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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믿음

히브리서 배장섭 목사............... 조회 수 204 추천 수 0 2023.07.15 06:13:30
.........
성경본문 : 히11:7 
설교자 : 배장섭 목사 
참고 :  
노아의 믿음 (2023. 7. 16. 주일설교)
본문말씀 히브리서 11장 7절
 
1. 서론
 
혹시 성경을 읽으시다가 어떤 말씀 때문에 충격 받으신 적은 없습니까? 저는 가장 충격적인 것이 노아홍수사건이었습니다.^^ 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정도 못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건 자체를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저는 어릴 때 신약성경부터 먼저 읽었는데, 그 때 알게 된 하나님은 한 마디로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왜 그 많은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더 충격적인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예정을 마치 운명론처럼 정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을 만들어 놓고 선악과를 따 먹도록 만드시고, 또 그렇게 물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죄를 짓도록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런데, 설교 준비를 위하여 말씀을 깊이 연구하다보니까 신학 사상이나 교리들 중에서 엉터리 주장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는데, 그 중에 제일 심각한 오해가 바로 믿음입니다. 왜?
흔히 믿음을 행함이나 순종을 전적으로 부정한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을 강조하면 율법주의니 신율법주의라고 정죄하잖아요.^^ 그런데,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봤던 것처럼 결코 그렇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2. 본론
먼저 이 말씀에 보면 히브리 기자는 “믿음으로”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선 이 말씀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이냐 하면 ‘아직 보이지 않는 일’ 즉 미래 일어날 일에 대하여 ‘경고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방주를 준비하여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경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홍수 심판 사건에 대한 경고지요. 물론 거기서 끝나지 않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노아 가족을 위하여 큰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는데, 만약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사실 그 명령을 좇아 방주를 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어느 유명한 수학자에 따르면 당시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인구가 10억에서 100억까지 가능하다나 어쨌다나^^ 심지어 노아 당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 받았던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조차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5장 족보에 보면 가인 역시 아담의 첫 번째 자식이었지만 빼 버리고 셋의 후손을 진술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 4장에 진술하신 가인의 후손만 이 세상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아벨 대신 주신 셋의 후손도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 중에는 죽은 사람들도 많지만 아직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셋의 후손 중에서 다 변질되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직 노아 가족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창세기 6장 5-7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함을 보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 그런 것이고, 노아의 눈에 볼 때에는 나름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설마 하나님이 저 모든 사람들조차 함께 심판하시겠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일, 이년도 아니고 무려 120년 동안, 물론 해석상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만 그것은 접어두고 하루도 아니고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이 명하신 방주를 짓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렇게 먹고 살기 어려운데 당시에 그 방주를 지으려면 과연 일상생활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당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대충 추론해 보면 하나님이 노아 가족만을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을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어떻게 했다고요?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명령을 좇아 순종하여 방주를 준비함으로 그 집을 구원하게 된 이유가 바로 ‘경외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 기자는 ‘믿음’이란 ‘경외함으로 순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
지난 번 에녹의 경우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경외함이란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고 두려워함으로 그 말씀과 명령을 좇아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듯이 창세기 6장 9절 이하에 보면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이유를 설명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동행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에녹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접어 두고 그 다음 말씀에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부패했지만 거기에 반하여 노아는 당시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은 정말 황당한 명령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22절에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경외함이요, 참된 믿음이라고 히브리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철저히 순종 자체를 부정하는 이신칭의가 말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진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런 뜻으로 ‘믿음의 의’를 말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바울을 버려야 됩니다. 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절대로 단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신 볼 수 있는데,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비록 가지에 붙어 있으려고 해도 버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버림 받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다음 4절에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정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그 다음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를 그 다음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새 계명을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명하신 새 계명을 좇아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버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울 아니라 우 바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된다면 우리는 그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바울 서신을 연구한 바로는 결코 바울이 이신칭의를 말한 적도 없고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론을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 같이 오해를 한 것입니다.
아니, 성경 전체를 연구해 보면 결코 상충되는 말씀이 단 하나도 없고 모두 일맥상통하는 완전무결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누가 말을 들어야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믿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물론 요사이는 교회가 커지다보니 생기는 경제적인 이권이나 정치적인 이권 때문에 비록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도 많다보니 교회가 시끄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정말 구원이 목적이라면 절대로 목사라고 그 말 함부로 믿으면 안 되고 철저히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됩니다. 왜?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교묘하게 침투한 간첩 목사, 제스윗 자칭 재림 예수, 하나님, 성령님이라고 주장하는 가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파와 같이 죄지어도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중에 죄 지어도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돌로 치려고 한 가늠한 여인조차도 그냥 무조건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3. 결론
시간 관계상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요. 제가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왜 굳이 그 귀하신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계획하신 것일까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떤 분들은 대속을 위한 수동적인 의를 획득하시기 위해서라는 어쨌다나?^^ 그렇다면 그렇게 십자가를 진 사람들은 전부 수동적인 의를 획득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시고자 하신다면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십자가는 율법에 근거한 번제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 보면 ‘화목제물’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 보면 “힐라스테리온”이라고 해서 ‘속죄제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십자가를 통하여 속죄제물로 삼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요한복음 3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니고데모와 대화하는 중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런 연후에 15절에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그 이유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놋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되는데, 민수기 21장에 보면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물려 죽게 만드셨습니다. 왜?
에돔 땅을 돌아가게 하시자 먼 길이라 순순히 그 명을 좇아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물려 죽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잘못 했다고 용서를 구했는데, 하나님이 그냥 무조건 용서해 주시지 않고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보는 자는 살고 안 보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그냥 용서해 주시면 되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사실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솔직히 놋뱀을 본다고 낫습니까? 아니 놋뱀에 무슨 불뱀에 물린 자들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아니 그것도 그냥 쳐다보면 낫는다고 그것을 쳐다보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정말 황당한 명령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니 십자가로 어떻게 우리 죄가 대속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아니 무슨 십자가에 못 박혀야 죄를 없애는 효능이 생기는 것입니까? 왜 십자가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쳐다 본 사람들은 나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안 본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사이 어떤 이들은 과학의 영향으로 홍해사건과 같은 이적과 기사를 믿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여러분 이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그 정도도 못하시는 신이라면 신이 아니지요. 아니 신이라 할지라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놋뱀이 불뱀에 물린 자들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어서 낫게 된 것이 아니라 신명기 18장 15-22절에서 말씀하신 참 선지자 분별법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모세조차도 참 선지자가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황당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 명을 좇아 살아야 비로소 생명을 누릴 수 있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신 것처럼 그렇게 너무나 황당한 명을 내리신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순종할 때 비로소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황당하게 들리기 때문에 거절하게 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12장 24절에 보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원문에 보면 비교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의 뿌린 피니라”고 번역해야 되는데,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렇게 말씀하신 연후에 그 다음 말씀에 보면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한 우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계속해서 29절까지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셨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우습게 생각하고 죄를 우습게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이신칭의와 같은 잘못된 교리들 때문입니다.
여러분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신칭의처럼 용서해 주실 것 같으면 왜 굳이 진작에 과거 노아 홍수 때 그렇게 용서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이 변하셔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을 정도로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 담긴 그 무서운 경고의 메시를 주목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
인간인지라 아무리 결심하고 결단해도 조금만 지나면 헤이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바로 그 경고의 메시지를 주목하므로 우리 역시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여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명을 좇아 사랑하시는 삶을 사시므로 천국의 영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땅에서도 복된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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