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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이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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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중곤 목사 |
참고 : | 들풀쉼터교회 |
(2022. 8.21. 주일 예배 설교)
성경 : 요이1:1-3
제목 : 참 사랑
찬송 : 295(417), 은228(사랑), 은111(영원한 사랑), 293(414)
요이1:1-3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참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love)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을 뜻합니다. 유의어로 남을 존경하는 마음, 그리움, 박애(博愛, philanthropy; 인종 ·종교 ·습관 ·국적 등을 초월한 인간애) 등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진짜로, 참말로, 정말로’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정말로, 진짜로, 참말로, 정말로’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은 말은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어, 가능한 이러한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곤 합니다.
사랑이란 말도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면 되었지, 여기다 ‘정말로, 진짜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사랑한다고만 하는 말은 한 번 해 본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랑도 진짜가 있고, 가짜 사랑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에는 사랑이란 말이 자주 기록 되어있습니다.
출20:6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말씀하셨으며, 예수님은 마22:37-40절에 ‘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요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인데,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가는 말 중에 하나가 ‘사랑’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의 입에서만이 아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도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 역시‘사랑’일 것입니다. 그 만큼 사랑은 중요하고,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이솝 우화 ‘여우와 두루미’에서, 여우와 두루미는 서로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먹기 편한 그릇에 음식을 내어 대접합니다. 결국 둘 다 상대방이 만든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 우화 속 여우와 두루미처럼 상대방이 원치 않는 자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억지가 되고 소통이 안 되는 문제에 부딪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데이비드 샤피로’는 또한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샤피로가 일정이 있어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 중에 샤피로를 알아본 택시기사가 고민을 말했습니다. “어제는 새벽 2시까지 일을 하다 녹초가 돼 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내가 그때까지 잠을 안 자고 울고 있더군요. 아들 녀석이 기도를 안하고 자려기에 뭐라고 했더니 대들더랍니다. 저는 당장 아들을 깨워 호되게 혼을 내고, 기도를 시킨 뒤 엄마에게 사과하라고 시켰습니다.”말을 하면서도 조금 찜찜한 표정이던 택시기사는 넌지시 샤피로에게 물었습니다.
“솔직히 제 행동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괜히 짜증을 아이에게 풀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사랑해서 그랬다는 걸 아이도 알겠죠?”샤피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랑한다면 무슨 일이든 해도 괜찮을까요?”택시기사는 한동안 묵묵히 운전만 하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말이 맞습니다. 오늘 돌아가 아들에게 사과해야겠네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사랑은 받는 상대방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말 한글에는 사랑이라고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헬라어에서 사랑의 종류에는 5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에피투미아(Epithumia; 이성적 사랑), 2. 에로스(Eros; 감성적 사랑), 3. 스톨게(Storge; 가족간의 사랑), 4. 필레오(Phileo; 친구간의 우정등, 헌신적 사랑), 5. 아가페(Agap;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등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1992년, 미국에서 출판된 이래 지금까지 40여 개 국 언어로 번역될 만큼, 1,000만부 이상이 팔린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서, 이 책의 저자 ‘게리 채프먼’(Chapman, Gary)박사는 사랑의 언어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제1의 사랑의 언어는 ‘신체 접촉(스킨십)’이고, 제2의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 제3의 사랑의 언어는 ‘소중한 시간(함께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제4의 사랑의 언어는 ‘선물 나누기’이며, 제5의 사랑의 언어는 ‘헌신의 행동(봉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듯 언어는 꼭 말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눈빛 하나, 마음에 담긴 선물도 사랑의 언어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성공한 작가 중 한 사람인‘리처드 폴 에번스’(Richard Paul Evans)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변화된 작은 행동을 통해 성공적으로 변화시킨 케이스입니다.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수년간 부인과의 다툼 끝에 마음과 영혼이 지쳤고 마침내 이혼의 위기가 찾아오자, 그때 에번스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하나님께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결혼은 잘못되었고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내가 좋은 사람인줄 알고는 있지만 그들 부부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목이 쉬고 목소리는 갈라진 채 그는 결국 샤워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합니다. 그때 갑자기 깊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넌 아내를 변화시킬 수가 없다. 단지 너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 제가 아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면, 저를 다른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영감이 찾아왔고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후에 결혼생활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결혼생활이라 할 만큼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던 위기는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럴 때,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위기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때이며 지혜를 구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바로 언어의 변화입니다. 현재 내가 상대방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지,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고, 처음 사랑하던 그 때로 돌아가 ‘사랑에 빠진’ 감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참 사랑은 나의 사랑이 소중하고 아름답듯 그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사랑 또한 아름답고 값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참 사랑을 위해서, 나의 자유가 중요하듯이 남의 자유도 똑같이 존중해 주는 사람. 남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자기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실수를 감싸 안아주는 사람. 남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옳지 않은 일이라 단정 짓지 않는 사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너 때문이야 라는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야 라며 품어줄 줄 아는 사람. 기나긴 인생길에서 1등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기 보다는 비록 조금 더디 갈지라도 힘들어하는 이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갈수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받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작은 것이지만 언제나 나누고 섬기려는 마음으로 더 나누고 섬기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 사랑으로 사는 아름다운 사람인줄 믿습니다.
사랑의 3대 정의라는 글에 보면
첫째,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이해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사납게 되고 이해하려할 때,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아내에게만 한없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내가 한 마디 하면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라고 윽박지릅니다. 사람이기에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힘써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으면, 후에는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랑은 후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상처 주는 소리는 잦아들고 그윽한 눈길과 소리 없는 헌신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기도만 남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한 어린이가 팔이 부러졌는데, 그때 엄마가 “얘야! 괜찮다! 팔도 부러져봐야 튼튼해져!” 그 말을 듣고, 아이는 엄마가 잔인하게 보이고 “내 엄마 맞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다가 팔이 아파 잠에서 깨었는데, 엄마가 자기 팔을 만지며 울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자녀가 속상해 슬퍼하면 겉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속으로는 마음아파 간절히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침묵 속에서 더 깊을 수 있습니다. 침묵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보다 침묵가운데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랑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셋째,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급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끔 저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와 교인과 가정과 이웃을 생각하면 나를 참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사랑은 한 결 같이 변함이 없으신데, 우리는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참아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내 탓이 아닌 남의 탓만 하면서 불행을 자초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욕심,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마저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전13:4-7절에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값없이 먹을 것을 주시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소외된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낮은 자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시고,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도, 예배를 드려도, 공부를 하고, 직장 일을 하며 일상을 살아갈 때도,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사랑하고,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 사랑은 하면 할수록 우리도 주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24:3-14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하시면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형편에 따라 일을 쉽고 편하게 치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목적이 되어 행해지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순종이라는 명분으로‘주님의 위하여’ 라고 말하기만 하면, 교인들은 모두 주님의 일로 알고 도무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아멘’으로 모든 불법을 처리하는 잘 못을 행하므로, 진리에 바로 서야하는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그 정당성을 잃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사랑해야하는데, 그 사랑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어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바로 깨달아 무슨 일을 하든지, 진리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과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가톨릭 사제이며,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친,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고,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위로와 만족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것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은혜찬양 111장 ‘영원한 사랑’(김민식 자사/작곡)이란 복음찬양 시입니다.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사람은 / 사랑의 진리를 알지요 / 참 사랑은 가난함도 부요함도 없어요 /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와 함께 나눠요 /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우리도 이 복음찬양 시와 같이 입술의 사랑이 아닌, 참 사랑으로, 가난함도 부요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님과 함께 나누며,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므로,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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