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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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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23절-30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24절-27절: 부자라 하면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부자의 생각은 ‘든든하다. 오래 살겠다. 걱정 없이 살겠다’ 하며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신령계, 하늘나라, 영계, 신령천국, 신령한 것, 영적인 것은 시간 속에 들지를 않는다. 하나님은 신령계에 계시기 때문에 늙지를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늙는다. 물질과 시간 속에 든 것은 다 변질되고 썩거나 불에 타거나 늙고 한다.
영적인 것과 물질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질이 전혀 다른 것이라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늘은 신령한 거냐, 물질이냐? 바늘은 물질이다. 그러면 약대는 물질이냐, 신령한 거냐? 물질이다. 그러니까 바늘도 물질이고 약대도 물질이다. 물질과 물질이다. 그런가 하면 천국은 물질이 아닌 신령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령한 것과 물질 중에 어느 게 바늘귀로 통과하기가 더 어렵겠느냐?
약대는 짐승이요 바늘은 쇠이지만 물질 대 물질이다. 그러나 천국은 신령한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니 물질인 약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과, 신령한 것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통과하기가 쉽겠느냐?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게 쉬우냐, 인간이 구더기가 되는 게 쉬우냐? 내 말은 질을 가지고 따질 줄 알라는 것이다.
성경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이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했으니 하실 수 있는 거다. 왜? 천지창조 때 하나님이 약대를 제일 처음 만드실 때 약대 제 어미 아비가 있는 데서 만든 거냐,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든 거냐?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수 천 수 만 수 억 가지를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인데 뭘 못하시겠느냐?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간이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사람이 물질을 통과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인간이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이 하나님 비슷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가지니 속이 하나님으로 차 가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거다.
물질과 신령한 것은 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통하지를 않는다. 그런데 바늘과 약대는 물질이기 때문에 같은 질과 질은 통하는 거다. 부자 자체는 신령천국으로 못 들어간다. 그리고 ‘물질을 많이 가져야지’ 하는 부자의 그 생각을 가지고는 천국에 못 올라간다. 천국에 해당이 안 되는 거다.
성경말씀은 ‘뭘 말씀을 하시려고, 어떤 이치를 말씀을 하시려고 이런 표현을 하시느냐’가 있는 건데 본문의 말씀을 보고 자꾸 ‘바늘귀로 약대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그래서 주석에 보면 ‘예루살렘 성문 옆에 바늘귀라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말하는 거다’ 라고 하고 있다. 그 문을 말씀하는 거라면 약대가 그 문으로 통과하기는 쉬운 거다. 그런데 그 문을 옷을 깁는 바늘귀로 생각을 할 때는 그게 참 어렵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바로 될 것이냐? ‘구멍으로 짐승이 어떻게 기어 나가느냐’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물질과 물질을 생각을 하라. 신령한 것과 물질은 더 어렵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천국을 닮은 마음이 있고, 세상을 닮은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천국을 닮은 마음과 즉,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의 마음이 그 질이 같으냐, 다르냐? 다르다. ‘마음’이라는 글자는 같으나 마음이라는 질은 예수님은 신령한 마음이고, 인간의 마음은 물질의 마음이다. 그러니 전혀 안 통한다. 통할 수가 없는 거다.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은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다’ 하니까 사마리아 여자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그 물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랬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자가 ‘나에게 달라’ 하고 생각하는 물이 예수님이 준다는 그 물과 같은 거냐, 다른 거냐? 다른 거다. 예수님은 신령한 물, 영생수를 말하는데 여자는 자꾸 육신이 마시는 물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생각이 예수님은 영의 생각이요, 여자는 육의 생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죽을 때까지 가도 안 통한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 안에 예수님과 통하지 않는 예수를 믿는 자가 허다하다. 이미 신문에도 나왔지만 이방종교와 통하는 그 목사들이 ‘평화, 사랑’을 많이 부르짖는데, 그것이 예수님이 ‘평화, 사랑’을 부르짖는 그 마음과 질이 같으냐, 다르냐? 전혀 다르다. 목사가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치를 안다면 정말 이게 까무러칠 일들이다.
이것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서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신문에 보니 여자들에게 목사안수를 주기로 가결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동안에는 여자들에게 목사를 주지 않았다는 말인데, 세상이 흐르는 추세를 보아서 그동안 여자에게는 안 주던 안수를 이제부터는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이건 원리원칙에서 벗어난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다. 계:는 말세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데, 계:에 보면 여자가 나오는데, 계시적으로 여자는 예수님만 사랑하는 신앙정절을 지키는 순전한 성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 세 사람이 있는데, 말을 타고 앉은 여자, 산을 타고 앉은 여자, 짐승을 타고 앉은 여자가 나온다.
이게 교회를 말하는 거지만 글자적 문자적으로 보면 말세인 오늘날 여자목사가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말세를 이루느라고 그렇게 하고 있는 거다. 여자들은 그 성경을 보고 뭐라고 해석을 할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
여자는 창조 때의 위치가 있다. 교훈의 위치가 있다. 여자의 머리는 아담이다. 머리인 아담은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여자에게 그대로 전해줘야 했을 일인데 내가 볼 때는 아담이 여자에게 100% 전해주지를 못한 것 같다. 어설프게 전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했는데 뱀이 여자에게 ‘따먹으면 죽을까 하노라’ 했다. 그렇게 살살 얇아지고 얕아지고 하다가 결국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매 주 공부를 하는데(주-포도원교회에서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대상으로 인도하는 신학 및 성경공부 모임) 한 때는 여자목사 남자목사가 반반 정도로 나왔는데, 여자목사를 보면 주로 무당 푸닥거리를 하는 목사다. 그 중에는 손톱도 길고 반지를 끼고 짧은 치마를 입고 했다. 그래서 그게 내 속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나부터 하나님에게 불벼락을 맞게 생겼다. 그래서 나는 여자목사는 싫다고 대놓고 노골적으로 말을 하니까 슬슬 빠져나갔다. 그래도 계속 나오는 분이 몇 분이 계신데 그런대로 진리를 받아서 잘 가르치고 있다.
‘그런즉 누가 구원 얻을 수 있나이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영생을 얻는 구원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불가능이다. 우리가 영생 얻는 구원을 얻으려면 첫째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영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야 되는 거고, 두 번째는 살아난 우리는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살아났으니 이제는 진리본질로 이룰구원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야 한다.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이 돼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꾸 크게 자라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있다.
성령님이 하신다 함은 바꿔서 말하면 인간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 성령으로는 할 수 있다. 인간으로는 안 된다. 영생을 얻는 것은 신의 사역에 속하는 것인데 인간의 노력과 생각으로는 안 된다 그 말이다.
28절-30절: 주님이 베드로만 부른 것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주님이 불러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해서 버린 그 길로 예수님처럼 충만하게 된 거냐? 그건 아니다. 버려져야 예수님을 따르고, 따라야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처럼 충만해지는 거다.
그런데 어느 어머니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자기 자식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도 있다. 치맛바람이 예수님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 중에는 돈을 훔쳐서 달아나려는 자도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버렸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버렸나? 그게 버린 거냐, 안 버린 거냐? 아무 것도 없으니 버릴 것도 없었을까? 그래서 예수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달라고 한 것일까? 그러니 그 마음속에서 어떤 정신을 못 버린 것이냐? 세상을 사랑하는 그 정신을 못 버린 거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마음이 세상 것으로, 돈으로 들어갔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 버렸을까? 여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 버리고 목사를 하느냐? 성경을 가지고 세상 요구조건으로 신앙을 가지면 이건 거짓 종이요 도둑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게 도둑인 줄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도둑이요 강도라고 한다. 세상에 속한 것을 위하여 목사가 된 것일까, 노후대책 때문에 목사가 된 것일까? 세상 축복받아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인가? 예수님은 다 버리고 따르라고 했는데 그 말이다.
우리는 다 버리고 따르는 거냐? 무슨 말이냐? 일상생활을 하면서 진리의 사람으로 사는 게 버리고 따르는 거다. 그 뜻을 바로 붙잡고 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격이다. 온 식구가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지기 위한 소원성은 품고 살면 그게 예수 따르는 거다. 세상을 소원하고 있다면 문자적으로 성경대로 했다고 해도 그건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는 거다.
재산을 얻기 위해서 예수 믿고 따르는 것과, ‘재산을 버리면 어떻게 사나’ 해서 예수님을 안 믿는 것과 두 사람 다 부자관원의 속 사상과 같은 거냐, 다른 거냐? 같은 거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만지고 떼었다 붙였다 꿰매고 붙이고 하는데 몸속에 핏줄이 있고 신경이 있는 이것 역시도 물질지만 인간이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 껍데기 표면을 만들기보다 몸속의 피가 통하는 통로나 신경을 더 만들기가 어렵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사람 속에는 또한 오각의 오감성이 있는데, 이 오각의 오감성은 사람의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나고 표시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이나 핏줄이나 신경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의 오각의 오감성을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영적인 면의 신령성에 속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감지도 안 되고 느낄 수도 없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몇 가지 중에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 인간이 볼 때는 영적 면이 굉장히 어렵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어느 것이 쉬웠고, 어느 것이 어려웠을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톱 발톱을 만들 때는 나뭇잎을 가져다 붙여서 쉬웠고, 뇌를 만드실 때는 더 어려웠겠느냐? 아니면 인간이 볼 때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전부 쉬웠겠느냐? 하나님에게는 똑같은 거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안 되는 것이냐?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그렇게 어렵느냐? 어려워서 어려운 거냐, 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이룰구원의 격차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냐? 후자다.
29절-30절: 그러니까 어느 쪽이 더 좋은 거냐? 예수 바로 믿으면 참으로 좋은 건데, 아닌 말로 아무리 좋아도 먹어봐야 알지. 좋은 것은 말로 다 할 수는 없는 거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는 금세 즉, 이 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고.’ 하나를 버리면 여러 배를 받으니까 빨리 버릴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게 믿어지느냐? 여러 배를 받고, 그 다음에 죽어서 신령천국에 가서 영생까지 다 받는다고 하니 이게 몇 배나 이익이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라고 했는데 모든 것이라면 몇 가지가 모든 것이냐? 육신의 혈통적 세상에 속한 것, 부모형제 처와 자식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 쓰임이 되는 자라 그 말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식을 바쳤다. 그래서 몇 배를 받았느냐? 그 자리에서 되돌려 받았느냐? 자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그걸 바치라고 하니 ‘가져가십시오’ 하고 드렸다. 드렸는데 또 돌려받았느냐? 받은 거기에는 예수까지 따라 받은 것이다. 그러니 예수 믿는 거 믿되 바로 믿으면 손해가 없다. 여러 배다. 그런데 믿는 사람을 보면 믿음 쪽으로 이해타산이 붙지를 않고 세상에서 도태가 안 되려고 애를 쓴다.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 활용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버린 자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여졌다 그 말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업 업적을 소원 목적하여 목숨을 내어주었을지라도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세상을 위해서 사명감을 갖고 목숨을 버려도 이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버린 것이 아니다. 이건 세상에 속한 거다. 그럼에도 오늘날 종교적인 세상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주님을 위해서 버리는 걸로 아는 자가 많다. 이건 잘못이다.
썩을 것을 버려라. 불타질 것을 버려라. 변질될 것을 버려라. 임시적인 것을 버려라. 세상 것을 버려라. 그런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것, 하나님이 것, 영원한 것, 신령한 것, 하늘나라의 것을 주려 하심이다.
그런데 썩을 것, 불타질 것, 변질될 것과, 하늘의 것 둘 다 주면 안 되는 거냐? 쉽게 말하면 선악과도 먹고 생명과도 먹으면 안 되는 거냐 그 말이다. 근본적으로 원리적으로 그건 되는 게 아니다. 영이 죽고, 죽어가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영이 살아났어도 말씀지식이 주격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온전함이 입어지지를 않는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지식을 따른다 함이요, 하나님의 온전으로 실상화 되는 믿음생활이다. 이 주격이라야 모든 물질을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욕심이 있으면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쓸 수가 있겠느냐?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주님을 위해서 물질도 쓰고 하는 거지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쓰겠느냐? 이건 예수를 믿어도 자기를 위해 믿는 것이다.
물질 이해 타산적 그 주격으로는 예수를 못 믿는 것이고, 믿음이 안 들어가고, 사람이 변화되지를 않는 거다. 진리 이해 타산적 주격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구원성장이 잘 되고, 물질을 활용하는 실력을 갖게 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보다 가장 고귀한 것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하나님께 바친 이삭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보다도 제일 고귀하고, 사랑이요, 희망이요, 자신의 모든 것의 원료뭉치인데 그것을 드린 것이다.
이걸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자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다른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못 줄 리가 없는 거다. 아들까지 드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뭘 못 드리겠느냐?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주었는데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것을 뭘 안 주겠다고 하겠느냐? 원리는 똑같은 거다.
독자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 거지가 됐느냐, 처음 가진 것보다 몇 배를 받았느냐?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았고, 그 아들을 도로 받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 같이 많은 후손을 약속으로 받았다. 이삭 하나를 드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모래알 같이 많은 후손을 받았으니 이게 몇 배냐?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자에게 구원의 일이라면 자연법칙을 어겨서라도 주겠다는 게 들어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본질과 질적으로 같게 하여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이건 인간 스스로 안 된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본질적으로 성장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역사, 신의 역사라야 만이 된다. 그러므로 믿고 순종하고 따르고 살면 얼마나 유익이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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