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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이룰구원은 마귀에게 빼앗길 수 있다.

빌립보서 궁극이............... 조회 수 34 추천 수 0 2023.09.07 14: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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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12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토요 교역자 대상 신학 및 성경공부 

우리가 가룟유다를 볼 때 천국에 갔느니 지옥에 갔느니할 게 아니라 이룰구원 면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예수 믿는 사람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만 아니라 열 번, 백 번이라도 가룟유다성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성경을 볼 때 자기가 보여져야지 이게 없으면 은혜가 없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기본구원에 관한 문제는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가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하면 안 된다. 주님도 가룟유다에게 지옥에 간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런 정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는 가룟유다를 보고 깨달아서 주님의 성품으로 잘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 가룟유다를 기록한 거다. 가룟유다를 지옥에 갔다고 정죄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정죄한다.

 

내가 상대방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다른 면의 죄를 짓기도 한다. 내가 상대가 지은 죄를 안 지었다고 해서 상대를 정죄한다면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역시 나를 보고 정죄하게 된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사람들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다면 이건 선악과를 따먹은 거다.

 

가룟유다가 어느 교단에 속했느냐? 사도바울은 어느 교단에 속했느냐? 진리를 주장하는 목사님은 교회에서 흔히 듣지 못하던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진리를 주장하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 어느 교단입니까?’ 하고 묻는 일이 있다. 이렇게 묻는 게 이해가 되지만 상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가룟유다는 어느 교단입니까? 사도바울은 어느 교단입니까?’ 하고 물어봐라. 아무리 정통신학을 하고 교회의 절차대로 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성경을 들고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가지라고 한다면 이 목사는 가룟유다의 정신을 가진 거짓 목사다.

 

정통신학을 하고 교회의 절차대로 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된 사람 중에 이단성을 가진 사람은 없느냐? 그리고 정통교단이라고 하는 곳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싸워서 여러 파로 갈라졌는데, 나간 사람 중에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냐? 신앙은 진리본질을 찾아서 자기를 진리 본질화시키는 것인데 이런 면은 신경 쓰지 않고 외형과 가견적인 것에 신경을 쓴다면 이 역시 가룟유다의 정신을 가진 거다.

 

기본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되는 것이라서 마귀가 터치를 못 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기본구원을 입은 사람에게는 성화구원이 있는데, 나는 성화구원보다는 이룰구원으로 더 많이 말을 한다. 그 이유는 성화구원이라고 하면 도덕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화구원을 말할 때 성경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한 이룰구원으로 많이 말을 하는 거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는 기본구원과 성화구원만 아니라 부활구원과 영화구원도 있는데, 이 부활구원과 영화구원도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되는 것이라서 여기에도 마귀가 간섭하지 못한다. 부활구원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부활시켜서 천국에 데려가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지상을 떠나면서 이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천국으로 가노라라고 하면서 천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면 주님과 함께 그 나라를 다스리고 누리며 사는 것을 영화구원이라고 한다.

 

천국은 모든 게 주님의 마음에 100% 맞는 곳이라서 천국이기도 하지만 마귀가 없는 곳이라서 마찰이나 충돌이나 대립이 없기 때문에 천국이기도 하다. 그런데 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라고 한 것을 보면 천국에도 사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영의 세계를 인간들이 알아듣게 하려고 인간이 쓰는 문자로 기록한 것이라서 문자대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어떤 뜻을 전달하려고 기록한 것을 자꾸 문자 대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계시의 뜻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기본구원과 부활구원과 영화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터치하거나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룰구원은 성도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이뤄나가는 것이라서 마귀나 악령류가 간섭하고 터치를 한다. 그래서 이 이치를 가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거쳐서 사도요한을 통해 교회에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적으로 그대로 전달이 되지 않고 변질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 사도요한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종들에게서 변질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오늘날 교회나 신학교가 이걸 알고 있을까?

 

주님께서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했는데, 지금 어떤 목사님도, 믿음이 있던 없던, 어떻게 가르치건 다 지금이 말세라고 한다. 그리고 성화구원을 말하지 않는 분이 없다. 그러면서 왜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못 볼까? 말세가 가까울수록, 이룰구원을 외칠수록 먼저 자기 고집부터 깨져야 한다. 자기의 고집은 놔두고 성경구절대로 한다고 해서 이룰구원이 되는 게 아니라 자아를 버리고 주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이룰구원이 되는 거다.

 

목사님들은 의례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아침밥만 먹으면 산에 올라가서 종일 방주를 지었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 노아가 농사는 안 지었느냐? 노아가 종일 방주를 지었다는 말에는 재세기간 동안에 자신의 삶 가운데서 농사도 짓고 밥도 먹고 한 것도 다 포함되는 거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전 삶을 노아처럼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서 계속 떠다니기만 했느냐? 농사도 짓고, 짐승도 키우고, 밥도 먹고, 쉬기도 했지만 이런 것 역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사상으로 한 거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사상으로 된 거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사상 속에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으로 덤벼들었던 내용이 다 들어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시험을 이기면서 나갔던 거다.

 

우리가 이룰구원의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면서 듣기만 하고 깨달은 것을 생활에서 써먹지 않는다면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진리를 들었다는 목사가 왜 가정이 쪼개지느냐? 그게 구원이냐? 구원이라고 할 때 누구부터 구원이 되어져야 하느냐? 나 아닌 다른 사람부터 되어지는 거냐?

 

구원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 개체적으로 되어지는 거다. 교회 인도자라면 자기부터 눈을 떠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의 눈의 티를 끄집어내고 고쳐줄 수 있다. 교회 인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교인들보다 바로 서지 못하면 교회를 인도할 수 없다. 목사부터 바로 서야 자는 사람도 깨울 수 있고 물에 빠진 사람도 건져 올릴 수 있는 거다. 가정에서도 부모부터 구원의 길을 가지 않으면 자녀들이 어떻게 구원의 길을 가겠느냐?

 

:에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했는데, 우리가 몰랐을 때 짓는 죄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그러나 안 후에는 맹렬한 진노만 있다고 한다. 이 말씀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믿는 사람이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일종의 고전처럼 생각하기 쉽다. 성경은 자기의 일기장이요 자기를 심판하는 책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인생길이 성경에 있다. 성경으로 나의 길이 열려야 한다. 성경이 닫히면 내 인생길도 막힌다.

 

:에서 여호와의 궤를 어깨에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물을 밟고 멈추자 흐르던 요단강물이 끊어지고 쌓여 섰는데, 일반적으로 흐르던 강물이 멈추어서 갈라지는 일이 있느냐? 불가능이다. 그러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니 죽음의 사해로 흐르던 강물이 법궤 앞에서 완전히 정지한 게 계시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거냐?

 

하나님의 법궤를 어깨에 메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를 모시고, 주님을 모시고이런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러면 강물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흐르는 강물이란 세월을 말한다. 세월에는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든 것은 다 흘러간다는 거고, 시간 속에 든 것은 다 변질이 된다는 거다. 시간 속에 든 인간도 육체적으로 변질이 된다. 인간이 이 강물에 빠지면 그대로 죽음의 사해, 멸망의 바다, 심판의 바다로 그냥 흘러간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사는 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강도 산도 바다도 나무도 다 만들어 놓고 이런 것을 들어서 인간이 어디에 빠져서 흘러가고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가르쳐 준다. 영적 영인성장 면에서 실상적인 자기를 주격으로 세운 사람은 만물 속에서 이런 것을 깨달아서 자기의 오각과 오감성이 막 움직인다. 이런 것을 깨달은 사람과 못 깨달은 사람은 얼마 안 가면 그 작용성이 확 드러난다.

 

밥 한 끼를 안 먹으면 별로 표시가 나지 않지만 며칠을 굶으면 금방 굶은 표시가 난다. 믿는 사람이 배가 고픈 것은 금방 느끼면서 영적인 면에 한 이치라도 더 깨닫고 싶은 갈급성이 없다면 큰 문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자기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느냐? 자기를 죽음의 고개로 끌고 가고 있다. 내가 눈을 뜨고 있어도 시간이 가고, 졸고 있어도 시간이 간다. 자기에게 할당된 이 시간이 얼마나 되겠느냐?

 

시간에 속한 것은 꼼짝없이 죽음에 잡혀간다. 아무리 잡혀가지 않으려고 용을 써도 소용없다. 그러나 자기의 몸을 법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고 있으면 하나님의 독권적인 역사가 자기 속에서 일어난다. 이러면 죽음을, 시간을 역행하게 된다. 이게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 바 되는 삶이요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삶이다. 믿는 우리는 자기의 삶 가운데서 마음에서 이걸 느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사셨고,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게 예수 믿는 우리의 실상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면서 죽음을 이겼다. 우리의 이룰구원도 죽음을 이기는 거다. 이렇게 살지 않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면서 세상을 따라 흘러가는 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선 거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섰다는 것은 세상의 정신과 사상이 하나님 자리에 목적적으로 섰고, 기준적으로 섰고, 자랑적으로 선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위치적 순서적으로 하나님-->물질-->인간의 순서로 살라고 하는데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하는 마음이 물질-->인간-->하나님의 순서로 된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에 섰고, 예배당이 하나님의 자리에 섰고, 종교사업이 하나님의 자리에 섰고, 하나님은 이것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분이라는 식으로 믿는다. 성경을 이치로 보지 않으면 이걸 못 깨닫는다. 모든 문제는 감정으로 푸는 게 아니라 이치로 푸는 거다. 자기 속에 법궤가 있으면 죽음을 가르고 나간다. 사망성 유혹성 미혹성 세상성을 이기고 나간다. 이게 이치다. 이게 믿어지느냐?

 

시간을 누가 만들었느냐? 강물은 누가 만들었느냐? 세월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들었다. 세상이 세월 따라 변질이 되게 한 것은 누가 한 거냐?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시간 속에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거치면서 죽음을 이기는 구원을 입게 하려는 거다. 우리에게 이긴 것을 주려는 거다. 이게 신앙이다. 이게 하나님의 온전을 입는 거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의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었고, 아예 사형선고가 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 이런 인간을 살리려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을 지키셨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에 포박되어서 사망이 우리의 왕 노릇 하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포박하고 있는 죄와 죽음을 정복하고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자유자로 해방시켰다.

 

주님의 우리를 위한 33년의 삶은 하루하루, 한 발 한 발, 모든 언행심사가, 모든 오각의 오감성이 나를 의식하며 죽어있는 나를 살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인간의 표현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행여나 잘못해서 아무개가 못 살아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하면서 걸어갔다. 우리를 생각하며 걸으신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한다.

 

목사님들이 목회하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 교회 교인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기 낳고 할 때까지 한 사람도 신앙이 변질이 없이 옹골차게 내려가야 할 텐데하는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하느냐, 히스기야처럼 내 때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하면서 목회를 하느냐? 목사가 히스기야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식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식들이 아무 교회에나 나가고, 밥 먹고 살 정도면 되는 거냐? 이게 믿는 거냐? 이건 종교인일 뿐이다.

 

우리 교인들이 삶의 전반에서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이룰구원을 이뤄간다면 이것은 노아처럼 방주를 짓는 거다. 가인의 길로 몰려가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세상을 돋보며 살다가 홍수에 쓸려갔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육덩이로 살면서 믿음의 방주를 짓지 않는 것은 세상의 홍수에 쓸려가는 삶을 사는 거다. 오늘날 이게 안 보이느냐? 진리의 교훈을 받으면서 진리 안에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는 것은 없이 세상 노라리 하며 산다면 이건 한 마디로 사람이 안 바뀐 거다.

 

성경에 부모 형제 처와 자식이, 아들과 아비가, 어미와 딸이 서로 원수가 된다는 것은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 온통 물질성만 가득 들어서 이런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게 된다는 거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지금 이런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죽지 못해서 서로 붙어서 사는 거고, 그 잘난 인정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같이 밥을 먹고 사는 것뿐이다.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 기독자들은 세상을 다시 태어난 것과 같다. 그래서 기본구원을 거듭남이라고도 한다. 이제는 하나하나 고치면서 바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중복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복적 구원이다. 이것도 모른 채 예수 믿고 있다면 큰 문제다.

 

어린 아기가 태어났으면 그날부터 몸도 자라고 기능과 지능도 자라듯이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 자기 속에 진리생명이 잉태되어서 이것이 자라면 밖으로 나오게 된다. 우리가 진리이치의 교훈을 먹었으면 생명의 정신이 자기의 언행심사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이 사람의 신앙은 병이 든 거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데, 성경은 이 죽음만 있는 게 아니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것도 죽은 것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기독자들에게 영적인 면의 죽음의 처절함을 깨달아서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빨리 이루라고 하는 촉구성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사람이 죽은 것을 보는 것과, 믿는 사람이 사람이 죽은 것을 보는 것은 생각이 다르다. 안 믿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보면 내가 죽기 전에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여행도 더 많이 다니다가 죽어야지라고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죽기 전에 이룰구원을 더 많이 이뤄야지라고 한다.

 

우리 기독자에게는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구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방 세상사람들은 영이 죽어있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도 모르고, 진리도 없고, 자기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대로 죽지만 믿는 우리는 죽을 것을 영생으로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기본구원으로 인해 예수 믿는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던 유전죄와 이 유전죄를 가지고 스스로 지은 자범죄를 모두 사함을 받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영이 중생한 것인데, 영이 중생한 사람은 제 마음대로 지옥에 못 간다. 자살해서 죽었다고 해도 기본구원이 입혀졌으면 지옥에 못 간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기본구원의 효력을 모르는 소리다, 성경의 교리를 모르는 거다.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죽건 다 천국에 간다. 그래서 가룟유다가 이 기본구원을 얻었다면 지옥에 안 갔다, 그런데 가룟유다에게 처음부터 마귀요, 차라리 나지 아니했으면 좋을 뻔했다라고 한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지옥에 갔다고 하게 되면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지옥에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러서 3년 동안 실컷 이용해 먹다가 지옥에 보낸 악한 분이 된다.

 

그리고 가룟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고 자살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하게 되면 오늘날 목사님들도 정신과 소원 목적적으로 돈 욕심으로 예수를 팔아먹는 일이 많은데 이분들도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마귀니라. 차라리 나지 아니했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는 말은 세상을 위해 예수를 버리면 이룰구원 면에 손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짓더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지옥은 가지 않지만 이 땅에 살면서 지옥 맛을 톡톡히 보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짓는 죄는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기본구원 차원에서 다루는 게 아니라 이룰구원 성화구원의 차원에서 다루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이방을 의지하다가 전쟁에서 이방인들의 손에 죽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는데, 승리한 이방인들은 잘 먹고 잘살았다. 그러면 이들이 축복을 받은 거냐? 이게 하나님의 축복이냐, 마귀의 축복이냐? 누구의 축복이든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로 이방 땅에서 종노릇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이스라엘 백성은 천국에 갔느냐, 지옥에 갔느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선지자의 말을 안 듣고 점점 변질이 되어 살다가 그곳에서 전쟁으로 죽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했는데, 이들은 다 천국에서 쫓겨났느냐?

 

기본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일방적으로 사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거지만 이룰구원 성화구원은 궁극적 결과적으로 천국에서 실력대로 누리는 것이라서 기본구원에서처럼 봐주는 게 없이 철두철미하게 따진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인격성과 자유성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기본구원을 얻은 것으로 전제하고, 그다음에 이룰구원 성화구원의 실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영인성장이 되어야 한다. 성화구원 또는 이룰구원이란 주님의 속성을 닮는 것을 말하는데, 영만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몸도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거다.

 

믿는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서 주님의 성품으로 자라지 못했으면 못한 것만큼 세상을 따르거나 세상 것을 받은 거다. 이러면 영인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되지 못한 것만큼 죄로 보신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왜 잘 속는 거냐? 공부를 안 해서냐, 착해서냐, 믿음이 있어서냐, 사랑이 많아서냐? 속는 것을 알고 피해를 보는 거냐, 모르고 피해를 보는 거냐? 자기가 알면서 복음을 위해 속는다면 남 원망이 안 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전하기 위해 속아주는 것도 있다. 이럴 때 지혜를 써야지 자칫 잘못하면 그들에게 끌려가는 죄를 짓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보화에 욕심이 있어야 한다. 보화는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엄청난 재산이 되듯이 생명의 말씀을 한 이치라도 깨닫는 것은 자기의 영에 엄청난 수입이 된다. 그런데 목사님 중에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도 한 이치도 못 깨닫고 그대로 죽은 사람도 있을 거다.

 

옳은 이치의 교훈을 받아서 한 이치를 깨달으면 이치가 이치를 물고 와서 깨달음이 막 불어난다. 이치는 이런 거다. 하나하나 깨달은 이치를 맞추면 딱 들어맞는 게 이치다. 하나하나를 맞췄을 때 딱 맞는다는 것은 이치대로 만들어졌다는 거다. 한옥을 지을 때 나무가 딱딱 맞아 들어가려면 목수가 이치대로(설계대로) 나무에 줄을 잘 긋고 그대로 썰고 파고 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술도 좋아야 하고 연장도 좋아야 한다. 목사님들도 말하자면 건설자들인데, 무엇보다 기초가 되는 분을 중심으로 건설을 해 나가야 한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로 된 지혜지식성을, 하나님의 도덕성을, 하나님의 능력성을 가져야 신앙이 자란다. 어린아이가 자고 일어나면 엄마, 돈 백 원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자고 일어나면 세상을 달라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보실 때 얼마나 기가 막힐까? 수십 년 예수를 믿으면서도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면 귀신이 들렸거나 무슨 이상이 생긴 거다. 귀신이 들렸다는 게 다른 거냐? 더러운 정신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에 간질로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어이가 있는데, 집회 때 이런 교인들이 있다. ‘불 받아라하면 팍 엎어지고, ‘복 받아라하면 팍 엎어지는 것은 영적인 간질이다. 자기가 죽을지 살지도 모른 채 돈만 보면 그리로 엎어지고, 신비한 것만 보면 그리로 엎어지는 것은 간질을 앓는 거다. 성경에서 계시를 못 깨달으면 이런 영적인 병을 보지 못한다.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이제 막 교회에 나오면 영의 눈이 감긴 상태다. 교회에서는 이런 교인들의 눈을 밝게 해서 말씀을 깨닫고 구별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존적인 인간의 지식을 하늘의 지식으로 자꾸 바꿔줘야 한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을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으로 바꾸지 않았으면 영적인 면에 소경이고,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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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9 요한복음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6:5-9  김경형목사  2023-10-01 165
17998 아모스 인애의 사람이 되라 암1:9-15  강승호목사  2023-09-25 136
17997 누가복음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눅19:41-20:8  김경형목사  2023-09-24 65
17996 요한복음 큰 무리가 따르니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요6:1-5  김경형목사  2023-09-24 62
17995 시편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68:1-10  정용섭 목사  2023-09-21 161
17994 요한복음 살아있음 요14:15-21  정용섭 목사  2023-09-21 141
17993 베드로전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2:2-10  정용섭 목사  2023-09-21 187
17992 베드로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2:18-25  정용섭 목사  2023-09-21 72
17991 누가복음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24:28-35  정용섭 목사  2023-09-21 107
17990 요한복음 믿음의 깊이 요20:24-31  정용섭 목사  2023-09-21 175
17989 골로새서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3:1-4  정용섭 목사  2023-09-21 99
17988 이사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50:4-9a  정용섭 목사  2023-09-21 209
17987 역대상 행복을 꿈꾸는 사람 대상3:1-9  강승호목사  2023-09-20 157
17986 야고보서 시련에 인내하라 약1:1-8  강승호목사  2023-09-18 123
17985 누가복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눅19:41-48  김경형목사  2023-09-17 122
17984 요한복음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요5:44-47  김경형목사  2023-09-17 52
17983 에배소서 (계시보기)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느냐 세상이 교회를 위해 있느냐? 엡1:23  김경형목사  2023-09-14 45
17982 로마서 (계시보기)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전부가 죄다/외. 롬14:23  김경형목사  2023-09-13 52
17981 누가복음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19:34-44  김경형목사  2023-09-10 42
17980 요한복음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요5:44  김경형목사  2023-09-10 23
17979 빌립보서 (계시보기)비진리는 신앙이 아니다. 빌2:12  김경형목사  2023-09-09 46
17978 히브리서 모세의 믿음 히11:24-26  배장섭 목사  2023-09-09 201
17977 에스겔 그발 강가의 에스겔 겔1:1-3  강승호목사  2023-09-09 117
» 빌립보서 (계시보기)이룰구원은 마귀에게 빼앗길 수 있다. 빌2:12  김경형목사  2023-09-07 34
17975 마가복음 예수를 따르는 사람 막2:13-17  강승호목사  2023-09-05 162
17974 누가복음 주가 쓰시겠다 하라. 눅19:28-40  김경형목사  2023-09-03 107
17973 요한복음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요5:43  김경형목사  2023-09-03 54
17972 디모데후 (계시보기)우리의 온전이 빠진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담후3:16-17  김경형목사  2023-09-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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