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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88 추천 수 0 2023.09.17 09: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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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41-48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941-48: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41-42: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평화에 관한 지식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일반세상에서도 워낙 싸움을 하니까 우리 평화롭게 삽시다하고 외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엔이 평화단체가 되어서 각 나라의 지도자들을 앞세워서 결성을 하고 평화를 외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지 않는, 다시 말하면 생명과를 먹은 그 지식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전부는 세상에서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의 양심에서 나온 평화인데, 이 평화는 그 지식의 수준이 사단 마귀의 모든 역사를 이길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물질적으로 들어가 있는 평화이기 때문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잘 살자하는 물질적 개념의 평화이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학문을 교환하고 예술을 교환해도 전부는 하늘 아래의 것, 세상의 것으로 돼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평화가 없고, 또 성경에 보면 온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각자 원수가 되게 한다고 하니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말할 필요가 없다. 전쟁이 일어나는 건 빤한 거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이룰구원 차원에서 보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 분의 속성을 닮지 못하면 아무리 평화롭게 깨끗하게 거룩하게 산다고 해도 그건 말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화 속성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로 그쳐버린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깨달음으로 되는 하나님과의 의사단일, 그 하나님의 말씀에 적중이 돼야 그 다음에 평화가 된다. 나랑 하나님이랑 먼저 의사단일의 화목이 돼야 그 다음에 평화의 시절을 맞는 거다.

 

세상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알지도 못하고 평화를 이룰 수도 없는 거고, 우리 믿는 식구들은 하나님과 화목 된 그 의사성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려 하면서 인인관계의 화목만 자꾸 이루려고 하니 안 되는 거다. 왜 안 되는 거냐? 사람마다 지식의 수준이 물질성적으로 속이 형성돼 있어서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남보다 먼저 옳은 지식의 수준으로 살아야 한다. ‘안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 남에게 얻어먹고 사는 처지가 될지라도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은 이뤄놓고 가야 한다. 그런데 이 의사단일성은 모르고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려는 소원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면 이건 헛 믿는 거다. 근본적으로 지식의 수준을 바꿔라.

 

유엔평화는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 질적 하나님의 의사적 단일성의 평화는 아니다. 그런데 단체로 모여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부분적 면에서 견제하고 억제시키는 역할은 한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해결 역할은 안 된다.

 

예수님의 평화는 질적 근본적이다. 먼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 화목. 하나님과의 평화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춰야 평화가 된다. 이 땅에서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하나님과 이웃과 평화롭게 살아지는 것은 자동적으로 온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점은 종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려고 하지 근본적으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지식의 질을 모른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서 평화, 사랑을 외쳐도 사람의 속성이 변화되기 전에는 안 되는 거다. 구호에 그치는 거지 사람이 실질적으로 속성적으로는 안 된다.

 

옳은 화목과 평화의 지식이 들어가면 사람이 지식적으로도 변화되고 속성적으로도 변화가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평화는 물론이고 세상과 평화가 되는 거다. 그러나 마지막 때까지 세상지식의 개념의 평화는 안 되는 것이니 예수 믿는 자들이 헛일하면 안 된다. 그게 믿음이 아니고 신앙이 아니라 그 말이다.

 

인간이 밥 먹고 그냥 무난히 살다 죽는 게 인간의 생애가 아니다. 인간의 생애는 하나님의 온전을 닮아가는 그 생애가 인간의 생애다. 바로 너 인간의 생애다. 사람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 네 생애다. ‘물질적으로 어떻게 하면 누릴까, 물질적으로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까하는 그 사고방식의 인식은 안 된다. 그건 신앙이 아니다.

 

성경에 보니 그 때에 예루살렘 성 안 온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일하는 자들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이나 온 가정이나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는 예수님을 빨리 못 죽여서 안달이 났다. 근본적인 평화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환난주고 핍박주고 헐뜯고 죽이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결과는 무엇이 오겠느냐?

 

43-44: 날이 온다. 무슨 날이 오느냐?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사면으로 너를 둘러 가둘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서 너를 죽이고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을 하나도 첩 놓인 것 없이 다 무너뜨릴 것이다. ? 권고를 받는 네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몰랐다면 무마가 되느냐? 몰랐다는 게 무슨 말이냐? 진리이치의 옳은 소리인데도 듣기 싫어했고, 신앙양심이 찔렸는데도 회개를 안 했고 원수 시 하고 죽이려 했다 그 말이다.

 

진리이치의 옳은 말씀에 동화되고 감동되고 양심이 부끄럽고 찔리고 하는 것은 모두 주님의 권고요 권면이요 책망이다. 자기 신앙양심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은 주님의 권고요 권면이요 책망이다. 네가 이 권고 권면을 무시하고 사람까지 미워하고 죽이려 들면 너를 멸망시키는 사건이 너에게 속히 다가오게 되는 것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 말씀이 자기에게 지나가는 말씀 같고, 남보고 하는 말씀 같으나 그 말씀이 사건화 돼서 자기에게로 다가오면 나는 어떤 사람이요하고 그 사건이 은연중에 나를 드러내게 된다.

 

그들의 신앙은 건물자랑, 조상으로부터의 전통자랑이다.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은연중에 무당신관이 들어서 수십 년을 믿어도 그런 게 참 많다. 가진 것 자랑, 돈은 못 가졌지만 돈을 돋보고 부러워하는 것도 다 자랑에 들어간다. 이런 사람은 돈을 돋보고 부러워 하다가 자기가 그걸 가지게 된다면 자랑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그들은 또한 세상 종교적 명예자랑, 종교적 부요자랑이다.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도 그랬다. 또한 조직자랑, 큰 것 자랑, 많은 것 자랑이다. 이게 다 외식인데, 다른 사람이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게 네 신앙과 무슨 상관이냐? 아무 의미 없는 자랑은 하나님 앞에 교만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더니 결국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질그릇처럼 완전히 부서지고 멸망을 당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는 것은 근본적 일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평화의 일을 알지 못한다면 이건 하나님과의 의사적 대립성이다.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종교적 운동에 외식운동을 한 것이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의사적 대립으로 들어가는 거다. 주님의 의사성과 자기의 의사성과 다른 거다. 주님은 성경을 깨닫고 너 만들어지자하는데 자기는 물질을 가지고 자꾸 크게 뭘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립이다. 이 대립성은 알고 보면 사단 마귀의 책동을 받는 거짓 종들의 마음이다. 멸망밖에 없다.

 

우리 기독자는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훈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성, 하나님의 의사일치에 맞추어야 바른 교훈이요 바른 사상이요 바른 정신이고 이게 옳다. 세상 선악과 먹은 기준에 맞추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역사가 자기에게 닥친다. 너에게 날이 온다. 무슨 날이냐? 너를 잡는 날이 온다.

 

45-46: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다. 어떤 자들이 그 성전 안에서 못할 짓을 하고 있었느냐? 5일 장이 돼서 성전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장사를 한 것이냐? 유대 종교 최고급 지도자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장사란 말이 무슨 말이냐? 전부 물질계산, 돈계산 거기에 마음중심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인데 가룟유다에게는 이 예수님이 얼마짜리로 보였느냐? 은 삼십. 하루 노동자의 품값이다. 그런데 왜 표현을 그렇게 했을까? 이왕 팔 바에야 만능의 능력자를 판다면 엄청나게 비싸게 팔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하루의 일품 값으로 팔았을까? 이것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네가 하루 일당을 벌려고 세상에 들어가서 진리이치 생명이치를 내버리고, 예수사상 정신을 내버리고 그 일을 하고 있구나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종들이.

 

그리고 그 말속에 들어있는 숨어있는 뜻은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하는 그 사상도 되는 거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예수 믿는 사상이 그 안에 들어있다. 그런데 사건이 올 때까지는 그걸 잘 모른다. 평소 때는 잘 믿는 척 하지만 사건이 오면 자기가 성장이 안 된 것만큼 넘어가게 돼 있다. 들통이 나버린다. ‘무엇보다 무엇이 귀하다하는 걸 판단을 못한다.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사람이 귀한 것을 가지면 귀해진다. 사람이 귀한 지식을 갖게 되면 사람이 귀해진다. 옳은 진리지식에서 나오는 모든 사고방식은 차원이 높다. 물질에 휩쓸리지를 않는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고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한다. 값진 일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쳐다보고 우시며 앞으로 전쟁이 일어날 일을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6. 25가 날 때도 장로교가 싸움이 나서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갈라진 직후에 6. 25가 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과 떨어졌음을 실물교훈으로 보여주는 거다. 이방인들은 이걸 모른다. 또 이방인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고 너희들 때문에 6. 25가 터졌다고 할 지식도 없고, 그 말을 할 능력도 없다. 안 믿고 있으면서 너희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됐다하고 말할 자격도 없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 사회의 인도자들의 가르치는 사상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이는 전쟁을 보여주실 수도 있는 거다. 그럴 때 성도들이 목사들을 향해서 목사들 때문에 전쟁이 났다할 수는 없는 거다. 그렇게 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 너는 뭐 했느냐? 너는 왜 그런 데 가서 붙었느냐?’ 하실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 짐승들을 팔고 있었고, 돈을 계산하고 있었고, 세상부요를 꿈꾸고 있었고, 자기의 물질적 노후대책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금도 장감성을 막론하고 지도자들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일반성도들은 잘 모른다. 목사가 평생 목회를 하면서 세상을 가르쳐 놓고 나이 들어서 은퇴를 하면 그 교단에서 연금을 준다고 한다. 그러니까 게으른 자들이, 도둑의 심보를 가진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그 혜택을 받으려고 한다. 그 마음이 문제다. 이건 도둑의 심보다. 그런 사람에게 성경에 대해 물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런 목회라면 누군들 못하랴.

 

자기 교단에서는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해서건 미리 노후대책을 위해 모아놓아야 한다. 그러니 그 마음의 심보가 가룟유다와 다름이 없는 거다. 가룟유다는 한 번 예수를 팔아먹었지만 이 도둑의 심보는 날마다, 그리고 예배시간마나 성경구절을 들어서 예수를 팔아먹는다. 그런 정도로 보면 이건 일반 도덕성의 차원도 못 벗어난 거다. 그러니 성격 성질도 안 고쳐진다. 그게 돈 계산이요 세상계산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느냐를 연구하고, ‘어느 물건(예배당)이 돈이 되나하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게 전부는 성전 안에서 장사꾼이다.

 

교인들은 마음이 어떠냐? 기도할 때 세상 것을 달라고 한다. 이건 장사꾼이나 다름없다. 그거나 저거나 다를 바가 없는 거다. 그러니 마귀의 시험에 다 넘어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어든 이런 것을 구하라하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요 종이라고 하고 있다.

 

성전 안에서는 원래 무엇을 하는 곳이냐? 기도하는 곳이다. 내 집(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님의 집이요,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이요, 인격적 단일로 동거 동락하는 집이요, 진리의 대화의 집이요, 하나님과 만나는 집이요, 하나님의 뜻을 받는 집이요, 자기 고쳐지는 집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도 자기 집에서 고쳐지지를 않으면 사회에 나가서 욕을 얻어먹는다. 사람 되는 건 자기 집에서 돼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정에 부모형제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는 게 좋다. 그런데 지금은 자식이 우상이 돼 버렸다. 교육적인 의미로 들어가지를 않고 어린 애 하나가 우상이 돼 버렸다. 아이를 우상화로 만들면 훌륭하게 되겠느냐?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성경을 읽게 하고.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걸 안 배우면 어디서 배우느냐? 유치원에서 배우느냐? 옛날엔 초등학교가 오늘날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오늘날은 부모와 학생이 드세서 선생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그러니 교육이 바로 안 되는 거다.

 

자기 집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어릴 때부터 사람이 양육되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린애들을 후려잡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이건 지혜롭지 못하다. 이렇게 되면 아이로서는 어른이 강압을 하게 되면 힘이 없으니까 제압을 당하고 있다가 성장을 하게 되면 막 폭발이 되는 거다. 그것보다는 지혜롭게 잘 이해를 시키는 가운데 규모 있게 교훈이 나가기도 하고 따끔한 질책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를 못하고 마냥 내버려두는 것도 안 된다. 공공적인 장소에서 공동질서 사회적인 도덕성을 어린아이 때부터 닦아나가면 클수록 머리 쓰는 사람이 된다.

 

단순히 역사적 외부적으로 볼 때는 예루살렘 성은 다윗의 통치가 있었던 곳이고, 지혜의 왕 솔로몬이 있었던 곳이고, 모든 순례자들이 죽기 전에 꼭 오고 싶어 하는 성읍이다. 그만큼 유명하다. 이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들이 많지만 그 중에도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백성의 장로 등은 명칭도 호칭도 모두 거룩한 성호다. 이들이 길로 나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이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존경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의 눈으로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니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중심사상이 모두 강도들이다.

 

강도가 뭐냐? 물질을 뺏으려고 사람을 해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강도라고 하신 것은 그냥 툭 내뱉은 소리가 아니다. 그들의 하는 짓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이라고 하는 거지만 주님의 입장에서는 그 신앙정신이 강도가 하는 정신이다 그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칼을 들고 강도짓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신앙사상이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로 가는 사상이다. 백성들을 그리로 가게 하면서 축복이다. 축복이다하며 물질을 착복하고 있으니 그게 강도라는 것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강도가 참 많다. 사람을 속이고 상대가 그만큼 시간 들이고 노력한 땀의 대가를 거짓말로 빼앗는 일이 참 많다. 점쟁이도 무당도 강도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옳은 말씀으로 깨우치지도 못하면서 공 드립네하고, ‘기도해 줍네하며 물질을 착복하는 것은 강도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왕은 가이사다. 가이사의 뒤에는 마귀가 버티고 있다.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장도들이 모두 그 밑으로 가서 지도를 받고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뭘 하겠느냐? 종교적인 건설을 하는 거다. 이들이 하는 그 일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는 의사적으로 정 반대다. 그런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듯이 지금도 종교적 세상적 가견적인 건설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정신 사상을 죽이는 운동들이다. 세상을 향한 세상 복음이요 비진리다. 신앙적 강도들은 재산 재물 돈 들어오는 것으로 신앙 믿음의 기준을 삼는다.

 

강도소리를 듣는 당시의 그들은 외국에서 오는 성도들을 위해 양이나 소나 염소나 비둘기 등등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팔고 있다. 교인들의 편리를 봐준다는 의미로써 방편을 그렇게 하고 있다. 사실 외국에서 살다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절기에 살아있는 제물을 예루살렘까지 가져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편리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해마다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게 왜 강도짓이냐?

 

말하자면 제물로 기른 짐승이 평신도가 기른 것보다 서기관이나 율법사가 기른 게 조금 더 비싸고, 제사장이 기른 건 더 비싸다. 이처럼 짐승들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은 타락된 인간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그 중심이 물질에 가서 붙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소나 염소나 비둘기나 양 등등을 팔려면 성전 밖에서 팔지 왜 성전 안에서 팔까? 그러는 그들에게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는 것은 성전 안에서 돈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자칫하면 그런 데 빠지기 쉽다. 장사꾼이 교인이 많은 교회에 장사할 마음으로 나갈 수 있다. 그 다음에는 교인들과 무슨 물건이 싸다. 내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하는 흥정이 나오는 거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왜 성전 안에서 돈 계산을 하느냐? 성전 안에서 돈 계산을 하는 게 강도라. 세상 이해타산으로 따져 들어가는 게 강도다. 재물 재산 돈이 들어오는 것으로 믿음의 기준을 삼는 게 강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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