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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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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61661 |
설교보기 : https://youtu.be/djedMyZlVp0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2~11 구원의 징표
대림절 셋째 주일, 2022년 12월11일
세례 요한의 질문
예수님의 공생애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특수한 관계를 맺은 인물은 세례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씩 표현의 강도가 다르기는 하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불편한 진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행 18~19장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보다는 세례 요한이 당시 대중들의 인기를 더 많이 받았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1:2~11절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대한 한 단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고, 이를 계기로 예수께서는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 당신은 메시야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유대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노숙자처럼 살면서 몰려드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은 단지 자연인 한 사람인 요한의 질문에 머물지 않고 당시 그리스도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모든 사람과 집단에 해당합니다. 예수가 정말 메시야인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로 인해서 세상이 정말 새로워졌나, 예수 믿고 우리 각자의 삶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게 정말 맞나, 하는 질문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질문 안으로 들어가야 그리스도교 신앙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질문하기 전에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여기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하라고 다그칩니다. 여러분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으신가요? 요한의 질문에 기대서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식과 자유를 경험했으며, 그런 안식과 자유의 경지가 인생의 연륜과 더불어서 점점 더 깊어갑니까?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이전보다 더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든 교단이 총회를 거치면서 교인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나 그동안 쌓여왔던 불신이 가속하는 게 아닐는지요. 현실 교회는 온갖 허물을 그대로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잘못도 있고 실수도 있습니다. 그걸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건 감수해야 합니다. 다만 예수가 메시아라는 확신에서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세례 요한의 발언에서 보듯이 다른 길을 찾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인지 가타부타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5절에 나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 내용은 병행구인 눅 7:22절에 그대로 나옵니다. 약간 다른 상황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눅 4:18절에도 사 61:1절을 인용한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예수의 삶과 인격에는 구약의 메시아사상에 근거한 구원의 징표가 드러났습니다. 이런 신앙전통을 이어받은 오늘 우리도 그런 구원의 징표를 붙들고 이 험난한 세월을 버텨낼 뿐만 아니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 오심과 지금 함께하심을 찬송하면서 삽니다.
구원의 징표
본문에 구원의 징표가 여섯 가지로 나옵니다. 맹인,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못 듣는 자, 죽은 자, 가난한 자가 그 절박한 상황을 극복한다고 말입니다. 제가 아는 만큼 설명할 테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지를 살펴보십시오. 편의상 여섯 가지를 셋으로 묶겠습니다.
1)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각각 보게 되고 듣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장애인을 고치셨다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종종 나옵니다. 그런 기적적인 일들이 예수의 활동 가운데서 어느 정도로 광범위하게 일어났는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만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 예수에게만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영적인 카리스마가 강력한 인물들, 예를 들어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에게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제자들에게서도 일어났다고 사도행전이 보도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런 일이 오늘에도 반복되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메시아에게 일어날 구원의 징표가 예수에게 그대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절망과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모두 근본에서 시각장애인이고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본다고 하나 실제로는 못 보고 삽니다. 우리가 듣는다고 하나 실제로는 못 듣고 삽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고, 진리를 볼 눈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종교 지도자들이자 지식인이었으나 근본에서는 못 듣고 못 본 사람들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삽니까?
여기에 더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보게 되었다는 말은 본다는 사실 자체에서 구원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듣게 되었다는 말은 듣는다는 사실 자체에서 구원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시야에 무엇인가가 들어옵니다. 겨울나무, 달, 돌, 먼지가 들어옵니다. 우리 귀에 무언가가 들립니다. 찬송, 아기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거기서 우리는 살아있음을 경험합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는 겁니다. 보고 듣는 사건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기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듣는 것처럼 아주 낯설어하고 놀라워할 때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런 일이 예수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복음서 기자들이 지금 증언하고 있습니다.
2)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실제로 걷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걷는다고 해서 다 걷는 게 아닙니다.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모두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 실제로 경험하면 너무 황홀해서 춤을 추고, 웃음을 입에 달고 살 겁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없어도 아쉬움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겁니다. 걷는 행위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한 아기가 태어나서 일 년이 되어야 걷습니다. 걸음을 배우려면 수없이 실패를 반복합니다. 최고로 발전한 로봇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다 아실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걷는다는 사실에서 절정의 기쁨을 느낀다면 그는 작은 단칸방에서 외롭게 살아도 부족한 게 없습니다.
이번 2022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조별 예선을 통과해서 16강까지 올라갔다가 세계 랭킹 1위 브라질과의 시합에서 안타깝게도 졌습니다. 축구선수들이 축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 생기가 솟아납니다. 마라톤 선수들에게는 달리기가 예술이나 인생 철학처럼 보입니다. 저는 전문적으로 걷고 달린다고 해서 오늘 성경이 말하는 걷게 되었다는 말씀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걷기 힘든 노인이, 또는 뇌수술을 받아서 걷기가 힘든 이들이 지팡이를 짚거나 보조원의 도움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 비로소 걷는 행위의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못 걷다가 걷게 된 사람처럼 희열에 벅차서 다른 일들은 사소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에 따라서 구원의 징표가 여러분에게 있는지가 판단될 것입니다.
3)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죽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났다면 그는 죽은 게 아닙니다. 여기서도 육체가 실제로 죽었냐가 아니라 살아있으나 죽은 자나 마찬가지의 삶에서 생명 충만으로 들어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창 젊은 인생을 사는 대한민국의 청년 중에 거의 죽은 자처럼 살거나, 또는 좀비처럼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성경 시대에는 가난한 자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니까 저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게 왜 구원의 징표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가난한 이들 주변에 사람들도 모이지 않습니다. 민폐를 끼칠지 몰라서 사람들이 오히려 피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은 가난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들로 그들의 삶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를 때는 가난에 찌들 뿐이지만, 그걸 알면 자유를 얻습니다. 이런 말이 관념적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제가 더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데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돈을 주고 숨을 쉬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게 가난한 사람에게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통해서 그는 이제 자신의 가난을 저주하지 않고, 그걸로 자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대담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닌가요? 믿기 힘든가요? 말은 그럴듯해 보이나 비현실적으로 들리시나요?
실족하지 않는 자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구원의 징표에 관해서 말씀하신 뒤에 6절에서 의아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과 운명을 메시아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까지는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이 있어도 전체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운명을 이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게 그의 마지막 운명이었습니다. 이런 운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인다는 말인가요. 예수 자신도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능하면 이 십자가의 운명을 물리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음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마가복음 기자의 보도(막 15:34)도 객관적인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에 십자가 처형은 로마법이나 율법에서나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런 예수의 마지막 운명에서 본다면 예수의 공생애에서 일어난, 그리고 그가 약속한 구원의 징표에 희망을 걸고 살기는 힘듭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전통에서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구원의 징표를 호기롭게 선포하고 살았던 예수의 마지막 운명이 저주스러웠다는 사실로 실족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우리도 다 거기에 포함됩니다. 약간의 손해도 못 견디는 우리가 억울한 죽음이라는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인다는 말인가요.
바로 이 대목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넘어야 할 마지막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만 넘으면 어떤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입니다. 가장 억울하고 저주스러운 죽임을 당했던 예수의 운명에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무덤에 묻혔던 그 예수를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운명은 이제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서 죽음의 능력이 폐기되었습니다. 그를 믿는 이들은 이제 죽음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에서만 우리는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 경험에서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가 선포하고 자신의 삶으로 보인 구원의 징표를 삶의 참된 능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그 마지막 단계를 넘으셨나요? 아직 넘지 못해서 늘 실족하는 중인가요?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낸 후에 중요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중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도 얼마 후에 체포당하고 유대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로마 법정인 빌라도에게서 심문당한 후에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아 죽을 겁니다. 요한과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되었습니다. 동병상련을 느끼셨을 겁니다. 예수께서 보기에 요한은 왕궁에 있는 귀족보다 뛰어나고, 유대의 다른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마 11:11절에서 요한을 가리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극찬하셨습니다.
그다음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천국은 ‘바실레이나 톤 우라논’의 번역입니다. 그 단어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 나라)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바실레이아)가 일어나면, 그 통치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세례 요한보다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의 권력이 더 강한지, 누가 더 유명한지가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서열이 아예 폐기됩니다. 죽으면 영웅이나 소시민이나 똑같이 ‘관’ 하나만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런 나라를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원의 징표로 경험합니다. 시각장애인이 보고,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여러분은 갈망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바뀌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면서 인생을 사십니까? 우리 인생살이에서 기다려야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많은 일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은 우리 인생에서 한 가지입니다. 예수의 운명에서 드러난 구원의 징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걸 수행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로 분명히 인정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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