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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

히브리서 배장섭 목사............... 조회 수 138 추천 수 0 2023.08.06 06: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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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11:13-16 
설교자 : 배장섭 목사 
참고 :  
더 나은 본향
본문말씀 히브리서 11장 13-16절
1. 서론
어떤 이대 신학 교수님이 ‘동물도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받는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구원하시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나 어쨌다나 그래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개에게 세례를 주더군요^^ 하하하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창조가 아니고 ‘하나님이 배 아파서 낳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것 역시 헬라 철학 유출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사실 깊이 조사해 보면 철학이나 천체 물리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역시 유출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죄의 전적부패나 유전, 의의 전가, 구원의 서정이나 피가름과 같은 교리들인데, 하나 같이 추상적인 개념들을 마치 물질적인 개념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 헬라 유출설의 영향을 받게 되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순종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의식이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지금까지 봤던 것처럼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거짓 복음에 속지 않으려면 우선 ‘죄 지어도 괜찮다’거나 순종을 부정하면 무조건 100% 거짓 복음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이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 점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지고 ‘더 나은 본향’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2. 본론
우선 먼저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우선 ‘증언하였다’는 말은 ‘호몰로게오’라고 해서 언약을 체결할 때 약속에 대하여 ‘동의하다, 계약하다, 인정하다, 찬성하다’라는 뜻이지만 문제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약속을 받지도 못했는데, 약속에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고^^ 창세기 15장 7절에 보면 타는 횃불 사건 때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 구체적인 의미를 그 다음 12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약속 성취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에 내려 간 후 4백년이 지난 이후에 성취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15절에 보면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히브리 기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 약속의 땅에서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증언하신 것은 그렇게 자신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지만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좋게 생각하고 기꺼이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애초 약속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은 미래에 성취될 약속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했다고요?
14절에 보면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문법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만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이런 사실들에 근거하여 말하는 바는 그들이 본향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번역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는 삶을 가리키는데, 문제는 그 다음 15절에 보면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는 말씀은 본향은 본향인데,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고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 다음 16절에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한 마디로 간단하게 말하면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천지나 여호와 증인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해서 이 세상에서 영생불사하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작 그렇게 주장한 이만희 할아버지는 이제 곧 죽을 때가 되어 거동조차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천지 사람들은 사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제는 아예 교회 침투하는 것을 넘어 드러내 놓고 노방전도까지 열심히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는데, 이만희 할아버지가 죽어야 비로소 깨달으려나?
제가 볼 때 서로 너도 나도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들고 일어나고, 통일교나 ‘하나님의 교회’를 볼 때 이만희 할아버지가 죽어도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또 다른 거짓말에 속아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절대로 겉모습이나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깊이 따지고 깊이 들여다봐야 됩니다. 이유와 조건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거든 무조건 100%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거짓에 속아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증명의 종교이며 거짓과 참,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별의 종교입니다. 어떻게 죄를 지어도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에 순종하셨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런 잘못된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하기야 이해 안 되는 것이 어디 그 뿐입니까?
‘오직 예수만의 구원의 길’을 부정하면 그것이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WCC 종교통합을 교묘하게 끌어들여 기독교를 우상숭배 종교로 전락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신사참배에 가담하도록 만들었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가 단지 평소에 천사처럼 온유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도 없이 검소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기독교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면 동상까지 만들어 대대적으로 추앙하는 목사가 있는데, 그런 모습이 저 신천지와 무엇이 다릅니까?
사탄은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고 접근하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되는데, 제가 볼 때 이신칭의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제가 조사한 바 100% 거짓말입니다. 거기에 속아서 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죄를 조장하도록 할 목적으로 율법을 좇아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할 짓이지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하든지 간에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봐야 되는데, 16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므로”라는 말씀은 ‘그 결과’ 즉 앞에서 지적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지적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미래에 태어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습니까? 대단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그네’ 인생이 얼마나 고달픕니까? 위험 부담도 많고 결코 안정적일 수 없는 삶입니다. 그리고 ‘외국인’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는데, 자국민이 안정적일까요? 외국인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손이나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지금 당장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기 고향 본토 친척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당장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지 않고 먼 훗날 그것도 죽어서 얻게 될 천국과 자기 후손들을 위하여 자신의 현재의 편의나 유익을 기꺼이 포기하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 불편한 삶을 기꺼이 선택한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도’ 즉 십자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을 대속의 의미로만 생각하거나 아니 심지어 죄를 마음대로 짓도록 조장할 목적으로 십자가 지신 것처럼 오해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님이 저녁 식사를 하시던 중에 갑자기 식사를 잠시 멈추시고 일어나 대야에 물을 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란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이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고 거절합니다. 왜?
당시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고,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면 씻겨 주었지 주인이 종이나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아니, 예수님이 발 씻어 주시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요?
놀란 베드로가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요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무튼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그 다음 13-14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 다음 1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옳으니라”는 말씀은 흔히 의를 가리키는 “디카이오스”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니라 “빚지다, 의무를 지다”라는 언약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옵페일로’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야 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버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되는데, 그러니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심이 그 최후의 만찬 때 십자가를 앞에 놓고 지금 그런 삶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천주교 같은 경우에 뜨레스디아스 영성훈련에서 세족식을 하고 임직 때에도 세족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세족식을 만들어 시행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으로 서로 섬겨야 된다는 것을 시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세족식을 수천 번을 해도 교황처럼 섬김 받고 싶어서 그렇게 높이 되기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말짱 도루묵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이 죄를 지으신 것도 아닌데, 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일까요?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그 고난과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만약에 단지 죄를 없애거나 용서해 주실 목적이었다면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에 아들로 하여금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하실 필요 없이 그냥 용서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은 단지 전제 조건일 뿐입니다. 무엇을 위한 전제조건?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허물과 죄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예수님처럼 내가 대신 상대방의 부족함과 허물과 죄를 책임지겠다는 정신 자세로 서로 서로 권고하고 이끌어 주고 도와 주고 용서해 주고 그 허물과 죄를 덮어 주는 그런 섬김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걸고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한 형제자매가 되는 언약을 맺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한 형제자매가 되는데, 그 중에서 예수님이 우리 맏형이 되시고 우리는 다 그의 동생이 되는데, 그냥 단순히 그렇게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렇게 동생이 된 모든 성도들은 맏형의 삶을 본받도록 할 목적으로 우리를 한 형제자매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그래야 더불어 함께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요.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기독교의 위기를 걱정하면서 나름 그 대안을 제시하지만 제가 볼 때 가장 큰 위기는 마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과거와 달리 이제 우리나라는 배가 너무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가 부르다보니 기도원에 가서 굳이 애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죽어서 가는 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세상이 너무 좋잖아요?^^ 역사 이래 지금처럼 이렇게 좋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왕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습니다. 너무 먹어 배가 불러 욕이 나올 지경입니다.^^ 이런 살기 좋은 시대에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속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면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서서”라고 기꺼이 화답할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조금만 더 뒤에 오시옵소서”라고 거절하고 싶지 않습니까?^^
실제로 옛날에 제가 예수님이 빨리 오시기를 고대해야 된다는 설교를 했다고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 좀 더 살고 싶은데, 그런 설교 하지 마세요”라고 어떤 권사님께 혼이 났던 적이 있는데,^^ 아무리 그래 봤자 이 세상이 저 천국만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무 이 세상에 낙을 두고 이 세상에 안주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러다가 저 천국을 놓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야만 하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마시고, 저 천국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늘 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기심으로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잘했다 칭찬 받을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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