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21 추천 수 0 2023.07.16 09:53:09
.........
성경본문 : 눅18:34-43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834-43: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뭘 못 깨달았느냐? 본문 앞에 다 말씀해 놓았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사시는 그것을 제자들은 몰랐고, 또 예루살렘에서 그 사건이 왜 그렇게 되는 건지 그 깊이를 하나도 못 깨달았고, 고난 후에 그 무엇이 있는지를 못 깨달았다.

 

제자들이 부활을 못 보고 부활을 어떻게 알까? 부활체를 보기 전에는 실감이 안 나는 거니까 그래서 알지를 못하고, 그 말씀이 감추었으니했으니 사건이 오기 전에는 그 뜻을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사건이 와서 이 사건이 영적 면에서 어떻게 되어있구나하는 것. 이건 단순히 사건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건만 응하는 거냐, 사건 후에 예수님의 부활체도 성경대로 응한 거냐? 부활도 성경대로 들어간 거다.

 

그런데 육신의 사건도 모르지만 영적 면에서도 모른다. 감춰져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춰져 있는 거고, 감춰져 있으니 모른다. 육신만 생각을 하면 영적 면은 감춰져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게 신앙인지 신앙의 세계에서 영적 면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다.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우리에게는 감춰져 있느냐? 이미 역사가 다 지난 후라 우리에게 확 보여져 있다. 그런데 사건 속에 감춰져 있는 게 뭐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체가 어떻게 된 거냐? 평소에 어떻게 살아나온 그 부활체냐? 어떻게 살아야 그 부활체로 될까? 이게 오늘날 감춰져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으로 살면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이 비결이 부활체 속에 들어있는데 그걸 모른다. 아는 사람은 믿고 들어가는 건데 모르는 사람은 역사가 그렇게 보여줬는데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게 그 모양인 거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밥 먹고 똥오줌 싼 것밖에 더 있느냐? 신령성에 대해 깨달은 게 전혀 없다. 불에 타질 것만 잔뜩 키워놓으면 뭘 할 거냐?

 

마지막 시대의 예수 믿는 교회의 활동 속에, 메시지 속에 이게 다 감춰져 있다. 그래서 믿음성장이 안 되고 믿음이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러니 역시 마지막 그 날에 꼼짝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예수 믿는 체질이 불탈 체질로 들어가 있다.

 

35-43: 모든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선지자 마음대로 한 것이냐? 그 예언의 말씀을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 즉,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은 다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예수로 오시기 전에 하늘나라에 계실 때에 선지자의 입에 말을 넣어준 거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예수께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우리교회도 신앙의 걸음걸이가 성경을 응하게 하는 삶으로 돼야 하는 거고, 그 삶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대로 정로로 걸어가는 것이요, 이 삶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도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게 들어있다. 우리교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라간다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다. 말씀대로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어떤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느냐? 소경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소경이 되면 구걸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따라서 먹고 살 목적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소경이고, 소경은 앉아서 구걸하는 것 외에는 다른 걸 할 수가 없다. 소경은 구걸을 할 수밖에 없다. 길 가에 앉아서 아무리 구걸을 해도, 또한 구걸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면 눈이 뜨이느냐? 더군다나 이 소경은 여리고 길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교회의 흐름이 예수님을 따라서 거룩한 성, 하나님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향해 올라가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고 여리고 성으로 가는 교회가 있다. 여리고 성으로 가다간 도둑이 나타나게 돼 있다. 여리고 길에서는 교인이고 목사고 다 도둑을 맞는다. 도둑을 맞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비참하게 죽는다.

 

소경은 누구에게 맞아죽어도, 도둑을 맞아도 그 도둑의 얼굴을 아느냐? 모른다. 그러니까 소경된 사람은 자기 집에 아무리 금은보화를 쌓아놔도 도둑을 다 맞는 거다. 또 도둑은 눈 먼 소경에게 와서 가져가게 돼 있다. 소경은 누가 자기 것을 훔쳐가도 소경이 돼 있는고로 그걸 모른다. 언제 도둑을 맞는 건지? 밤인지 낮인지? 소경은 항상 밤이다.

 

일반적인 것으로도 영적 이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리고를 건설을 하면 저주받아 죽는다고 예언이 돼 있다. 히엘이 건설을 하다가 저주받아서 죽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고 걸어 다니며 살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선악과 따먹은 사람들은 다 소경이다. 영의 눈이 소경인 사람은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신 주인을 못 알아본다.

 

소경들은 모두가 자기 돈 바구니를 앞에 놓고 구걸을 하더라.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고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는 사람들 전부는 세상을 향해서 소원 목적하고 있다. 그게 구걸이다. 영적 소경은 하늘을 못 보기 때문에 땅의 것만이 다 인 줄로 알고 땅의 것을 구걸을 한다 그 말이다. 그래서 자기의 저금통장을 만들어서 자꾸 키우자. 키우자한다. 저금통장이 자기 앞에 놓은 돈 바구니다. ‘마지막 시대에 소경이 그렇게 많구나그런 의미다.

 

성경구절 속에 숨은 뜻이 참 많다. 예수님의 33년의 걸음걸이를 보면 선지자의 예언대로 응하게 하려고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살았다. 그러니까 낮에는 전도하고 일하고, 어두울 때는 감람산에 가서 쉬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밤이 돼서 진리가 활동을 안 할 때는 어디 가서 쉬느냐? 감람산이다.

 

감람나무는 인간에게 좋은 나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곳에 가서 쉬신다는 것은 인간 나를 신앙의 불을 밝힐 수 있는 그런 높은 산, 신앙의 높은 차원에 올려놓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쉰다는 말은 아이고, 피곤하다하고 다리를 쭉 뻗고 쉰다는 말이 아니라 다음 날 일을 할 준비를 하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교회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감람나무 동산이면 그곳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또 그런 교회가 미래의 환난을 대비한 성령의 감화의 삶이 되는 거다.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쉬신다는 것은 아닌 말로 예수님이 일을 하고 쉬신다고 해도 세상으로 흐르는 그런 데로 가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전체로 보면 교회원이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높은 신앙에 계신다는 것이다. 영적 면에서 그런 높은 차원의 신앙을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노후대책이니 교육비니 저금통장을 여러 개를 만든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주님의 살으심처럼 정말 말씀의 규례대로 살면서 그 삶의 걸음걸이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 길이 열리도록 살아봐라. 그렇게 살면 말하자면 이 소경이 돈 통을 자기 앞에 놓고 사는 것처럼 왜 그렇게 살겠느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당신을 따르라고 하는 그 분이 너의 사는 길을 책임지신다.

 

그게 안 믿어진다면 국가에서 군인으로 차출하고서는 굶어죽게 두느냐? 훈련 잘 받으라고 밥 나오지, 월급 나오지, 신발 나오지, 내복 나오지, 철 따라 옷이 나오지, 국가가 다 책임을 진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할 때는 그것을 주려 하심인데 그게 안 믿어진다. 이게 불신이다.

 

돈 바구니를 앞에 놓고 세상을 달라고 구걸하는 그 사이에 시간은 자기를, 많은 인류를 죽음의 공동묘지로 자꾸 끌고 간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가지지만 어린아이라도 공동묘지를 향해 날마다 가는 것이다. 결국은 죽음이다. 가는 과정에서 가는 것도 크는 것도 공동묘지를 향해 그만큼 가고 있는 건데 그걸 생각을 못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히지 못한 채 자꾸 공동묘지로 끌고 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리고 길로 지나가시게 됐다. 여리고 길은 강도를 만나는 길인데 왜 이 길로 오시느냐? 세상 사람들은 다, 또 세상을 구걸하는 기독교인들도 그게 다 여리고 내려가는 길이다. 그 신앙의 사상이, 그 체질이 여리고 길로 가고 있다. 강도가 우글거리는 그 길로 가고 있다. 그 길로 가면 다 도둑맞는다. 도둑 안 맞는 게 없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로 가시는데 소경에게는 이게 절호의 기회다. 이 소경은 그 기회를 잘 포착을 했다. 그런데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리고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역사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그 순간 찰나를 포착을 하느냐? 잘 못 한다.

 

소경에게는 기회인데, 이럴 경우 소경이 눈을 안 고치고 나는 세상을 구걸 하련다하고 있다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소경이 영원히 소경되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겠느냐? 눈 뜨기를 바라는 주님이시다. 눈 뜨기를 바라서 지금 여리고 길로 오신 것이다. 소경에게 기회를 주려고.

 

소경도 눈 뜨이기 바라고, 오늘날 지금 우리도 영의 눈이 뜨이기를 바란다. 소경의 입장에서 이번의 기회를 놓치면 영영 소경이 된다. 본문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소경으로 죽는 거고, 또 영적으로 보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못 만나면 영적 소경으로 죽는 거다.

 

소경의 귀에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사람의 소리가 저 멀리서 웅성웅성 하면서 들린다. 평소 때 사람들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와는 다르게 들린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소경이 있다고 해서 소경이 돈을 달랠까봐 조용히 간 게 아니라 평소처럼 간 것이지만 소경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어느 한 쪽으로 몰리는 그게 발걸음 소리다. 어느 한 쪽으로 가고 있을 때 무엇을 보고 그리로 몰리느냐? 오늘날 교회로 보면 예수님의 발걸음과 비교해 봐라. 오늘날 교인들이 어느 교회로 많이 몰리느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슨 영을 받겠다고 어느 교회 쪽으로 움직이는지? 무슨 말을 하기에 그곳으로 가는 건지? 그걸 알아야 한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역사로 되는 전주곡이 있는 거다.

 

소경의 입장에서도 신경이 쓰인다. ? 전주곡이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 마지막 때에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전주곡이 있다. 그 전주곡은 교회 안을 보면 빨리 알 수 있다. 징조도 긍정적 징조가 있고, 부정적 징조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종을 보내실 때 회개하는 자에게는 긍정적이지만 형벌을 받을 자에게는 부정적 징조가 된다.

 

지금이 마지막 때라면 무엇을 보고, 어떤 징조를 보고 마지막 때라고 하느냐? 마지막 때로 안다면 종교적인 사업을 많이 해야 하느냐, 아니면 너도나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춰야 되는 거냐?

 

자기의 신체 면의 전주곡, 시대의 전주곡, 어떤 회사의 전주곡. 회사가 망하려면 일꾼들의 월급을 잘 주느냐, 한 달 두 달 자꾸 밀리느냐? 낌새가 벌써 달라지는 거다. 그게 전주곡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면 신앙으로 산다고 하는 자기에게 왜 성령의 열매가 안 열리는 건지 그 징조가 있는 것이다.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36: 소경의 입장에서는 무리의 지나는 소리를 듣고 전주곡을 들은 거다. 소경이 귀는 밝았다. 그래서 묻는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하고. 이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한다.

 

누가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이 높이는 말도 되고, 낮추는 말도 되는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교인들이 이 말을 쓰면 예수님을 낮추는 거다. 예수님을 천하게 무시하는 말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오겠느냐? 나사렛 이단이다그렇게 말들을 했다.

 

세계 각 나라 대통령이 다 그 나라의 수도에서 나오는 것이냐, 시골출생도 있는 것이냐? 시골출생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쓰시는 선지자는 모두 큰 도시출생이냐? 하나님이 쓰시는 큰 종은 세계에서 제일 큰 도시출생이냐? 세계적 부흥강사는 리무진이나 세단 차를 타는 것이고, 그 속에는 성령님도 항상 같이 타고 계시는 것이냐?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을 타야 유명한 것이냐? 예수님도 그 날에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을 타고 오시느냐? 그러니까 테레비에 안 나오면 유명하지도 않은 거냐? 그 날에는 신문이나 라디오를 타고 오시는 게 아니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 오시면 정치계고 거짓 목사고 간에 아비귀환이다. 정신을 못 차린다. 고통적인 면에서 정신을 못 차린다. 너무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린다가 아니라 세상에 임할 고통 때문에 사람들이 기절을 한다. ‘사람들이 기절할 정도라면 이 지상에서 어느 정도 사건이 되겠구나이게 나오는 거다.

 

예수님 앞서서 가는 자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거룩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할 때는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말이다. 소경은 귀가 밝은지라 그 소리를 척 알아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했다. ‘거룩한 예수여. 진리통치의 예수여.’

 

눈 뜨기를 부르짖는 그 소경에게 앞서가는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시끄럽다. 조용히 하라했다. 그러니 소경이 얼마나 큰소리로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러자 소경은 죽일 테면 죽여 봐라하는 식으로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했다.

 

앞선 자들이 소경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지는 않고 눈 뜨기를 바라는 소경에게 억압과 강압을 쓴다. 말하자면 영원히 소경으로 살라는 저주의 소리다. 예수님 앞서서 가는 자들이 이런 짓을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런 일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실력적으로 예수님을 앞섰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주관적으로 앞선 자들에 의해서 영의 눈을 영원히 못 뜨고 육신이 죽은 자들이 몇 명이나 될까? 수없이 많을 거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 이 소경을 불쌍히 여기겠느냐? 누가 영적 소경을 불쌍하다고 알아보겠느냐? 육적 소경 그 이면의 영적 소경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어느 누가 자기가 영적 소경됨을 고백하겠느냐? 영적 소경이라면 왜 하나님께 눈 뜨기를 기도 안 하느냐? 육적 소경이 아니니까 그냥 만족한 거냐?

 

예수님은 소경을 아시고 고쳐주길 원하신다. 가던 발걸음을 멈춰서라도 고쳐주기를 원하신다.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그들이 천국복음을 보는 눈이 뜨이기를 원해서 고쳐주시려고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육신의 눈을 떠서 잘 보니 영적 소경이 아니라고 하면서 고침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영적 말씀을 못 알아듣는 귀머거리인 줄도 모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아닌가? 결국 그들도 형벌의 심판으로 죽고 말았다.

 

육신의 눈으로 본다고 하는 자들 중에 영적 소경인 자기를 모르고 죽는 자도 수없이 많다. 오늘날 목사님들 중에도 많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보낸다면 영의 눈을 띄워서 보내는 건데 목사가 영적 소경이라면 이건 누가 보낸 것이냐? 그러면 이 소경목사가 뭘 말하겠느냐? 세상 말밖에 더 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성경은 눈에 안 열리고 세상밖에 없다.

 

영적 소경의 뜻을 모르면 바리새교인들처럼 성경에 무관심하거나 영적 눈이 뜨기를 원치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육신의 눈으로 성경글자를 보고 읽고 외우고 아브라함의 역사를 안다는 그것이 영적 눈이 뜬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그들과 똑같은 자가 많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7816 히브리서 성도의 믿음 생활 히11:1-9  강승호목사  2023-04-22 194
17815 요한계시 (계시보기)파괴된 바벨론을 다시 건설하는 기독교인들/외. 계14:8  김경형목사  2023-04-21 52
17814 요한일서 사랑의 언어 다섯 가지 요일3;18-19  전원준목사  2023-04-20 252
17813 누가복음 신앙의 부부 눅1:5-13  강승호목사  2023-04-19 127
17812 마가복음 성도의 기본 된 삶 막1:35-39  강승호목사  2023-04-18 157
17811 히브리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19-25  배장섭 목사  2023-04-18 211
17810 로마서 (계시보기)성도는 세상법 위의 생명법으로 살아야 한다. 롬8:2  김경형목사  2023-04-16 43
17809 누가복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눅17:1-10  김경형목사  2023-04-16 87
17808 요한복음 38년 된 병자의 믿음. 요5:3--9  김경형목사  2023-04-16 94
17807 요한복음 (계시보기)육신이 말씀이 되는 게 신앙이다. 요1:14  김경형목사  2023-04-15 62
17806 창세기 (계시보기)가인의 아내는 누가 지은 인간인가? 창4:16-  김경형목사  2023-04-14 67
17805 고린도후 확신하는 신앙의 축복 고후13;1-5  전원준목사  2023-04-13 230
17804 마가복음 주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막10:17-22  강승호목사  2023-04-11 93
17803 요한복음 (계시보기)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면 나는? 요6:63  김경형목사  2023-04-10 41
17802 누가복음 만일 네 형 제가 죄를 범하거든. 눅17:3-5  김경형목사  2023-04-09 51
17801 요한복음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5:4-6  김경형목사  2023-04-09 63
17800 고린도전 부활의 종교 고전15:12-19  배장섭 목사  2023-04-08 346
17799 요한계시 (계시보기)십사만 사천 인 맞은 자와 환난 받고 나온 많은 무리. 계7:4-  김경형목사  2023-04-07 45
17798 누가복음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16:19-31  정용섭 목사  2023-04-03 132
17797 디모데전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정용섭 목사  2023-04-03 138
17796 예레미야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4:11-12, 22-28  정용섭 목사  2023-04-03 98
17795 누가복음 왜 예수 제자인가? 눅14:25-35  정용섭 목사  2023-04-03 69
17794 누가복음 복된 삶의 역설 눅14:1, 7-14  정용섭 목사  2023-04-03 96
17793 히브리서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12:18-29  정용섭 목사  2023-04-03 101
17792 이사야 포도원 노래꾼 사5:1-7  정용섭 목사  2023-04-03 78
17791 누가복음 준비된 삶이란? 눅12:32-40  정용섭 목사  2023-04-03 134
17790 요한복음 내가 믿나이다 요11:25-27  강승호목사  2023-04-03 104
17789 누가복음 나사로를 내 형제에게 보내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19-17:3  김경형목사  2023-04-02 50
17788 요한복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5:3-4  김경형목사  2023-04-02 50
17787 누가복음 (계시보기)성도의 원수관. 눅18:1-  김경형목사  2023-04-01 52
17786 누가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눅23:32-38  강승호목사  2023-03-30 116
17785 마태복음 내가 저야 할 십자가(고난주일) 마16;21-27  전원준목사  2023-03-30 261
17784 베드로전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 벧전2:6-8  강승호목사  2023-03-29 96
17783 요한복음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 요11:1-53  최주훈 목사  2023-03-27 118
17782 누가복음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눅16:23-31  김경형목사  2023-03-26 47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