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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07 추천 수 0 2023.09.03 12: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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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28-40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928-4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앞서서 가시는데, 앞서서 가는 그 분이 어디로 가시느냐? 예루살렘으로. 하나님과의 평화의 도시, 화목의 도시, 의사단일의 도시로 앞서서 가신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는 그 걸음걸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서 앞서서 올라가는 그 걸음걸이, 본보기의 그 걸음걸이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한다. 먼저 믿은 사람이 옳은 길이라면, 신앙의 진로가 생명의 길이 분명하다면 먼저 믿은 사람이 본이 되고 영능 실력자가 되면서 앞서서 가야 한다. 앞서지 못하고 수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모양이라면 어떻게 다른 사람 앞서서 갈 수가 있느냐? 안 된다. 이러면 항상 다른 사람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게 된다. 앞선 정신이 없다. 본질로 바로 들어가 있다면 앞서서 갈 수가 있는데 본질이 아닌 그 정신 사상을 가지고 앞서서 가려고 하는 그것도 안 된다.

 

예수님께서 앞서서 가시는 그 걸음걸이는, 첫째는 창세 이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에서 한 번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거룩한 역사, 그 성역을 이루시려고 가시는 거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그 구원을 향해서 가시는 전무후무한 주님의 그 발걸음걸이, 그 성역이다.

 

우리 역시 전무후무한 한 번밖에 없는 거룩한 성업을 이루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삶의 걸음걸이다. 거룩한 성역을 이루려고 올라가는 성도 자기의 발걸음이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정신이다. ‘하며 같이 가는 게 아니다. 같이 갈지라도 성역을 이루기 위한 개개인의 거룩한 발걸음이 돼야 한다.

 

어제 걷는 걸음은 어제로 끝난 거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일어났음에도 오늘도 어제와 같은 그 길로 가는 건 안 된다. 자기의 삶의 걸음걸이가 어제 것이 틀렸다면 오늘은 생명 길, 새로운 길로 정해져야 한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앞서서 가시더라하는 말씀 속에는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의 걸음걸이, 존재, 성역이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이고, 앞서서 간다는 것은 그 속에 나를 따라오너라하는 음성이 들어있는 거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랐다. 제지 될 자는 그 걸음걸이를 따른다. 성역의 걸음걸이를 따른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따라가야 하느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뭐 하러 가시는 것이냐? 역사적으로 보면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러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기도 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는 것은 살려고 따라가느냐, 죽으려고 따라가느냐?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느냐? 왜 따라가느냐? 예수님의 앞서 가시는 그 걸음걸이는 내 구원이요 우리의 구원이 들어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냐?

 

날마다 제 십자가는 안 지고 세상에 속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따라가는 자가 많다. 날마다 죽는 것이 없으면 클라이막스는 없다. 예수님을 따라서 올라가다가 예수냐, 바라바냐하는 사건이 왔을 때 돈을 받고 바라바를 놓아주게 되면 돈은 번다. 그러나 이건 달라지는 거다. 왜 따라가느냐? 뭐 하려고 이 진리를 따라가느냐? 죽을 각오가 없이 되는 거냐? 목사 후보생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따르는 거냐?

 

주님의 죽음이 사람이 보기엔 죽는 것 같지만 주님은 지금 면류관을 장만하러 가는 것이다. 최대 수입을 얻는 장면이다. 성령을 눈을 가진 자는, 그 함축된 뜻을 아는 자는 주님의 죽음 안에 최대의 구원의 수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을 바로 따르려면 먼저 온 가정이 주님의 일을 위해 한 곳으로 집중시켜라. 그리고 세상 살림살이에 관한 것은 모든 면에서 주님께 목적을 두고 씀씀이가 되라. 그런데 아무리 이 진리를 배워도 그렇지를 않고 주격이 세상으로 들어있다면 아이들 교육이나 살림살이 등 모든 면에서 돈 씀씀이가 주님의 일에 대한 생각은 깊지를 않고 세상 쪽으로 들어있으니 그 결과는 너는 불 보듯 빤하다. 이건 시험이 들어있는 거고, 필연적으로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다.

 

모든 면에서 자기의 분수, 위치, 직분에 맞는 게 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공적이건 사적이건 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다. 공적인 것이라서 공적으로 쓰고, 사적인 것은 네 마음대로가 아니라 사적인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공적이다. 공의로움이 붙어야 한다.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말을 할 때도 공의로움이 들어가야지 사적 개인감정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말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공의로움이 들어있으면 순종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가정이 그게 아닐 수가 있다. 무슨 말이냐? 아내에게 꽉 잡혀서 사는 남편이 옳은 것에 대해 무슨 큰소리를 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목회를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으로 들어가야 공의에 순종이다. 그런데 이 순종을 무슨 종노릇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남편인 아담이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면 순종을 해야지 안 그러면 하나님의 애정권 치리권 사랑권에서 네가 떨어져 나간다.

 

이 진리를 받으면 각자 자기 마음속에 양심에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둘밖에 없는 거다. 이 진리는 그렇다. 진리를 따르면 네가 사는 거다. 그래서 아무리 장로라 할지라도 그 삶의 위주가 직업위주가 돼서 주일날 예배에 빠지면 우리교회에는 못 있는다. 스스로 빠지게 돼 있다. 빠질 때는 꼭 군소리를 하고 나간다. 그 이유는 자기와 안 맞는다 그 말이다. 사람이 다 잘못될 수 있는 거지만 하나님의 옳은 것에 맞추려고 하는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정신이 아닌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으로 못 들어온다. 믿음의 사람이 못 된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인데, 이 평화는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면 안 된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고. 그래서 이건 거룩한 역사다. 성도 자기의 삶이 그 정신으로 들어있다면 거룩한 삶이다. 우리의 이룰구원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삶의 걸음걸이가 그렇게 이뤄진다면 예루살렘 안에서 성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9-34: 벳바게 고을은 감람산 근처에 있고 무화과가 많이 난다. 그리고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고을이 또 벳바게다. 그러니까 벳바게 맞은 편 마을이라고 하니까 예루살렘을 말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작은 동네인 듯하다. 아니면 베다니를 말하는 것인지? 어쨌든 어느 동리의 어느 누가 예수님을 위해 나귀새끼를 준비한 것일까?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준비한 것일까? 나음을 받은 문둥이 집에서 준비한 것일까?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가 준비한 것일까?

 

준비를 한 이 자는 스가랴 9:9에서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무명의 성도가 한 그 예언을 이뤄드리려고 항상 준비를 해 둔 것일까? 미래를 보는 그 성도의 신앙의 안목. 어쨌든 준비를 하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가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은혜를 못 받으면 준비를 못한다. 은혜를 받은 자가 준비를 한 것이지 이방인이 준비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 많이 있다. 아브라함도 큰 은혜를 받았다. 처녀 마리아도 은혜를 받았다. 이 외에도 많다. 하나님으로부터 특수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그래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어떤 사람은 자기의 몸을 드렸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역을 위해서 준비된 것은 주님이 알아서 다 쓰시는구나. 주님이 쓰시면 그게 다 날아가 버리느냐? 준비를 해 둔 그 성도의 신앙심을 주님이 모르실까?

 

성역에 동참성도 다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 마지막 때는 거짓 종들이 많은 때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예수님과 같은 천국복음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 구원의 일에 적극 참여하고 수종들고 가야 한다. 그게 자기 복이다. 성경에 선지자를 대접하니 무슨 상을 받더냐?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종이 나온다. 그럼에도 자기 자녀를 진리의 신앙노선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가 있느냐? 그러면 자식의 앞길이 잘 열리겠느냐? 천지창조의 모든 역사의 진행자는 주님이신데?

 

적극적인 자원적 순종이 아니면 자기의 때는 없는 거다. 인생의 시간 안에서 드는 자기 나이를 생각해 봐라. 그게 왜 있는 거냐? ‘너의 때가 언제인지 아느냐하는 물음이 그 안에 들어있다. 개인적으로 보면 젊었을 때 열심히 배우고 듣고 깨닫는 그 때가 자기 때이다. 늙어서는 모든 게 삽시간에 지나간다. 죽을 때밖에 없다 그 말이다. 젊을 때 죽을 준비를 하라 그 말이다. 죽을 준비를 하는 것도 성역의 길로 가는 준비여야지 수의를 준비하는 게 준비가 아니다.

 

자기 때가 언제인지 지혜로운 자는 그걸 안다. 자기의 때를 남기면 나중에 그만큼 힘들어지고, 더 멀어지면 더 힘들어지고, 더 멀어지면 끝난 것이다. 그 때는 자기가 하려고 해도 너의 때가 아니다. 진리를 받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가 없으면 구원은 없는 거다.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는 안 된다. 우리교회에서는 그건 안 통한다. 시험에 든다. 주님의 집은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항상 말씀으로 채워지고 깨끗해야지 오만 왕들이 와서 제각기 왕 노릇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주님의 큰 구원운동은 인간 자기의 좁은 주관적인 계획에 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의 일이지 주님의 성역은 아니다. 종은 그 위치 그 자세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주어진 일이 없으면 주인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가만있는 것이다. 주인이 이걸 한 후에 이걸 하라하면 그대로 순종이 들어가야 하는 거다. 그리고 주인이 집에 없을 때는 주인집에서 배우던 그것을 가지고 주인 대신 다스려 나가는 거다.

 

교회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들 줄 모른다면 이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아닌 우리가 있는 거다. ‘우리가 함께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은 우리우리안에 있다. 주님 안에 든 우리는 주님의 의사단일에 맞춰진 것이고 주님도 이것을 우리라고 한다. 우리가 아니면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성역의 역사가 진행이 될 때에 우리 모두가 모든 면에서 동참하고 수종들고 가야 하는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할 때 그 말 한 마디에 이유가 붙을 수 없다. 그런데 거짓 종들도 이 성구를 쓸 수 있다. 아무 집에나 가서 이 집 내놔라. 주가 쓰시겠다한다면? 성경의 영적 뜻을 깨닫지 못하면 오만 사기꾼이 날뛰게 된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운동에 쓰심이다. 여기에 이유가 붙을 수 없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의 구원운동에 쓰심이기 때문이다.

 

주님께 나귀새끼를 드린 이 무명의 성도는 그 정신 사상 신앙사상이 주님과 영감적으로 통한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보내지 않은 자가 무명의 성도에게 가서 주가 쓰시겠다하면 나귀새끼를 덜렁 주겠느냐? 오늘날 사기꾼이나 거짓 종들처럼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달라고 한다면 안 줄까? 말하는 그 사람을 모르면 사기를 당하고 만다.

 

주님이 보낸 사람이 가서 주가 쓰시겠다하니까 무명의 성도가 두 말 안 하고 나귀새끼를 주고받고 한 그것만 생각을 말고 주가 쓰시겠다하는 말 한 마디 속에는 자기 속에 들어오는 영감성이 있는 것이니 그걸 캐치해야 한다.

 

오늘날 주가 쓰시겠다하는 이 말을 아무나 쓸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님이 쓰시겠다함은 우리로 하여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성장되게 하려 하심이요,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해 주려 하심이고, 우리를 주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주려 하심이다. 이 일에 쓰여지는 것은 다 주가 쓰심이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속에는 이 내용이 들어있다. 이게 아니면 주가 쓰심이 아니다. 성경을 그냥 내용 없이, 속에 진국이 없이 넘겨버리면 뭐가 되느냐? 오늘날 교회가 그렇다. 하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속에 진국이 없다.

 

교회의 모든 헌금이 표면적으로 보면 교회를 위해 쓰고 주님을 위해 쓰는 것 같을지라도 종교적 사역적 부흥목적으로 쓰는 것은 그 질이 육적으로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쓰심이 아니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성전에서 뛰어내리라한 것과 같은 명령이요, 그 명령에 순종해서 땅으로 뛰어내리는 땅에 속한 비진리의 운동이니 주님의 쓰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운동의 목적에는 한 푼도 동참할 수 없는 거다.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는 그 소리를 듣는 게 빤한 일인데 왜 그런 일에 동참을 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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