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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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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용은 실존의 동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는데 성경에, 특히 계:에서 용이라고 하는 명칭이 많이 나온다. 없는 존재인데 성경에 기록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용이 실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면 용이 뭐냐? 없으면 무요, 허망한 것이요, 잡으려고 해도 안 잡히는 것이요, 눈앞에 어른거리기만 하는 것이요, 성령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로 착각하게 하는 거다. 즉 사람의 마음속의 허영심, 탐심,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소원 목적하고 취미를 가지는 거고,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인정을 안 해 주는 모든 게 용이다.
세상 것은 붙잡았다고 해도 놓게 되고, 없어지고, 가졌다고 해도 자기가 죽으면서 이 땅에 놓고 가는데, 이런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 속의 정신에서 활동하는 게 용이다. 이 용은 존재적으로는 없는 건데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영원히 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게 다 허영성이다. 이런 정신으로 움직이는 것은 용의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거다. 허망하고 허영적인 마음들이 뭉쳐진 총 본산지가 용이 거하는 곳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용을 그리기를 좋아하고, 용의 그림을 여기저기에 붙여놓는데, 인간이 창조된 후에 인간이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는데, 뱀이 하는 말은 실상이 없는 말이요,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은 실상인데, 아담과 하와가 실상의 말씀을 버리고 거짓된 마귀의 말을 들음으로서 타락이 되었고, 모든 인간에게서 이 정신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게 용이다.
성경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는데, 글자대로 보면 옛사람은 옛날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안 믿는 사람은 전부가 옛사람으로 사는 거고, 예수를 믿더라도 세상위주로 사는 것은 옛사람이다. 반면에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살아있는 말씀을 먹는 것은 새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 속에서 이 두 가지 성분이 작용하고 있다.
교회에서 세상 것을 가르치는 것은 죽은 말이다. 믿는 예수 믿으면서 세상사람들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죽은 정신으로 사는 거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을 먹는 거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정신으로, 진리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은 새 생명의 사람이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한다면 죽은 정신을 먹는 거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다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입구에 불 칼을 돌게 해서 다시 에덴동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는 생명과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은 자에게는 생명과를 주기 싫다는 표현을 이렇게 한 거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의 머릿속에 ‘세상에서 잘 되고, 부자 되자’ 하는 물질적인 개념으로 들어있으면 생명과를 먹는 게 허락이 안 된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의 머릿속에는 진리이치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다. 이 사람의 머리는 죽은 거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꼴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하는데 아무 교회나 나가면 되지? 이건 자기 생각일 뿐이다. 뱀의 생각이다.
빛 되신 진리생명의 말씀이 들어가면 남이 아닌 자기부터 분해가 된다. 성령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을 보게 한다. 행:에 사도들이 외치는 곳에 유대 외식자들과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사도들에게 환난과 핍박을 줬다.
현재 죄를 짓고 있는데 나중에 천국에 가면 뭐가 되겠느냐? 예수 믿는 게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것만 있다면 세상에 교회가 필요 없고 말씀의 교훈이 필요 없다. 한 영혼이 귀하다? 그렇다면 기본구원만 아니라 신앙이 자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거다.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부끄럽지 않게 본향에 들어가려면 말씀으로 성품화 되고,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존귀 영광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하늘나라에서 기념될만한 것을 장만해야 한다. 마귀의 꾐에 넘어지지 않는 것도 기념될만한 거고,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해 들어가는 것도 기념할만한 거다.
세상이 어떤 곳이냐? 실력이 없는 자는 도태되는 곳이 세상이다. 하물며 예수 믿는 것은 실상의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땅에 살면서 실상세계에서 써먹을 실력을 갖춰서 교회 안에서도 써먹고, 불신세상에 나가서도 써먹고, 천국에서 가서도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주는 거짓된 종은 우리에게 용납이 안 된다. 마귀는 이방 불신자들을 붙잡고 우리와 싸움을 붙이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조직의 세계에서 성경을 들고 덤벼든다.
세상에서 정신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차원이 높다. 믿는 우리는 정신적인 운동보다 더 높은 영의 운동이다. 그래서 영의 눈이 밝으면 예수님처럼 불신세상의 마음과 정신과 소원과 목적과 취미와 모든 말의 차원을 안다. 우리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 하나하나를 경험을 안 해도 안 믿는 사람의 소원과 목적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세상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전부가 망할 거고, 없어질 거고, 자기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거다.
◆ 창:에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표를 준 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표로 생각하면 그 뜻을 풀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는 마음과 정신에서 활동 되는 거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잡아와서 죽이려고 했듯이 사람들이 가인을 보면 ‘동생을 죽인 놈이다’ 하면서 가인을 죽일 수 있는데, 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가 어떤 표일까? 사람을 볼 때는 먼저 얼굴을 보니까 가인의 얼굴에 무슨 표시를 했을까?
동생을 죽인 가인이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농사를 지어도 소출이 없다. 그러니 좋은 땅을 찾아서 떠돌게 된다. 동시에 ‘사람들이 나를 보면 죽이려고 할 거다’ 하는 두려움에 떠돌게 된다. 그러니 한곳에 정착을 못 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정착이 안 된다.
제사(예배)문제로 가인이 동생을 죽였는데, 가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의 태도가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들어갔다. 피 없는 제사는 물질적 세상적 인본주의 사고방식의 예배다. 가인이 예배의 자리에서 안색이 변한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한 증거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빛을 받고 진리이치를 깨달아야 기쁘게 되어있다. 일반적으로도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불안하고, 무섭고, 행복하지 못하고, 외롭고, 고독한 게 인간이다. 이게 다 어두운 거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죄인이라서 유리방황하는 나날을 보내면서 항상 두렵고 떨린다. 우리 같으면 베드로처럼 회개를 하겠는데 가인은 회개를 못 한다. 회개를 못 하는 사람으로 되어버렸다. 회개는 차일피일 미루는 게 아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당장 해야 한다.
가인은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늘 도망을 다니고, 또한 가는 곳마다 농사가 안 되기 때문에 계속 이동을 해야 한다. 그러니 정착지가 없다. 마음을 둘 곳이 없다. 나중에 롯 땅에 들어가서 이곳을 정착지로 삼고 아들을 낳고 에녹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가인에게 사람들이 죽이지 못하는 표를 주었다고 하는 게 사람들이 가인을 보면 ‘무서운 놈이다’ 하면서 도망을 가는 건지, 아니면 가인이 사람을 보면 ‘숨어야 되겠다’ 하며 피하는 건지? 어떻게 생각을 해야 가인을 죽이지 못하는 표를 주었다는 말씀이 우리의 구원에 깨달음이 될까?
신약에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니까 무리가 도망을 갔느냐? 땅에 글을 쓰며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니까 다 도망을 가버렸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 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존재라서 죄인이다.
믿는 사람들이 왜 가룟유다에게 지옥에 갔다고 하며 말로 죽이느냐? 말로 가룟유다를 죽이는 사람들은 가인에게 ‘동생을 죽인 자다. 살인자다’ 하면서 말로 가인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기로 죽이는 것만 아니라 인격살인, 믿음 살인, 진리 살인 등등 얼마든지 있다. 자기가 수시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못 깨달은 거다. 우리가 동생을 미워했고, 형을 미워했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미워했다. 이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살인이다. 이런 살인이 없는 자는 죄인을 돌로 쳐서 죽여라.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는 것은 이런 해석까지 나오는 거다.
교인들이 ‘이웃을 사랑합시다’라고 할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자는 뜻으로 말을 하지 ‘가룟유다를 사랑합시다’ 하는 교인은 없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가룟유다는 당신의 원수인데 예수님께서 이 가룟유다를 미워했을까, 사랑했을까?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사랑해서 당신을 팔 것을 알면서도 제자로 삼았다가 배신당해 죽은 거냐, 가룟유다를 미워해서 당신을 팔 것을 알면서도 제자로 삼았다가 배신당해 죽은 거냐? 예수님께서 결과적으로 제자에게 팔려서 죽었는데, 남이 당신을 팔 때 능력이 없어서 팔릴 분이냐?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이려고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미워서 죽이려고 하는 것 같으나 그게 아니라 동네 사람이라고 하는 인정정실로 예수를 죽이려고 벼랑까지 몰고 온 것을 말한다. 즉 겉으로는 호응을 하지만 결과에 가서는 죽이는 게 있음을 우리로 알게 하는 거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를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고 하니까 둘러선 무리가 다 도망을 간 것처럼 사람들이 가인을 볼 때 죽이지 못하는 무언가를 가인에게 준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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