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5:35-38 |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35절-38절: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5절: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세례요한은 일시에 비춰주는 빛이니 ‘저 분이 메시아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예수님을 정확하게 비춰주는 역할이다. 요한에게 불을 당겨준 분은 하나님이다. 하늘의 불이 붙은 인도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정확하게 지시해 준다. 교회에서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 죽은 지식에서 사는 지식으로, 죽은 도덕성에서 신적인 도덕성으로 차원 높게 고상하게 살려야 한다. 신의 역사가 되게 해 주어야 한다.
36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세례요한이 주님을 증거하는데 주님은 당신이 세례요한보다 더 큰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을 사람 대 사람으로 들으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무시하고 자기 자랑만 하는 것 같다.
만일 다 같은 주의 종인데 ‘내가 아무개보다 더 큰 증거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하면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까? 남을 무시하는 소리로 듣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 남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주님의 인정이 들어가는 거니까 그 말은 마땅한 거다. 인간들이 듣기에는 자기 자랑 같으나 주님이 시인해 주는 자랑이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랑은 자기 교만일 뿐이다.
교회에서도 자랑이 많은데, 나이 자랑, 성경도 모르면서 먼저 믿었다는 자랑, 교회에서 무슨 일을 맡아서 한다는 자랑, 총회장 노회장을 한 자랑, ‘외국 어디에서 박사증을 땄다네’ 하는 자랑 등등의 자랑은 천국의 성질에 해당이 안 된다.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천국에 해당되는 것으로 자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천국자랑을 할 때 ‘자기만 제일인가?’ 라고 하면서 인간자랑으로 듣지 말고 주님의 말로 들어야 자기에게 유익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례요한보다 더 큰 증거가 뭐냐?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영적인 역사다. 이 역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서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신의 역사다. 세례요한은 ‘저 분이 메시아다. 어린 양이다’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식이라고 하면 주님의 증거는 우리가 지시해주는 그대로 하면 그 분을 만나게 되고, 이러면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밭에 옳은 진리지식이 떨어지면 자기 속에서 가치판단이 나오게 되어 있다. 세상 것은 아무리 좋아도 궁극적 결과적으로 불에 타진다. 사람이 불타질 세상 것을 목적으로 살면 이게 죄요 형벌이다. 물질은 자타의 구원을 위해 이용 활용 사용하는 건데 세상을 누릴 목적으로 쓰면 이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형벌이요, 못 가져도 형벌이다.
자기 속에서 세상 것을 가지고자 생각하는 그 요소가 세상 것이요 불에 타질 것이라면 많이 가지건, 적게 가지건, 못 가지건 심판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대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소원 목적으로 쓴다면 이 사람은 부자여도 천국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요, 물질을 조금 가졌어도 하나님 앞에 구원을 이뤄가는 사람이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사람이 믿음이 크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눈이고 선악과 먹은 눈이다. 세상사람들은 전부가 물질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서로가 못 믿는 세상이 된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은 상대의 소원 목적관을 보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안다.
요즘은 결혼하기 전에 미리 살아보고서 결혼을 결정한다는데, 이건 소돔 고모라 세상이다. 임시로 같이 살다가 내 마음에 안 맞으면 갈라서겠다는 건데, 이런 정신으로 살아보니 마음이 잘 맞아서 결혼을 한다면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언제고 돌발적인 사건이 오는 거고, 사는 형편이 올라갔다 내렸다 하는 세상인데 이럴 때마다 두 부부의 성격과 성질이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이 때 서로 마음이 안 맞으면 어떻게 할 거냐? 결혼 전에 가지고 있는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살고 있는데 서류상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서로 마음이 안 맞아도 계속 살아지는 거냐? 참으로 어리석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성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는 건데 세상사람들은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을 안 하고 자기 생각대로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옳은 말이고 타당성이 있는 말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흉악하고 흉포한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일단 살아보고 결혼을 하겠다는 말도 여기에 속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휘둘리면 안 된다. 세상은 핵폭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교회에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교인들이 세상에서 붕붕 떠다니게 된다.
자기 속에서 말씀이 깨달아지고 주님의 성품이 이뤄진다면 이건 성령님의 역사다. 신의 역사가 자기 속에서 일어난 거다. 교회 인도자들은 성도 각자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진리이치의 교훈으로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말세시대라서 빛이 없는 거짓된 인도자들이 많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가 되면 이 사람은 주님의 이런 저런 면의 마음이 깨달아지고 천국에 대한 욕심이 커진다.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가지는 게 가장 가치가 있는 거고 복된 거다. 반면에 세상 것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은 썩은 마음이요 변질된 마음이다.
37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누가 예수님을 증거 했다고 하느냐? 하나님이다.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려는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냈다’ 라고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언행심사 전부가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으로 되었다는 거다.
본문을 보면 누가 누구를 증거했다고 하느냐? 아버지께서 보내셨으니 아버지께서 증거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다는 증거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서 예수님 위에 임했는데, 이건 온유의 역사라는 뜻이고, 그 다음에 이적과 기사와 표적으로 귀신을 쫓아냈는데, 귀신의 활동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등의 역사를 통해 증거를 하셨는데, 이런 일은 하늘로부터 오신 이가 아니면 안 되는 거다.
세상의 병원에서는 육신의 병은 고치지만 영적인 병은 못 고친다. 우리가 주님의 온전의 기준을 놓고 보면 모든 사람은 정신과 소원 목적이 비뚤어지고, 꺾어지고, 꼬부라지고, 휘어지고, 옆으로 빗나가 있고 한 게 정말 많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의 이런 성품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쳐야 하는데 자기가 어느 쪽이 병이 들었고, 어느 쪽이 휘어져 있는지를 모르면 고치지 못한 채 살다 죽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 집안 살림을 살 줄도 모르고, 이건 일반사람들보다도 못한 거다. 늘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의 좁고 꼬부라진 속은 하나도 못 고치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 주면 마귀의 말로 들리고, 말마다 남 탓이고, 남 흉이고, 잘 한 것은 자기 탓이요, 못한 것은 남 탓을 한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의 잘못된 성격과 성질도 못 고치고 믿기 전의 성격과 성질 그대로 산다면 이건 비정상의 사람이다. 귀신이 들린 거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도 금방 알 수 있는 귀신들린 사람을 보는 것 이상으로 올라가서 일반적인 귀신이 들리지 않았어도 정신과 소원 목적의 성질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 산다면 이것도 귀신이 들린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귀신이 들린 것은 신령한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봐야 보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면의 귀신이 들린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귀신이 들리고도 들린 줄도 모르고, 자기를 고칠 줄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말을 하게 되니 이건 미친 거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물이 없으면 이 사람 속에는 귀신이 떼거지로 살게 된다.
믿는 사람이 마음 속에 자기를 생생하게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게 아니라 늘 세상 거, 먹고 마시는 거, 집, 자가용 등등이 가득 들어 있다면 이건 죄다. 불에 타지는 것을 ‘이게 내 하나님이다. 이게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라고 하면서 이런 것을 소원 목적하고 붙들고 있으면 이 사람은 미친 거다. 주님의 사람으로 고치라고 이 말을 하는 건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 거다.
창세 이후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구원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 말고 또 있느냐? 선지 사도들이 한 능력적인 일도 주님이 주신 거고, 하늘로부터 주신 거고, 둘씩 내보내서 귀신을 쫓게 하고 병자를 고치게 한 것도 주님이 주신 건데,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은 구원의 일을 하시는 주님을 계시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거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주님만이 하시는 거다. 절간의 중이 하는 게 아니다. 공자가 하는 게 아니다.
속사람을 성품적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주님의 역사요, 성령님의 역사다. 목사는 직접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목사의 말을 인격적으로 받으면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 속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시게 믿어야지 오만 잡귀신이 달라붙게 믿으면 언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겠느냐?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했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했다는 거다. 왜 그럴까? ‘그 형용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출생목적, 인간의 재세기간의 목적, 우리에게 왜 부활이 있는지, 왜 사건 환경이 지나가는 건지, 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말씀을 선포하셨는지 그 윤곽조차도 모른다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이런 저런 사건이 왜 지나가는 건지 그 뜻을 모른다면, 또한 그런 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 윤곽조차도 모른다면 뭐가 되겠느냐?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 속에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거다. 자기 속에 말씀이 없으면 어떻게 말씀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세미한 뜻이 깨달아지겠느냐? 어떻게 진리를 붙잡고 나오는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겠느냐? 또한 어떻게 밖으로부터 주님의 말씀의 의도성이 들리겠느냐? 불가능이다. 자기 속의 양심의 소리도 안 들리고, 밖의 주님의 말씀도 안 들린다.
주님의 말씀은 인격인데, 즉 로고스인데 이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다. 인간 너를 짐승이나 풀이 아닌 사람으로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기준으로 놓고 만든 거고, 세상만사를 돌리는 것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나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나를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함이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든 언행심사, 가치판단, 평가성, 소원 목적이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성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료뭉치가 예수 그리스도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 헤치면 당신의 온전으로 나오게 된다. 따라서 믿는 내가 그 분의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동거 동행 동사 동숙이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격화 성품화 되는 것은 없이 교회만 나오고 헌금이나 하는 것은 바로 믿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은 자동적으로 세상사람들의 정신에 끌려 다니게 되고, 이러다가 세상사람들에게 깔려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실상자요, 곧 로고스요, 영원히 살아계신다. 곧 우리의 원형이시요, 우리의 근본이요, 우리의 근원이다. 반면에 영육 결합체로 만들어진 우리의 몸은 모형이다. 이 모형은 조금 있으면 없어진다. 이 모형이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지라고 하나님의 말씀도 주고 세상에 살면서 사건 환경도 겪게 하는 거다. 이런 현상의 존재가 실상인 주님을 닮는 게 예수 믿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로 실상화 된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나를 이런 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예수를 믿게 한 거다.
인격과 성품 면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닮았는지? 성격과 성분이 얼마나 비뚤어졌는지? 얼마나 눈을 바로 떴는지? 가다가 변질될 것으로 사는 건 아닌지? 자기의 생각이 돈에 의해 노는 건 아닌지? 자기의 생각이 환경에 의해 노는 건 아닌지? 이런 걸 알려면 주님을 기준으로 놓고 판단을 하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당신의 삶을 보여주신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