하겠느냐했다. 쉬라고 하지도 않고, 주인이 먹을 동안에 물 가져와라. 국 가져와라하는 심부름을 시켜놓고 내가 다 먹은 다음에 너도 먹어라.’ 이런 주인집에서 일할 마음이 있느냐?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냥 말하기는 쉽다. 왜 그러실까? 그러니 내가 볼 때는 종의 마음속에서 주인을 상당히 좋지 않게 생각하는 뭐가 부글부글 끓을 것 같다.

 

이 말씀은 종의 기본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거다. 우리 참 기독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이지만 이방세상에서는 이 말은 안 통한다. 근접된 말을 하자면, 예를 들어서 하나님 앞에 충성봉사 물질봉사 시간봉사 노력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런 사람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말을 해 주니 충성봉사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충성봉사를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잘 봐주시겠지하는 느낌.

 

하나님 앞에서 모든 봉사심은 뭘 어떻게 하건 은혜를 받은 데서 나와야 그게 정답이다. 받은 데서 나와야 은혜 위에 은혜가 자꾸 되는 거지 안 받은 데서 나오게 되면 인간 보기에 어딘지 모르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또한 바리새교인들처럼 외식성향이 있다. 해 놓고서는 안 알아주나. 칭찬을 안 해 주나하는 건 금물이다. 잘못된 마음이다.

 

예수님은 영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말씀을 주셨고, 성령으로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하셨고, 신령천국에 데리고 가서는 그 신령천국에서 영원토록 누리게 하신다. 이 은혜는 우리의 온 몸이 입이라 할지라도 그 감사를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거다. 우리의 몸도 당신의 피로 사셨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의 봉사심을 받아주심은 나에게 은혜를 더 주시려는 허락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는 내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사오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것도 드리게 저것도 드리게 허락을 해 주옵소서이렇게 들어있는 봉사심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닌 그 마음이 수은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 교만으로 들어간다. 이러면 은혜를 못 받는다. 시험에 들어간다.

 

시험은 알면서 드는 게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의 이치가 아닌 생각으로 쓱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게 시험에 든다. 충성봉사를 많이 했는데 시험에 들어가면 목사나 장로나 권사에게 슬며시 미움의 화살이 돌아간다. 남 쪽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분쟁을 일으키고 떨어져 나가거나 한다. ‘교회가 여기밖에 없나하는 식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의 신앙 믿음이 질적으로 바로 들어서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 할지, 아니면 그 길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시험을 타는 게 갑자기 크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생각이 약간 비뚤어지면 마치 얼음판이 약간 기울어지면 안 미끄러질 수가 없으니 한 번 미끄러지면 저 쪽으로 가서 나가떨어지고 바로 서지를 못하는 그런 것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의 몸까지 당신 것인데, 주님은 구원 얻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어서 각자의 우리 몸과 정신과 마음을 보살피려고 하시는데 인간은 자기 주관성에게 그걸 자꾸 안 받는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다. 예수를 바로만 믿으면 참 편하겠는데 꼭 한 번씩 하나님께서 손을 봐야 한다면 그 참......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은 내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받은 마음에서 감히 예수님의 구원운동에 수종들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자원적으로 자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돼야 충성을 하는 내 마음도 기쁜 거다. 이게 하나님 앞에 봉사요 수종을 드는 것이다.

 

나의 충성을 허락을 해 주시고, 또 은혜 위에 은혜를 또 주셨으니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고 대우를 하신들 그거는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내 쪽에서는 불평불만 낼 게 아무 것도 없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다 은혜를 받고 산 것이니까. 아닌 말로 자기를 인간이 아닌 개미나 송충이로 만들었다면 어쩔 것이냐?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신데 그럴 능력이 없는 거냐? 사람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냐?

 

그 다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는 것. 그 다음에 이 세상을 훈련장소로 만들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능의 실력을 닦아서 신령천국에서 일인자로, 존귀 영광자로 그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 그러니 이중삼중으로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이냐? 그러니까 본문의 종처럼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나이다하게 되는 거다. 말하자면 기뻐서 좋아서 내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하게 되는 거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도 남이 하라. 마라할 것 없이 자기가 스스로 나서서 자원적으로 국가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친다. 그게 애국자다. 그 나라의 백성이고, 국민을 그만큼 사랑한다면 그런 게 자원적으로 기뻐서 나오는 거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으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사람의 은혜도 알고, 말하자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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