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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히브리서 배장섭 목사............... 조회 수 228 추천 수 0 2023.04.24 21:30:21
.........
성경본문 : 히10:19-25 
설교자 : 배장섭 목사 
참고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본문말씀 히브리서 10장 19-25절

 

 1. 서론 

 제가 늘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하다보니 때로는 그것이 식상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한 번 보세요. 

 요사이 전세 사기 때문에 피눈물 흘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에 할머니에게 당하신 어떤 분은 ‘할머니가 그렇게 사기 칠 줄은 몰랐다. 하기야 할머니도 사기 칠 수 있지 뭐’라며 자책하는 것도 봤는데, 그런가 하면 적그리스도 JMS 정명석 신도 중에 자기 딸이 그에게 성추행 당하는 것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조차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나 어쨌다나? 미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비단 JMS 정명석에게 속은 사람들만 그런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거짓 복음에 속아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는데, 그런 거짓 선지자에게 속아 미친 사람들처럼 좋아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히브리서 6장 1-2절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라고 할 수 있는 구원론 정도는 바로 알고 믿어야 되는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하므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2. 본론

 

 22절 말씀을 다시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은 이미 지난 시간에 생각해 봤기 때문에 접어 두고 그 다음 말씀에 보면 그냥 무조건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권고하신 것이 아니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권고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성도와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성도와 바른 관계를 유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지 못하면 그것은 말장도로묵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지 않고 성도와의 관계를 바로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22-23절에서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바른 자세에 대하여 진술한 연후에 그 다음 24-25절에서 성도와의 바른 관계에 대하여 진술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즉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등위접속사로 연결된 것처럼 번역했지만 원문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안에’라는 ‘엔’이라는 전치사와 함께 썼고, ‘온전한’이 ‘믿음’을 수식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믿음이 소유격으로 “온전한”을 수식했는데, 이 ‘온전한’이라는 말은 “플레로포리아”라고 해서 “전적인 확신, 가장 확실한 신뢰”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을 “안에”라는 ‘엔’이라는 전치사와 함께 썼기 때문에 “믿음(의)에 대한 전적인 확신 안에서 참 마음으로(과 함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한 번역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냥 ‘전적인 확신’이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확신’이라고 말씀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믿음에 대한 전적인 확신 안에서”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중요한 것은 사실 ‘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참 마음’이란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느냐 하면 새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로 세례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새 언약의 ‘믿음의 의’에 대한 신앙고백인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로마서 10장 9절 말씀을 좇아 세례를 받아야 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다음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덧붙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한 마디로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강요나 억지나 가식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닌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이어야 하는 것처럼 참 마음이란 어떤 가식이나 욕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정말 순수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된다는 뜻이지만 솔직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유대교보다 기독교가 훨씬 많다보니 어떻게 보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우선 그런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틀림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 되는데, 예수님이 모세와 같이 그렇게 힘과 능력으로 로마를 격파하고 자유케 해 주신 것도 아니고 오히려 힘없이 그들의 손에 붙잡혀 그렇게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셨으니 그런 예수님을 무조건 메시아라고 믿어야 된다고 하면 과연 그 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백번 천번 돌 맞아 죽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지금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이고, 또한 바울 역시 그렇게 중요한 새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믿음의 의’가 무엇인가를 곧 바로 처음부터 진술하지 않고 먼저 앞에서 그렇게 주구장창 힘들게 설명한 이유가 바로 그렇게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봤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여호와의 참 신 증명’ 그것도 그냥 단순히 신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약속에 신실하신 믿을 수 있는 의로우신 신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의심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좇아 살아갈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메시아 관련 예언 성취에 근거하여 증명하여 보여 주신 십자가 사건을 먼저 진술한 연후에 비로소 새 언약에 필요한 ‘믿음의 의’를 로마서 10장 9절에서 진술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의)에 대한 전적인 확신 안에서 참 마음으로(과 함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신칭의에서 말하는 그런 믿음의 의미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신칭의는 율법을 좇아 사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인 율법주의기 때문에 순종과 행함을 철저히 부정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이지만 지금 이 말씀에 보면 흔히 그렇게 율법주의라고 정죄했던 그 할례가 바로 흔히 이신칭의라고 생각하는 “믿음의 의”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믿으로 된 의’를 ‘인쳤다’, 즉 ‘인쳤다’는 말은 ‘스프라기스’라고 해서 계약이나 언약을 체결할 때 동의하는 뜻으로 도장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성경이 틀렸을까요?^^ 이신칭의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신칭의가 잘못된 것이지요. 왜?

 로마서 4장 11절에서 그렇게 말해 놓고 그 다음 로마서 4장 17-22절에 보면 흔히 이신칭의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서 진술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배경은 흔히 생각하는 창세기 15장 6절 말씀도 아니고 할례 언약을 요구하신 창세기 17장도 아닌 더 이상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겠다’는 창세기 18장 사건 이후의 삶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여러분 도대체 믿음이 무슨 뜻입니까? 단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니면 단지 약속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까? 내가 누구를 향하여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어떤 경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약속한 바나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고 그 직임을 성실하게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그 언약의 약속을 좇아 이행했을 때 그것을 가리켜 ‘믿음의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는 율법에서 명하신 그 법을 구체적으로 지키는 것을 ‘율법의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까?  

 물론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구분하다보니 좀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모세의 시내산 율법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과 맺는 율법 언약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은 창세기 17장에서 기록한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새 언약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의 의’입니다.

 물론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했던 옛 언약은 이제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사실을 유대인들이 주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어쩔 수 없이 곧 바로 새 언약의 ‘믿음의 의’를 말하지 않고 왜 옛 언약이 무용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새 언약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먼저 설명한 연후에 새 언약의 ‘믿음의 의’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여기서 말씀하신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절대로 변개하심이 없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는 약속에 신실하시는 믿을 수 있는 신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칼빈은 이신칭의라고 생각하다보니 기독교강요에 보면 ‘적은 믿음도 믿음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출애굽 사건을 놓고 보면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 가지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힘들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절대 다수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가야만 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도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고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불굴의 신앙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 

 그 이유는 인생의 모든 행복과 불행이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1장 18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고 만들어 낸 모든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데, 마태복음 6장 2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30절에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님을 믿어도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여전히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불평, 불만을 갖게 되고, 온갖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성도와의 관계도 결코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식을 가나안 땅에 도착한 즉시 주시지 않고 그로부터 무려 25여년 지난 더 이상 자신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된 이후에 비로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18장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개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믿겨지도록 돕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입니까? 성공입니까? 부귀영화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까?

 

 3. 결론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요. 어떤 분들은 성경에 기록한 놀라운 이적과 기사들을 믿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2장 27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이것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그것은 인과의 법칙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바로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는 수없이 다루었기 때문에 접어 두고 이 원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것에 비하면 성경에 나오는 이적과 기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정도도 못하는 신을 믿어 뭐하겠습니까? 

 사단은 어떻게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어도 그런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안달이 났는데,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어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온갖 염려, 근심, 걱정과 불안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단의 속임수에 속지 마시고,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권고하신 것처럼 나를 위하여 그 귀하신 독생자 아들까지 선뜻 내 주시면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하실 정도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아 감사하시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하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것조차도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맡길 때 최상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고 어떤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절대로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고 오히려 나에게 행하실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며 사는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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