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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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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9절-17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9절-14절: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바리새인들. 이런 사람들은 의롭다고 하는 것을 첫째는 세상 일반적으로 보면 남보다 일반 도덕적인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을 의롭게 본다. 또 기독교인들도 일반 도덕적인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일반적인 그런 선행을 많이 강조한다. 두 번째는 예언이나 방언을 많이 하는 교인을 굉장히 믿음이 좋고 의인 시 한다. 그래서 방언하는 사람을 상당히 부러워한다.
10절에 보니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한다. 뒤에서 세리가 기도를 하고, 앞에서는 바리새인이 기도를 하고. 그것도 같이 앉으면 부정하다고 생각을 해서 따로 떨어져서. 여기에는 바리새인은 세리는 자기들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세리가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인데 바리새인은 자기와 세리를 비교하면서 기도를 한다. 이런 교인들이 있을까? 바리새인은 ‘나는 토색도 아니 했고.’ 토색은 다른 사람에게 무력이나 속여서 사람을 해치는 것. 그걸 안 했다 그 말이다. 그리고 간음도 불의도 아니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기도도 했고. 교회 안에서 금식기도 하는 자를 굉장히 높이 본다.
처녀가 시집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전도사나 목사가 되면 예수님처럼 본다. 그런다고 해서 사도바울과 같으냐? 그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런 사람을 상당히 높이 본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다. 그런 사고방식을 뜯어 고쳐라 그 말이다. 그랬다고 해서 그게 성경대로 된 거냐? 그게 아니라 그 말이다. 에녹은 자녀를 낳으면서 하늘로 승천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데려갔다.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의 관점을 그대로 갖고 와서 성경을 여전히 그렇게 보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이건 이방인들의 생각이다. 고쳐야 한다. 사람을 그렇게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속성 성품 인격성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한 속성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했어도 그게 믿음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시집 장가 안 가고 평생 표면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면 굉장히 높이 보지만 그게 아니다. 속성이 문제다.
‘이레에 두 번식 금식기도를 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냈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데 십의 구조를 내면 그 사람을 더 크게 본다. 그러나 십의 구조를 내는 건 성경대로인가? 십일조는 아니다. 십일조는 십일조대로 하고, 또 감사할 마음이 있으면 감사헌금으로 하는 게 좋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십의 이조 삼조까지 하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감사하면 감사하는 대로 받겠다’ 하는 성경은 있다. 그럼에도 십의 이조 삼조를 하면 엄청나게 본다. 그런 사고는 버려라.
바리새인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리와 자기를 비교를 하며 했는데, 이 바리새인의 신앙이 좋은 것이냐, 안 좋은 것이냐? 바리새인이 한 말만 그대로 들어보면 좋은 건데, 문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좋은 건 아니다. 그런 말은 스스로 자화자찬할 게 아니다. 남이 할 말이다. 더군다나 남과 비교해서 하는 건 그 심사가 고약하고 악한 것이다.
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이 세리가 그동안 자기 죄를 몰랐는데 바리새인이 자기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 세리 자기의 죄를 지적해 주니까 ‘내가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가슴을 친 것이냐? 바리새인의 기도소리가 세리의 귀에 들렸을 때 ‘맞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그런 것이냐?
세리가 자기의 죄를 어떻게, 누구의 기준에 두고 기도를 했기에 의인이라고 하는 응답을 받고 갔을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방 불신세상의 선악과 따먹고 나온 저주받고 타락된 그 의행 그 선행에서 행동으로 나온 그걸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게 기준에 돼서 ‘나는 저렇게 못하니 죄인이로구나’ 해야 되느냐? 누구 보기에 기준을 세워야 하느냐? 사람이냐, 세상이냐, 하나님의 뜻,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야 하느냐? 간단히 말하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세워야 한다. 자기의 생활 속에서 모든 언행심사가 누구의 기준을 세워놓고 움직이느냐?
오늘날 잘못 된 교인들이 참 많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기준으로 세우고 해야지, 예수님을 기준으로 세우고 해야지 왜 사람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느냐? 이건 구약시대 같으면 하나님의 형벌 감이다. 그런데 신약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으나 아니다. 있는 거다. 영의 눈으로 보면 신약시대에도 있다. 즉시다. 그 즉시로 영적 면은 딱 차단이 돼 버리는 거다.
못 깨닫고 못 자라나는 그 자기를 보고 한탄을 해야 한다. 육신이 살아있고 육신이 건강하니까 다 된 것 같으냐? 아니다. 사람의 영적 심성이 비뚤어지게 돌아가면 육신은 언제 치임을 받을 런지 모른다. 육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회개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울 수 있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거다. 자기가 건강하고 육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기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구나’ 하고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미리 미리 빨리 빨리 고쳐야 한다. 안 고치면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
사람이 젊으나 늙으나, 애고 어른이고 간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언젠가는 죽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살면서 보면 자기가 잘못해서 죽는 사람, 또 남이 잘못해서 딴 사람이 죽는 사람, 또 하나님의 형벌이나 징계로 죽는 사람이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자연사로 죽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형벌로 죽는다는 건 믿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 하나님의 규례대로 살지를 못해서 하나 둘 하나 둘 담의 돌이 하나씩 빠져나가듯이 결국 나중에는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있다. 담이 무너지면 여우도 멧돼지도 막 들어온다.
자기의 몸을 보면서 정신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허점이 뭐였나? 반드시 신호가 있는 건데 무지해서, 그 신호를 무지해서, 알아보지 못해서 그냥 방치하고 있다. 결국 자기 몸이 망가진다. 남이 아니다. 우리에게 육신을 입혀놓은 것은 ‘영적 면에 무엇이 잘못돼 들어가나’ 하는 걸 눈으로 보게 해서, 몸으로 느끼게 해서 영적 면으로 깨닫게 하는데 들어가 있다.
바리새인처럼 외부 표면으로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글자적 표면적으로만 하면 의인이고, 안 하면 죄인인가? 세리는 그 기준대로 안 했으니 죄인인가? 바리새인이 보는 죄의 기준, 의를 보는 기준, 세리가 죄와 의를 보는 기준이 다르다. 세리가 의인이라는 응답을 받고 갔으니까 이 세리는 누구의 기준을 잡고 기도를 한 것이냐? 하나님이다.
바리새인이 자랑스럽게 한 기도는 인간이란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길을 가다가 어린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있으면 어른이 보고 일으켜 세우는 건 당연한 거지 그렇게 했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뭘 조금 했다고 의인 시 보는 게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그걸 안 하면 오히려 죄가 돼버리는 거다. 악이 돼버리는 거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건 의인이라야 주는 거냐,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냐? 당연한 걸 의인 시 하면 문제가 다른 것이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며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는 걸 한 것이니 당연히 한 것이고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것도 남과 비교를 해서. 예를 들면 ‘너 왜 주일날 교회에 안 나왔느냐? 나는 나왔는데’ 하는 건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남과 비교해서 자기를 의인 시 하며 말을 한다면 문제가 된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에 바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을 죄인으로 생각을 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한 것이고,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하라. 마라’ 한 것을 자기가 다 했으니까 자신을 의인으로 여긴 것이다. 기준이 다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당연한 것인데도 기준이 다르게 돼 있는 게 많다. 세상기준을 가지고 와서 그걸 종교적으로 세워놓고 그게 기준이 돼 있다. 그래서 종교행사가 많은 교회일수록 그 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좋고 성령이 불붙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사람의 그 속성이 인격과 성품적으로 하나님 앞에 질적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의인으로 쓰여지는 언행심사도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어떻게 다 감당할 런지 모른다.
의인과 죄인은 무슨 차이냐? 속사람이 바꿔진 차이다. 바꿔진 데서 나오는 언행심사와 안 바꿔진 데서 나오는 언행심사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그 근원이 전혀 다르다. 선악과 먹고 나온 언행심사와, 생명과 먹고 나온 언행심사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생명과 먹고 나온 언행심사이고, 일반세상은 선악과 먹고 나온 언행심사다.
모든 언행심사는 생명과 먹고 나온 지식에서 나온 것과, 선악과 먹고 나온 지식에서 나온 것 이 둘밖에 없다. 아무리 종교적인 것이라고 해도 이건 선악과 쪽이다. 선악과 먹고도 얼마든지 종교인도 될 수도 있고, 철학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은 속성은 될 수가 없다.
예수님은 하늘의 속성이다.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은 그 속에 든 게 하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땅에서 났다는 건 그 속에 든 속성이 땅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다 땅에서 나왔다. 하늘의 속성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없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오신 하늘의 소식, 천국복음, 예수 그리스로도로부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받아서 넣는 것이다.
세리는 그 기도자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됐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는 마음자세가 잘못됐다. 기도는 남과 비교해서 남의 잘못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본질을 찾아서 자기의 성격 성질을 거기에 맞춰 고쳐나가는 것이 바로 되는 거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자랑할 건 아무 것도 없다. 오직 고쳐나가는 것이다. 고쳐나가는 자가 복된 자이고, 복 있는 사람이 사는 거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뭐든지 주고 싶어 하신다.
세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집으로 갔으니 그 가정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가정으로 될 가능성이 많다. 의인이 그 가정에 들어갔으니 의가 빛처럼 발산될 것이고, 의로운 마음으로 자기 가정에 다 연관되어 나갈 것이니 그 가정이 하나님 앞에 의의 가정이 될 희망성이 보이는 거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뭘 가지고 높이느냐? 남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종교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예수 믿은 햇수가 많은 것으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자기를 높이느냐? 이건 안 된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떤 직위나 세상 일반적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건 틀렸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낮추신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한 식구니까 차원이 똑같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집에서 세상 것을 가지고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낮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높이지를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남을 많이 무시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안 바꿔진 것이다. 그런 자들은 낮아지기 시작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에서 낮아지게 만든다.
두 번째는 말씀 깨달음에서 낮아지는 사람은 자꾸 겸손해진다. 어떤 사건에서 낮아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공의에서 낮아지게 만들고. 자랑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나 시점에서 자기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는 낮아지고 잘 하는 사람이 쑥 올라간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데 모든 면에서 자랑을 하다가 큰코다치고 통곡을 하게 되면 그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다.
주님의 완전에 비해 자기의 허점을 보강하고 메우려고 하지는 않고 남만 지적하고 가르치려고 달려든다면 낮아지게 만드는 사건이 오게 된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교만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자꾸 떠난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인간 자기를 기준하여 남을 높이는 자나 인간 자기를 기준하여 남을 낮추는 자는 바리새인들의 기준이고, 이방 세상 사람들의 기준도 그렇다. 자기 기준에서 ‘이러쿵저러쿵, 못 한다. 잘 한다’ 세상은 그런다.
하나님을 기준하여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기준하여 나보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높인다는 의미가 희생적이고 봉사심이 강한 게 다른 사람을 높이는 거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자꾸 올라간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입어가는 자세로 자기를 낮추고, 못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자기를 낮추고. 이러면 이룰구원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이 성품적 인격적 자체적으로 실상화 된 높고 아주 고상한 사람이다.
바리새인이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과, 하나님의 온전하심 입은 높임과는 질이 다른 거다. 사람이 바로 되고 있으면 하나님이 높이신다. 불을 당겨서 밝게 하면 그 불을 많은 사람들이 높인다. 불을 내리면 안 된다. 불을 낮추면 캄캄하고, 불이 딴 데 붙으면 큰일 난다. 불은 높이 들고, 진리는 높이 들고, 주님은 높이 들고 자랑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높이고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고 자랑을 한다. 이건 교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데서 죄가 정해진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서 순종을 하면 의인이 되고, 불순종을 하면 죄가 정해진다. 죄가 된다면 이건 자기 불행이다. 인간 자기는 모든 인류가 자기가 알던 모르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처럼 만들어지지 못했다면, 안 닮아졌다면 깨지고 얻어맞고 아프고 고통스럽다.
움직이는 것을 돋보지 말라. 신앙도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요지부동하신 하나님 기준을 세워놔야 한다. 기준이 자꾸 달라지면 안 된다.
15절-17절: 17절의 못 들어가면 어디로 가느냐? 지옥이냐? 지옥이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예수님께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만져주심을 바란 것은 아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게 할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의 감화성을 인격적으로 받게 하기 위해서 데리고 온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데리고 왔던 어린아이는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될 것이니 아이 때부터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다는 것은 미래적으로 보면 상당히 기쁜 현상이다.
어린아이를 주일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리고 교사들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감화성을 넣어준다는 것은 참 좋은 현상이다. 그게 아니라면 연재맷돌을 목에 달아 물에 빠져 죽으라. 그런 각오로 가르쳐라.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 무슨 활동을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바른 정신 바른 마음이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교사들이 각종 교육용품을 준비하는 건 좋다. 그 열심은 참 좋다. 어린아이 때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눈으로 보게 해서 깨닫게 하려니 그림을 그려서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이를 테면 어디로 놀러 가고 하면 그런 감화성만 자꾸 들어간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린아이의 부모들을 향해서 꾸짖었다. ‘우리 선생은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선생이 아니니 시끄러우니 빨리 데리고 가시오’ 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는 꼴을 보고 구원도리가 들어있는 말씀으로 꾸짖었다.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런 자? 어떤 자냐? 어린아이들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아이들밖에 없느냐?
어린아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오면 그 어린아이가 누구를 배우고 누구처럼 자라겠느냐? 그 아이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처럼 속성이 자라나게 된다. 하늘나라는 진리의 세계요 생명의 세계요 아가페의 세계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정신과 마음속에는 길이요 진리요 예수로 성장이 되고 구원으로 확장이 된다.
‘이것을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는 자는’ 즉, 아이를 옆에 놓고 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이들은 자라는 게 특징이니 아이들의 속성에서 무형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영능의 실력적으로 자라는 그걸 말한다. 그 면을 받들지 않는 자는 어디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 즉, 구원으로 성장한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없는 건 못 들어가고, 된 건 된 것만큼 들어가고. 예수는 믿었지만 예수로 닮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뭐가 되겠느냐? 지옥 간다는 건 아니고.
이 교훈을 모르는 부모들, 이 교훈을 모르는 교사들, 이 교훈을 모르는 목사들이 어린아이들을 세상의 불타지고 썩어질 기준에 맞추고 기르고 양육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에 나오는 청년들 학생들이 누구의 기준에 맞춰서 살 거냐? 세상에 맞춰서 살 거냐? 그렇게 살면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불속에 들어가는 것밖에 더 있느냐? 세상만사가 정치바람 물가바람을 인간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죽겠네 살겠네. 비싸다 싸다’ 하고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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