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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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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7장 16절-19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6절-17절: 열 명 중 자기를 살핀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사례를 했다. 자기를 살핀 사마리아 사람. 자기를 살피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를 살피지 못하면 남만 자꾸 말하게 되고, 손가락질 하게 되고, 자기가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보는 기준이 틀려있는데도 자기의 그 기준으로 세상 모든 만물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하게 된다.
문둥병자가 자기를 살피니 나은 것이다. 문둥병자가 나은 이것은 깨끗케 된 거, 거룩하게 된 거, 온전케 된 거, 말씀대로 된 거,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된 거, 말씀을 하시니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사람으로 질적으로 된 거. 그 말 한 마디 속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
예수를 믿어도 교회만 들락날락 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가지고 심중에 새기며 자기를 살피는 사람은 다르다. 교회만 들락날락 하는 사람은 신28:처럼 자기를 살피지 않고 자꾸 몸 밖의 것이 잘 되는 것만 생각을 했지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가 ‘질적 면에 잘된 거냐, 잘못된 거냐’ 그 면을 못 본다. 이게 거짓된 신앙이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우리 입장에서 보면 세상을 강조하는 세상적인 교회에 다니면서 ‘축복 축복’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축복 이전에 그 사람이 이미 하나님 앞에 이질적인 세상 넓은 길로 잘못 가고 있는 신앙사상이다. 많은 교인들이 여기에 속고 있다.
우리가 신28:의 말씀대로 되는 걸 믿느냐? 믿는 자는 자기 신앙을 살펴야 하는 건데, 하루 세 끼 먹고 이방 불신자처럼 별로 어려움 없이 사니까 자기를 살피지 못한 생태에서 그냥 그렇게 교회 다니고 무난하게 사는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질적으로 잘못 들어간 신앙이다. 딴 길로 들어간 거다. 신명기를 읽으면서 질을 생각하며 보면 틀림이 없다.
‘아홉은 어디 갔느냐?’ 아홉은 자기가 어려울 때, 고통스러울 때는 부르짖더니 고침을 받으니, 나음을 받으니, 형편이 나아지니 하나님께 영광이고 뭐고, 예수고 뭐고 간에 다 집어던졌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인데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가다가 나음을 받았다면 예수님께 증거를 해야지. 이게 간증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간증은 간증이 아니다. 사람 바로 된 걸 간증이다. 육신의 병이 낫고 부자 되고 하는 건 간증이 아니다. 미련하고 둔탁한 자기가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는 예수님의 나에게 향한 약속이 이루어지는구나. 이게 간증이다. 그 외의 몸 밖의 것은 말할 필요 없이 따라오는 거다. 따라오는 것을 미리 앞서서 말을 해버리면 순서가 틀려진다.
자기가 예수 믿고 하나님께 대한 진리이치의 깨달음,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의 깨달음이 있다면 이걸 감사해야 한다. ‘감사’ 하면 자꾸 물질을 생각하지만 감사한 사람은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도 내놓는다. 그러면 이 말이 생명은 안 내놓고 물질만 내놓으면 덜 감사한 사람이라는 뜻이냐? 그게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은 물질이고 뭐고 그걸 따지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변함없이 자기 자체화 실상화 말씀의 인격화 성품화 시키며 사는 자가 바로 된 신앙이요 감사하는 사람의 신앙정신이라는 말이다.
물질적 개념으로 들어가 있어서 장사가 안 되던 것이 잘 되면 ‘아이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헌금을 하고 그러는 교인이 많다. 어느 장로가 식당을 하는데 의례히 식당 벽에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하는 걸 붙여 놨다. 그걸 보면 ‘아,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하게 된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느냐’ 하고 물어봤더니 안 지킨단다. 그러면서 주일날 장사해서 번 돈으로 십일조를 낼 텐데, 그 돈을 십일조로 낸다면 그 교회 목사의 신앙심이 의심스럽다. 신앙정조 팔아먹고,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딸이 세상에 나가서 몸 팔아서 번 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하는 식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어떤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지 자기 신앙의 질을 확인해야 한다. 교회에 나가고 있으면 그 교회의 신앙의 질이, 목사님의 신앙의 질이 어디로 나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말씀 속에는 사상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설교말씀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학인을 해야 한다. 세상 넓은 길로 가는 게 보이면 도망가야 한다. 그래야 네가 산다.
우리가 시골에서 곡식이 나는 걸 보면 곡식이 자랐다 하면 알곡으로 여물어야 한다. 빈껍데기이면 그냥 쓰레기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 하면 예수님의 사람으로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알맹이로 깡깡하게 날마다 들어가야 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입으로만 달달 외우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걸 외우면 믿음이 좋은 거냐? 사람이 안 되면 껍데기다. 껍데기인지 아닌지는 타작을 하면 나온다.
자기의 신앙 믿음을 본질에 입각해서 확인해 봐야 한다. 본질을 모르면 확인할 길이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서 자기의 신앙이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건지? 여기서 예수 믿는 효력이 나는 거다. 자기 관찰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못 올린다. 안 된다. 자기가 온전케 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느냐? 그건 안 된다.
아홉은 안 돌아왔는데 상상을 해 보면 그들이 또 문둥병이 안 걸렸을까? 사마리아 사람은 그 아홉을 따라가지 않았다. 같이 가다가 자기를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아홉은 제사장에게 자기의 몸을 보여주러 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 왜 문둥병자들에게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이냐? 제사장은 전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로 수종드는 사람이다. 제사장이 번제단에서 양 잡고, 송아지 잡고, 잡아매서 죽이고, 속의 똥집 오줌통을 다 낱낱이 분해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불에 태울 것은 태우고서 들어간다.
제사장이 하는 그 일이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예수님이 너희들을 향해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지으심 속에는 이치와 법칙이 들어있다. 일반적으로는 과학적인 법칙이라고 하지만 이건 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피부가 이상합니다. 붉어집니다’ 하면 제사장이 살펴보고 그게 문둥병인지 아닌지를 선언을 한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100% 온전, 100% 완전을 기준으로 볼 때 ‘흉이다. 허물이다. 병이다. 꼬부라졌다’ 이게 다 나오는 거다. 이걸 계시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사장 중에 제사장인데, 열 명이 말씀에 순종해서 가다가 나았는데 아홉은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러 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지만 갔다고 한다면 제사장이 그들의 몸을 보고 문둥병이 나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나았느냐’ 하면 ‘예수란 분이 낫게 했습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큰 대제사장, 대제사장 중에 대제사장, 원 대제사장인 예수님께로 왔다.
예수님께 온 사마리아인을 보고 ‘아홉은 어디로 갔느냐’ 하는 걸 보니 당시 유대인의 대제사장이 신앙이 개떡 같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로마를 섬기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신앙의 질을 깨닫게 해 준다.
이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아홉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홉 사람들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다 같이 유대인들인데, 이들이 다 같이 길을 가다가 유대인 아홉 명도 말씀을 받고 다 같이 깨끗하게 나았으니까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 사마리아인과 똑같은 걸로 알고 사마리아인에게 개 같은 신앙이라고 핍박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도 의심스럽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교인들은 자기를 살필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형벌 받을 짓만 골라서 한다. 그러나 자기를 살피면 칭찬 받을 것이 누구에게만 있고? 남에게만 있고. 자기가 아홉 가지를 다 잘 했어도 한 가지를 잘못했으면 잘못한 그 한 가지를 고치려 하고, 자기 한 가지 잘못한 것을 다른 사람은 잘 할 수도 있으니까. 또한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계하고, 잘 하고 있으면 본받고. 그래야 사람이 화통하다.
18절-19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문둥병에 걸렸던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믿음은 언제부터 생겼느냐? 오늘날 자기의 믿음은 언제부터 생겼느냐? 교회에 다니는 날부터 생겼느냐? 날 때부터 생겼느냐? 그래서 모태신앙이라고 하느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 말씀이 있다. 이건 교회에 다닌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듣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날이 갈수록 자꾸 깨달음이 커진다. 그게 믿음이 자꾸 커지는 거다. 수 년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맨날 교회에서 복 달라 하고 부자 되라 한다면 그건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불에 안 타진다. 불에 타질 것을 가지고 ‘이뤄놨다네. 그러니 저 사람 믿음이 좋다’ 그렇게 판단하는 게 아니다.
믿음이 곡식 속에, 돈 속에, 일 속에 들어가는 거냐, 믿음은 사람 속에서 역사가 되는 것이냐? 믿음을 자꾸 딴 걸 쳐다보면서 ‘저걸 이뤄야 믿음이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게 없으면 자기는 믿음이 아닌 게 되는 거다.
자기 앞에 누가 있느냐? 자기가 뭘 바라보고 가는 것이냐?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다. 바라만 보고 가만있으면 되는 거냐? 간다는 그 말은 그 분의 것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 분의 것을 받고 그 분처럼 돼 간다는 것이다. 학교선생의 말씀을 잘 들으면 선생과 같은 실력이 돼 들어간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마리아인은 그 말씀을 붙잡고 가라고 하시는 제사장을 목표로 하여 자기 몸을 보이려고 가다가 나았다. 말씀을 붙잡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려고 가다가 나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 ‘예’ 하고 일단은 떠났는데, 떠난 후에 신난다고 제 멋대로 산 거냐, 산으로 들로 양떼를 끌고 사는 그것이 계속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그 사상으로 살고 있는 것이냐?
사람은 마음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게 있다. 마음작용 정신작용이 있는 거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그 말씀을 붙잡고 계속 날마다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뜻을 몰라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그 사상이 아니라 인정정실이 끼어서 그것 때문에 바른 길을 못 간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겠느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말씀인데.
가다가 나았으면 말씀하신 그 분을 찾아와야지, 예수님이 구원자였으니까 그 분을 찾아와야지. 그러나 구원을 모르면 하나님께 영광도 모르는 거다.
구원이 뭐냐? 뭐가 구원이냐? ‘구원 받았다’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지면 사람을 물속에서 구원해 낸 것이다. 사람을 구원해 내면 건짐을 받은 그 사람이 살아생전 세상에 많은 업적도 남길 수 있다. 이건 쉬운 예이고, ‘예수 믿어 구원 받았다’ 하는 건 ‘교회에 들어갔다’ 그게 아니고, ‘죽어서 천국 간다’ 그런 차원이 아니고 ‘예수 믿어 구원’ 할 때 뭘 믿은 거냐? 예수=구원,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속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의 이치, 예수님의 속에 들어있는 하늘나라의 정신, 하늘나라의 그 속성 인격 성품 능력,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와야 구원이다. 그것을 내가 받았다는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것을 받아야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게 있어야 감사가 들어가는 것이다. 받은 것이 없다면 뭐가 감사하냐?
예수님의 것은 구원이 아닌 게 없다. 성경에서 바로 깨달아지는 것은 구원이 아닌 게 없다. ‘지옥에서 천국’ 그렇게만 보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잘 믿던 못 믿던 이미 천국은 따놓고 들어가는 거다. 예수를 믿었다면 이제는 예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로 풍성한 장성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게 없다면 수십 년을 믿어도 그 믿음은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이 안 된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을 모르면, 말씀을 붙잡지 못하면 수십 년을 믿어도 그 속에서 자기 성장, 자기 깨끗, 영능의 실력은 없다. 우리교회에서는 그게 있어야 한다.
맨날 ‘예수 잘 믿어 부자’ 이러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예를 들면 학생이 수학공식을 알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력이 들어가는 거다. 그러나 공식을 모르면 어떻게 풀겠느냐? 그러니까 아무리 배워도 네 실력은 안 된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순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된 하나님과 의사단일의 그 질은 하나님의 본질과 똑같다. 따라서 행동이나 수단 방법을 가지려는 것보다 하나님의 질을 바로 가지면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고, 도덕성이 나오고, 능력성이 나오니 이렇게 되면 그 때 그 때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르게 써먹게 된다. 그게 자기의 이룰구원의 실력이 되는 거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영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요, ‘영광’이라 할 때는 사람과 관계가 되는 거지 집을 하나 지어놓고 ‘영광받으시옵소서’ 하는 건 영광이 아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척도대로 지은 그 성전을 보고 계시를 알아야 영광이 되는 거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설계대로 성전을 지어놨지만 나중에 우상을 섬기는 여자를 데려다가 어떻게 되었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설계대로 들어간 게 아니라 사람이 망가지니 집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건 영광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영광을 돌리게 되고, 또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 역시 구원을 아는 사람이요, 주님을 아는 사람이요, 주님을 바로 찾은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인지, 거짓된 믿음인지 그걸 주님의 본질로부터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검증을 받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에서 자기 믿음이 거짓인지, 바른 건지 이치적으로 금방 드러난다.
참 믿음은 진리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향해 갈 때 자기의 속성이 인격과 성품이 고쳐지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 참 영광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자기 속이 만들어지는 것이 참 영광이다. 그런 사람은 참 고상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을 복된 사람이라고 하는 거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주님께로 와서 사례를 한다는 것. 이게 아닌 채 행동 활동으로 좋게 보이고 옳게 보이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고 거짓된 믿음일 가능성이 많다.
자기의 모습을 보고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하느냐? 말씀 깨달음 속에 자기가 보여지고 ‘아, 이거 잘못된 나였구나. 이거 고쳐야지’ 하면서 고쳐달라고 하고, 더 많이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해야 한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많은 사람이 한 가지씩만 죄를 지어도 엄청난 건데, 자기 속에 그런 마음적 정신적 요소가 다 들어있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 희한한 발상들이 나타나는 거다. 우리는 그걸 고쳐달라고 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게 안 나타나고 있으니까 자기 속에 어떤 것이 잠재해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사건이 오면 팍 튀어나온다. 그건 참 자기가 아니다. 사람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안 본다. 그런 요소가 자기 속에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자기를 잘 살펴라. 진리이치의 말씀의 깨달음을 가지고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문둥병이란 사람의 골각이 다 변형이 된다. 뼈도 녹아들어간다. 사람이 괴물처럼 된다. 사람의 본 얼굴이 아니다. 감각성이나 모양새가 흉측스럽고, 활동을 할 수도 없고, 사람 가운데 살 수도 없다. 남이 볼 때는 사대육신이 건강해도, 얼굴이 반듯해도 속에 들어있는 영적 감각성적인 면에서 문둥이가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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