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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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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64755 |
설교보기 : https://youtu.be/eIATNSnyToQ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주현 후 둘째 주일, 2023년 1월 15일
아포칼립시스
오늘 저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까다로운 성경 구절 중의 하나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그 유명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나옵니다. 고전 1:7절입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바울이 말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신약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때가 되면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재림 신앙을 받아들이지만 그게 실제로 무엇인지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손이 잡히지 않으니 그냥 믿기만 하면 충분할까요?
우리말 성경이 ‘나타나심’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ποκ?λυψι?’입니다. 아포칼립시스는 ‘계시’(revelation)를 가리킵니다. 마틴 루터 성경도 계시라는 의미의 독일어 ‘Offenbaru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직역에 가까운 KJV은 단순하게 the com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의역에 가까운 NIV는 예상외로 ‘to be revealed’라고 번역했습니다. 계시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심과 계시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심은 우리 눈앞에 실제로 나타나는 성격이 강하고, 계시는 초월적이면서 신비적인 느낌이 강한 단어로 들립니다. 요한계시록 이름이 본래 ‘아포칼립시스’입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에 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합시다. 아들이 휴가를 나와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걸 coming이라고 한다면 아들이 휴가를 직접 나오지 않았으나 군대 가기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을 어머니가 보고 아주 강렬하게 아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걸 revel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딱 떨어지는 건 아니나 대략 그렇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나타나심’은 오심과 계시의 중간 정도의 번역입니다.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포칼립시스’를 기다린다고 썼을까요?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우리 모두 그걸 알아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은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 사실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유대교에 열광적으로 몰두했습니다. 그런 열정으로 초기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인물로 부상했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토대를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갈 1: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서 복음을 전달받지 않았고,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의 지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정확하게 알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놓았습니다. 이 구절에 나온 단어인 ‘계시’가 바로 설교 본문인 고전 1:7절에 ‘나타나심’으로 번역된 ‘아포칼립시스’입니다. 그가 받았다고 말하는 계시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입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부활 목격자들의 목록을 제시했습니다. 자신을 목격자 목록에 포함했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난 사건에 관한 서사(narrative)는 사도행전에 세 번(9장, 22장, 26장)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에 부활의 주를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러니까 기자가 일정한 요건에 맞춰 취재하여 보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친구나 지인과 카페에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다메섹 이야기는 바울의 아주 특별한 영적인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께서 바울을 만나기 위해 지상에 잠시 내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지금도 그런 일이 반복되어야겠지요. 이게 바울의 예수 경험을 오늘의 시각에서 읽어야 할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바울의 예수 경험은 분명하다는 사실과 그 경험은 신문 기자가 뉴스 보도처럼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사이에 놓인 딜레마입니다.
이런 딜레마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그의 ‘나타나심’, 그러니까 계시(아폴칼립시스) 사건의 리얼리티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라는 문자와 텍스트의 표면에만 머물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단순히 낱말 뜻으로 아는 사람과 실제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다르듯이 그의 나타나심을 들은풍월로 아는 사람과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다릅니다. 들어갈 준비가 되셨나요? 제가 얼마나 그 깊이를 실제로 알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는 데까지 가보겠습니다.
생명 완성을 향한 갈망
바울은 나타나심의 주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 등등입니다. 신약의 다른 대목에도 예수와 그리스도는 늘 붙어 다닙니다. 거기에 ‘주’가 달리기도 하고, 빠지기도 합니다. 주는 퀴리오스라는 헬라어 번역이고, 예수는 자연인 예수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구약의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퀴리오스는 당시 로마 황제에게 붙는 단어였습니다. 생살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을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퀴리오스를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고 주장한 겁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종교적인 의미의 구원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예수라는 인물이 정치적인 차원이나 종교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그걸 초월하는 절대적인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을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이나 로마 권력자들이 얼마나 내키지 않아 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당연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박해받았고, 로마 정치 권력자들에게 온갖 불이익을 받았으며, 때때로 순교 당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역사에서 제거당했습니다. 제자들과 몇몇 무리에게 그는 ‘살아있는 자’로 경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고 하늘로 올리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외친 겁니다.
잠시 뒤로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데 왜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당했을까요? 인간이 악해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까지 초월하는 능력자이시니까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찾은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즉 구원자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세상을 온전하게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하지 못한 게 아니라 구원을 이루셨으나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구원을 완성하셨으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잠정적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우리 개인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기는 하나 여전히 세상살이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까. 여전히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씨앗이 우리 영혼에 심기기는 했으나 열매를 충분히 맺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과 인류 역사에서 현실이 되었으나 충만해지지는 못한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완성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정작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의 완성을 갈망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말은 그런 갈망을 가리킵니다. 군대 간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갈망처럼 말입니다. 단순히 생명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 완성입니다. 이게 당시 다른 종교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지금도 역시 그런 차이는 계속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생명의 완성을 말합니다. 완전한 행복이라고도 말하고, 극락이라고도 말합니다. 마음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도 나름으로 생명 완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화를 실현하겠다고 말합니다. 박애주의를 갈망하는 휴머니스트들도 많습니다. 이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 완성을 갈망하고 희망하고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 완성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분들은 물론 없겠지요. 제가 종종 언급했듯이 그런 문제는 굳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아도 누구든지 저절로 다 노력합니다. 여러분이 최소한 일용할 양식으로 크게 곤란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베풀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여러 가지 삶의 형편이 정말 어려운 이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자신들이 뚫고 나가야 하고,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그럴듯한 인생을 즐기면서 산다고 해서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려고 애를 쓸수록 생명 완성에서 거리가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공주와 왕자의 신분으로 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겉으로는 환상적으로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보통 사람과 차이가 없어서 더 공허해집니다.
개인에 따라 실제 삶에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 차이와 노력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늘 불안하게 사는 사람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평안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탐욕에 기운 사람이 있으나 거리를 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으나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운 짓을 골라 하는 사람이 있고, 예쁜 짓을 골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으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이 있고,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 있고, 열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큽니다. 여러분 모두 후자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수준에서 살아도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정도로 만족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세상이 제시해주는 방식으로 성실하게 살면 충분합니다. 현대 지성인들은 대개 그런 수준에서 살 겁니다. 인생이 별거 있나, 자기 식대로 재미있게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거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완성을 찾아갑니다. 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싶은 겁니다. 어디까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도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여러분도 기다립니다. 완전한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런 순간을 기다리기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많지 않습니다. 기다림만으로도 삶이 충분합니다.
세상에서 나름 똑똑한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당신들이 기다린다는 그런 구원의 순간은 없어. 당신들 헛물 켜는 거야. 정신 차리고 지금 여기서 충실하게 살면 돼.’ 하고 말할지 모르겠네요. 니체가 들이민 그리스도교 비판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족 중에서 여러분을 그렇게 대하는 분은 없나요? 친구 중에서는 없나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 상황이 이해될지 모르겠네요. 여기 다도(茶道)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좋은 차를 구하려고 애씁니다. 비싼 다기도 사들입니다. 차 연구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좋은 맛을 내려고 반복해서 연습합니다. 그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서 삶의 절정을 경험합니다. 그걸 잘 모르는 사람은 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차 맛이 그게 그건데, 왜 저렇게 까탈스럽게 차에 미쳐서 사는지 모르겠어, 참 한심해.’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누가 정신 나간 사람일까요?
견고한 자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의 완성을 갈망하면서 인생을 구도적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간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건 필수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함께 헤쳐나가는 데에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소위 ‘가나안 교인’이 되는 건 오죽했으면 그럴까, 하고 이해되나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는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힘이 되었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언변과 지식이 풍족하고, 6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 견고하게 되었고, 7절에서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구도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되어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걸 8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책망할 것이 없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다시 7절로 돌아갑니다. 하나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완성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은사는 일상의 삶을 가리키고, 나타나심은 일상의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즉 생명의 완성에 대한 갈망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를 교회 생활과 연결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교회 반주자가 있다고 합시다. 교회 반주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아는 사람은 그 은사에 최선을 다합니다. 은사를 대할 때 부족함이 없고,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그 은사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교회 구성원들과 함께 참여하는 예배와 친교 안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목사가 설교로 구원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 준비와 실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즉 생명의 완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또 다른 방식으로 은사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설렘과 갈망과 간절함이 실제로 있으신가요? 바울의 9절 표현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즉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셔서 여러분의 구도적 인생살이가 신앙의 연륜과 더불어서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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