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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법궤를 붙잡은 웃사가 즉사한 이유/외.

사무엘하 궁극이............... 조회 수 38 추천 수 0 2023.06.07 10: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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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삼하6:7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누구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냐? 하나님이다. 하루 24시간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인간이 알기 쉽도록 24시간으로 쪼갠 거다. 해가 떴다가 지면 24시간인데, ‘한 시간, 두 시간하는 것을 인간이 만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열하신 거다. 그러니 하나님은 시간 속에 살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 초월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들어 놓고 시간 속에 산다면 하나님도 늙어서 죽는다.

 

하나님은 시간 초월이니 인간의 표현으로 말하면 항상 현재다. 그리고 현재의 연속이 영원에서 영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 그 사이에 우리 인간은 낳고 죽고, 낳고 죽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경말씀의 뜻을 알고,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고차원적인 존재가 된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거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붙잡고 일하신다. 세상에 유명한 사람이 많지만 이런 사람이 귀한 거다.

 

구약 때 이스라엘이 아모리와 전쟁할 때 해와 달이 거의 하루 종일 넘어가지 않았는데, 해와 달이 제 마음대로 멈춘 거냐,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신 거냐? 해가 제 마음대로 공중에 떠 있는 게 싫다고 하면서 땅으로 내려오면 해가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공중에 박아놓았는데, 이게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는 거냐? ‘예수 믿는 너희는 해다. 늘 위에서 땅을 비춰주는 존재다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는 땅의 소원 목적으로 살면 안 되고, 땅의 것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사용 활용하며 살아야 한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로서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따라올 때 그의 유모 드보라도 함께 왔다. 리브가가 가나안에 와서 이삭의 아내가 되어서 쌍둥이인 에서 야곱을 낳았는데,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갈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벧엘에 여호와의 전을 세우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으니 외삼촌 집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곧바로 벧엘로 가서 십일조도 드리고 하나님의 전도 세워서 하나님을 섬겨야 했는데 물욕심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물질이 풍부한 세겜에서 자기 집을 짓고 8년간 살면서 뭉그적거리다가 딸 디나의 사건을 당하고서야 하나님께서 주신 옷도 벗어버리고, 주신 보물도 다 땅에 묻고 벧엘로 올라왔다. 세겜의 정신과 사상을 버려야 벧엘로 올라가지는 거다.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디나가 그 땅의 여자를 동경해서 보러 나갔다가 그 땅 족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 디나는 유모 드보라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버지 야곱도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신앙이었듯이 디나도 세상을 욕심내는 신앙이었던 것 같다.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살았는데 질적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닮았느냐? 안 닮았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지만 롯은 그 중심이 물질목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롯은 아브라함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아브라함처럼 복을 주옵소서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롯을 보면서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다.

 

야곱의 가족이 벧엘에 올라왔는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벧엘에서 죽었다. 그런데 묻히기는 벧엘에서 조금 내려온 곳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것을 신앙정신으로 보면 우리의 신앙이 벧엘에 묻힐 신앙인지, 아니면 벧엘 조금 아래에 묻힐 신앙인지가 있다는 거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이제는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유모가 필요 없다는 뜻에서 드보라가 죽은 거고, 벧엘 아래에 있는 곳에 묻은 거다. 상수리나무가 세겜 상수리가 있고, 벧엘에서 좀 내려오면 이곳에도 상수리가 있다고 한다.

 

법궤는 하나다. 율법도 하나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거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거다. 여러 사람이 말을 해도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면 다 하나의 말이 된다. 이런 신앙의 큰 원칙에서 이탈되면 성경을 구원에서 벗어난 해석을 하게 된다.

 

법궤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거냐, 이스라엘 전체가 가져야 하는 거냐? 전체다. 그런데 누가 이 법궤를 전쟁 마당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겼느냐? 엘리의 아들들이 블레셋과 싸울 때다. 그러면 왜 전쟁 마당에 가지고 간 거냐?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가지고 간 거다. 이것을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복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가 경기할 때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그 정신과 같은 거다. 믿음도 없는 육의 사람이 육의 생각을 가지고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하면 안 들어주신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긴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법궤를 세상에 내버리고 온 거다. 자기 목숨이 살려고 법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겼고, 또한 자기 목숨이 살려고 도망을 가다가 죽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 하나님 기준, 말씀 기준, 생명 기준을 버리면 그 마음바탕이 세상이고, 이러면 그 신앙은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우상이 있는 신당에 들여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우상을 섬기는 다곤의 신당에 들여놓은 셈인데, 다곤의 신당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냐? 필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상의 팔다리가 잘렸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우상을 섬기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인생은 결딴난다는 거다. 다곤의 우상이 결딴났듯이 우상을 섬기는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어버린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애고 어른이고 간에 그 정신과 사상이 전부 물질성이다. 물질 때문에 서로 죽이고, 부모 자식 간에 재판 자리에서 싸우는 것은 그 마음에 물질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생은 이성이 없는 짐승만도 못한 거다. 사람은 인격에서 가치가 있는 건데 이런 자들이 무슨 사람의 가치가 있겠느냐? 이런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인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인권이 있느냐? 성경을 바로 모르면 사회가 어지러워진다.

 

다곤의 우상의 팔다리가 잘리고 다곤의 신전이 있는 아스돗과 그 주변에 독종의 재앙이 내리자 사람들이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가드로 옮기자 이 성 사람들에게도 독종이 발했고, 이 성읍 사람들이 법궤를 에그론으로 보냈다. 법궤가 에그론에 이르자 이곳 사람이 자신들에게도 재앙이 임할 게 두려워서 법궤를 본처로 보내기로 했다.

 

일곱 달 동안 블레셋에 있던 법궤가 두 마리의 소가 이끄는 수레에 실려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아왔고, 벡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끌고 온 소가 수고했다고 여물을 많이 주고 쉬게 한 게 아니라 이 소를 잡아서 각을 떠서 하나님께 드렸다. 이게 소의 일생이다. 인간이라면 각이 뜨여서 하나님께 드려진 소를 보면서 깨닫는 게 없느냐?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고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쳐서 (오만)칠십 인이 죽자 벧세메스 사람들이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서 법궤를 가져가라고 했고, 이에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법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법궤를 지키게 했고,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이곳에 있었다.

 

아비나답이 산에 산 것은 신앙사상이 높고 생각이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산에 사는 사람은 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산에 산다는 것은 신앙의 차원을 말하는 거다. 아비나답은 법궤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아비나답이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셔놓으니 부자가 되었느냐, 빌어먹었느냐? 부자가 되었다. 이것을 물질부자로만 생각하지 말아라. 영육의 복이 다 들어있는 복이다.

 

왕이 된 다윗이 이 소문이 듣고 아비나답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법궤를 가지고 올 때 쉽게 편하게 옮기려고 한 것인지 법궤를 수레에 싣고 출발하자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소가 뛰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붙들자 하나님이 진노하사 저를 쳐서 법궤 곁에서 죽었다.

 

법궤는 짐승이 메는 거냐, 사람 중에 제사장이 어깨에 메는 거냐? 신앙이 높은 사람, 지도자들이 메게 되어 있다. 이게 옳은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수레를 보내서 법궤를 실어 오게 했고, 이로 인해 사람이 죽게 된 것은 다윗의 책임이 크다.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

 

소는 본능으로 산다.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뜀으로 사람이 죽은 것은 교회에 다니더라도 회개 되지 않고, 거듭나지 않고 본능으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짊어지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육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에게 법궤를 메게 하면 펄쩍 뛴다.

이 소의 마음을 인간의 말로 표현한다면 이 미련한 사람들아, 법궤는 인간이 어깨 위로 모셔야지 왜 짐승에게 맡기느냐?’ 하며 펄쩍 뛴 거다. 이것을 지금으로 말하면 웃사야, 왜 예수이름으로 육 운동을 하는 것에 동참하느냐?’ 하는 거다. 그 결과는 죽는 거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육 운동을 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이것은 계:에서 말하면 666에 속하는 운동이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법궤를 붙잡은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웃사는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면 박살이 나버리기 때문에 붙잡은 거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하나님의 법궤는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속한 말씀이 아니다. 법궤는 인간이 보호한다고 해서 보호되는 게 아니다. 인간이 법궤를 보호한다고 할 때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이 있자 다윗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법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갔고,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 이 소문을 들은 다윗이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겨갈 때 너무 기뻐서 춤을 추었다. 법궤가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을 때 복을 받았다는 말은 없으나 많은 복을 받았을 거다.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 다윗이 사람이 죽지 않고 가져온 게 기뻐서 춤을 추다가 바지가 내려갔는데, 이 장면을 본 미갈이 흉을 보자 다윗이 책망했고,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희망과 소망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모르는 미갈이 일반적으로도 성격 성질이 고쳐졌겠느냐?

 

안 믿는 사람들도 좋은 미래를 바라보며 참는 게 있는데 믿음의 사람이 자기가 받을 하나님의 복을 모르면 당장의 어려움을 못 참는다. 이는 자기의 성격과 성질 때문이기도 하고, 몰라서도 그렇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자기의 현실에서 되는 거다. 현실에서 이게 되어야 성령의 사람이다. 주 안에서 자기의 현실을 볼 줄 모르면 미친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자에게는 만물을 축복으로 쓰시고, 악한 자에게는 재앙으로 쓰신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도와주옵소서라고 하는 것보다 어떤 사건이 오기 전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신호를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는 자기 되기를 원하신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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