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8:18-30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18절-30절: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8절-23절: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인간을 만드신 분이요 세상물질을 다 만든 분이시다. 심지어 우리 몸까지 예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땅의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봐야 마지막 그 날에는 다 불사름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동안에 말씀의 이치를 바로 깨닫고 생활 속에서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사관계, 그리고 대물관계를 말씀의 이치대로 적절히 잘 연관시켜서 써 나가면 자기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입혀진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신비스런 하나님의 신, 성령님의 역사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마음을 가질 때, 애를 쓸 때 하나님은 그걸 보시고 당신의 신으로 도와주신다 그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예를 들면 세상에서도 물건을 들려고 하는데 힘이 없어서 못 들 때 옆의 사람이 얼른 가서 돕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시다.
그런데 자기가 안 하려 할 때는 하나님도 억지로 강권적으로 하지를 않으신다. 왜 그러냐? 모든 인간에는 심판이 있어서 강권으로 인간의 의기를 꺾어서 하지를 않는 거다. 어디까지 꺾느냐 하면 인간 자기 의지를 꺾으려고 몸까지 파고 들어온다. 팔다리를 꺾는다거나.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의 의지는 잘 안 꺾인다. 이건 인간 자기 마음에 달려있다.
그런데 신앙의 경험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진리이치의 본질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일반적으로 도덕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잘못했다고 하는 건 정도 아는데 하나님의 뜻 쪽으로 의사 쪽으로는 안 돌아간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의 진리이치 말씀을 들려주지 않으면 회개가 안 된다. 불가능이다. 쉽게 말하면 눈 먼 소경이 자꾸 보려고 한다고 해서 눈이 뜨이느냐?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를 잘 믿던 못 믿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영이 중생이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 영이 중생이 됐다. 그 다음에 중생된 성도가 옳은 종들로 통해서 진리이치의 말씀을 잘 먹어 들어갈 때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통해서 영양가를 먹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엄마 젖이 좋으면 아이가 잘 크지만 엄마 젖이 나쁘면 아기가 푸른똥을 싸고 살이 안 찐다. 그래서 첫째는 엄마가 잘 먹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교회마다 하나님의 종들이, 목사님들이 성경을 잘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밝혀줄 때 교인들의 깨달음이 어린아이처럼 쑥쑥 자란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분별이 되고 자라면서 영특해지고 총명해진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국어공부를 빨리 가르쳐서 뜻은 모를지라도 성경을 같이 읽도록 하라.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는 게 버릇화 습관화 돼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가정을 볼 수 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술 담배 먹고 집에 들어와서 싸우고 하면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되느냐? 머리가 썩는다. 그 속에서 뭐가 자라겠느냐? 부모가 한 그대로 보고 자라고, 나중에는 부모가 한 것을 보고 부모에게 대적을 하게 된다.
자식이 이러면 부모입장에서 누굴 붙잡고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자기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가슴을 쳐야 한다. 부모부터 회개를 해야 하고, 자녀가 자기로 인해서 그만큼 빗나갔으니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평소에 부모가 모범으로 보여져야 한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가 감화성으로 자녀들에게 들어간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보통 안 그렇다.
그리고 자녀들 입장에서는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바로 들어가야 되겠는데 자꾸 부모의 옛날 안 좋은 모습을 떠올리며 대적을 한다면 자식이 그렇게 커서 그 영향이 자기 자식에게는 어떻게 되겠느냐? 그 때는 더 커진다. 더 악해진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같이 보고, 장단점을 보고 깨닫고 고치고 본받고 나가게 해야 된다. 평소에 모든 언행심사나 또 자기의 성격 성질을 다 고쳐야 한다.
우리 몸은 목숨까지 주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다만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까’ 하는 그 점을 늘 생각을 해야 한다. 일을 하면서도, 사업을 하면서도 늘 그 쪽으로 많이 생각을 하고. 그러면 사람이 정결해진다. 그러지 않고 자꾸 세상걱정 이런 쪽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머리가 썩는다. 머리가 병든다. 그러면 어느 상황에서 사건적으로 시험이 왔을 때 그냥 넘어진다. 그러면 더 깊이 빠져 버린다.
우리 기독자는 물질에, 돈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바로 하는 것이다. 똑바로 하려고 할 때 소외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좀 어려운 것 같으나 지나고 나면 절대로 승리하게 돼 있다. 약속이 돼 있다.
그래서 땅의 것은 보화가 아니다. 아무리 금은보석이 있더라도 보화가 아니다. 그런 건 땅의 사람들이 알아주는 보화이지 우리에게는 참 보화가 아니다. 참 보화는 사람이다. 사람 속에 하나님으로 닮은 지혜지식성 도덕성 이건 금은보화보다 아주 귀중한 것이다.
신:에도 보지만 ‘각 민족들 중에 너를 머리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추려지고 사람 중의 사람, 그 다음에 동양에서 추려지고 사람 중에 사람, 서양 동양을 다 합쳐서 추리고 추려진 엘리트. 이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뭐가 없겠느냐? 비행기가 없겠느냐? 자가용이 없겠느냐? 옷이 없겠느냐? 야구 방망이만 잘 때려도 돈이 얼마냐? 그런데 하물며.......
우리의 복음은 각 나라 민족을 인류를 초월하고 국경이 없다. 왜? 사람의 온전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가견적 민족적으로 들어가면 적이 생긴다. 이건 복음이 아니다. 참 복음은 국경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안 해서 그렇지 자기가 하기만 한다면 말릴 사람이 없다. 사단 마귀도 못 말린다. 왜? 뒤따르는 역사는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이 따르기 때문에.
말하자면 밤에 켜진 등불만 끄집어내려도 사람들이 어둡다고 올리라고 난리다. 그런데 더 고차원적인, 말하자면 해를 끄집어 내린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가만 두겠느냐?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높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 하나님을 높이면 자기가 올라간다.
진리이치로 충만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거다. 쉽게 말하면 학생이 공부를 잘 하면 부모가 올라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바로 깨닫고 인인 간에 잘 연관을 지어서 일생생활을 산다면 자기가 올라간다. 이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혹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다 그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감화성을 받는 거다.
복음을 전할 때 일반사람에게는 방편으로 먼저 물질이 건너간다. 대화용으로 건너가는 거다. 물질을 줄 때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거다. 가깝게 지내보자고. 믿는 사람은 사람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처럼 올려줄려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용해 먹으려는 게 많다. 어쨌든 땅의 것은 보화가 아니다.
결혼할 때 아무 것을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이 보화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복이다. 결혼을 하는데 물질을 가지고 ‘얼마가 있어야 한다느니, 사위가 얼마를 가지고 온다느니, 며느리가 뭘 가지고 온다느니’ 하는 이거 못 쓰는 거다. 믿는 자의 가정에서는 절대로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된다.
믿는 아들딸이란다면 서로 사랑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말아라’ 하고서 데리고 와야 한다. 뭘 받으면 이쪽에서 또 가지고 가야 한다.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느냐? 나중에 그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고 말거리가 되고 시험거리가 된다.
‘나를 쫓으라.’ 하늘의 보화를 받는 비결이다. 이러면 사람이 복덩어리가 된다. 사람이 복덩이라면 그 뒤에는 다 따라가는 거다.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말을 하면 오히려 이상해진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다음에 모든 물질은 따라가게 돼 있다. 물질은 사람을 따라간다.
예수님을 따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따르면 이룰구원을 얻는 비결이다. 이게 다 영생의 성질이다. 예수님 한 분을 붙잡으면 하나님도 들어있고, 영생도 들어있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들어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선택하는 게 바로 된 것이냐, 세상을 선택하는 게 바로 된 것이냐?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을 하더라도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 그 말만 안 했으면 좋겠느냐? 그런데 부자의 귀에는 자꾸 그 말씀이 거슬린다.
처음부터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가난한 목사라고 한다면 ‘다 팔아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 말씀이 해당이 안 되는 것이냐? 가난한 목사는 자칫하면 세상 것을 자꾸 채우고자 하는 의욕이 더 있을 수 있다. 이건 안 된다.
만일 목사가 된 자기를 보고 ‘네 정신 사상이 세상 것으로 되어 있으니 네가 하는 것, 네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놔라.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따라라’ 한다면 본문의 부자처럼 근심 걱정이 되지 않을까? 부자처럼 걱정 근심이 많이 있다.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그걸 누가 알겠느냐?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거냐 그 말이다.
‘다 팔아서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말씀은 신앙이라는 그 정신 사상을 선택을 분명히 가지라는 것이다. ‘신앙이 어떤 건지 흐릿하게 가지지 말고 선택을 분명히 하라.’ 뭐가 우선적이냐?
신앙 면에 분별을 못하면 믿음생활을 똑바로 못하고, 부자 되기 바라는 마음이라면 거짓된 교회의 이용물로 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목사의 입으로 통해서 나오는 마귀의 수법에 넘어가는 거다.
부자는 문자대로 십계명은 잘 지킨 것 같은데 가치판단 평가를 하여 더 좋은 것을 갖는 결정은 못하는구나. ‘어느 것을 가질래’ 하니 선택을 못 한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똑바로 믿었으면 어정쩡하지 않고 반드시 가치판단 평가성이 바로 나오게 돼 있다.
부자가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서 잘 살자’로 되어 있었다면 그 신앙은 어른이 되었어도 가치판단 평가적 신앙은 없다. 따라서 그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고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 또는 이룰구원도 없다. 구원적으로 이룰구원은 다 영생으로 들어가 있는 건데 그게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수 년 수십 년 동안 믿고,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반사람들의 속셈과 똑같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식으로 믿는다면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것만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속에 든 가치판단 평가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이룰구원이 있겠느냐? ‘지옥에 간다’가 아니라 교회에 다녔으면 예수 배운 게 많아야 하는데 교회 다니면서 세상만 달라고 했고, 세상만 가르치고 했으니 뭐가 있겠느냐?
부자는 어릴 때부터 선택을 할 줄 모르는 신앙으로 자랐구나. 이룰구원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선택을 못하고 마는구나. 그러니 이 부자가 찬송을 하며 집에 간 게 아니라 근심을 하며 집으로 갔다. 근심을 하며 집으로 갔으니까 이 부자는 죽을 때까지 근심을 하며 근심 투성이로 산 것이다. 그걸 말해주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만나고 ‘찬송하며 집으로 가니라’ 그런 집으로 가는 마음과, 부자관원이 근심하며 집으로 가는 건 그 해석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다.
24절-27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만화 같은 얘기다. 글자 그대로 본다면 어떻게 이걸 깨닫겠느냐? 그러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 어렵다면 재산 재물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이냐?
부모나 조상들이 물려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인가?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스라엘의 왕들도 다 부자였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본분의 부자관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다른 것이냐, 그 사람의 마음속이 다른 거냐? 사람의 마음속이 다르다.
아브라함은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믿고 실천하다 보니 부자가 된 것이냐, 부자가 되려고 하다 보니 부자가 된 것이냐? 전자다. 모리아 산에서 독자 아들까지 번제로 드려지니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너의 선물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 그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족보를 통해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거다. 그러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았다면 그 다음은 온 천지가 다 아브라함의 것이다.
아들 이삭을 바쳤는데 다른 물질의 것을 해석을 하면 더 이상해진다. 물질이 아들보다 바치기 쉽다. 내가 죽는 게 아들을 바치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아들을 바쳤으니 다른 해석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해석은 다 아들 안에 들어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당신을 주셨으니 세상에 속한 물질의 것을 해석을 하게 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상해진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다. 지혜를 구하니 금은보화는 뒤따라 왔다. 금은보화를 누가 가지고 왔느냐? 저 남쪽의 스바여왕이 지혜를 얻으려고 지혜를 들으려고 한 배 가득 보화를 싣고 왔다. 그걸 역사적으로 보면서도 안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니 보다 더 말할 수 없는 지혜를 구해야 할 텐데 지혜는 안 구하고 먹고 마시는 걸 구하는 거지.
그런데 부자관원은 예수님보다 재물을, 말씀순종보다 재물을, 영생보다 재물을, 하늘의 보화보다 불에 탈 물질 재산을 구하니 지혜가 있는 것이냐? 이 부자는 오늘날 자기보다 미련퉁이냐? 자기에게 지금 부자관원처럼 뭐가 없으니까 그 말을 하지 있다면 그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부자관원보다 물질이 더 많아져도 예수님의 말씀은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재물이 있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예루살렘 성문 곁에 바늘귀라고 하는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문은 사람만 통과하는 문인데 그 문으로 짐승을 통과하게 하려면 짐을 다 내려놓아야 통과할 수가 있다. 사람이 통과하게 만들었는데 그 문으로 약대를 통과시키려고 하면 천상 무릎을 꿇려야 할 것이다. 배가 불러도 안 될 것이고.
어쨌든 그렇게 해서라도 약대를 통과시킬 수가 있는 것이라면 부자는 얼마든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건데 왜 그 바늘귀 문으로 통과를 못하겠느냐? 지금 그 말이냐?
또 옷을 깁는 바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바늘귀에 굵은 실은 통과가 안 된다. 실에 침을 묻혀서 잔털을 잠을 재워서 공을 들여서 바늘구멍에 집어넣어야 한다.
어쨌든 바늘귀는 통과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바늘귀로 약대가 통과한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소리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왜 그럴까?
첫째는 물질부자.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것을 흐뭇하게 생각하는 부자. 두 번째는 먹고 마시고 살만한데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심을 내는 부자.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지금은 가난하지만 내가 앞으로 살면서 부자로 살아야지’ 그런 목적을 갖는 부자. 네 번째는 ‘내가 남보다 부자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 부자. 다섯 번째는 ‘지금 먹고 마시고 예수 믿는데 지장 없이 살아가니 염려 걱정 없다’ 하는 부자. 그러니까 뭘 많이 가졌다가 아니라 마음이 편한 부자. 여섯 번째는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나눠주며 살고, 하나님 말씀이 풍부한 사람으로 살아야지’ 하는 부자. 여기서 보면 천국을 닮은 마음이 있고, 세상을 닮은 마음이 있다.
천국, 약속의 땅으로 가는 정신과, 애굽세상으로 가는 정신과는 방향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고 질이 다르다. 하나는 천국의 신령한 정신이고, 즉 영의 생각이고, 하나는 땅의 육의 생각이다. 이건 다 마음을 말하는 거다. 실지로 악대에게 바늘을 가지고 가서 ‘너 이리로 들어가 봐라’ 할 수 있는 거냐? 그러니까 마음을 갖는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질이 천국과 같은 질의 마음이 있고, 천국과 다른 질의 마음이 있다. 육에 속한 것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못할 것은 없다. 만능의 능력자시니까 없는 가운데서 다 만들었다. 그러니까 바늘이 있고 약대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못할 것이 있겠느냐? 없는 가운데서 만들었는데 있는 것을 가지고 뭘 못하겠느냐?
그런데 천국의 질과 사람의 마음의 질이 하늘과 땅 차이다. 질이 다르고 세계가 다르다. 이 둘은 도저히 안 섞인다. 신앙 속에 그게 들어있다. 같이 예수 믿는데 예수 믿으면서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마음이 있고, 들어가는 마음이 있다. 이걸 믿는 사람에게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면 자기가 천국의 성질로 만들어지고 닮아져야 한다. 그래야 그 마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거다. 중생된 영은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거고.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