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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9 추천 수 0 2023.09.21 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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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50:4-9a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7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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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J6ChQUABdhw 
성경본문 : 이사야 50:4~9a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순절 여섯째 주일, 2023년 4월2일
 
종의 노래
 
오늘 설교 본문 사 50:4~9a은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유대의 바벨론 포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태에서 겪는 고초와 수모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사 50: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표현은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사실 묘사에 가깝습니다. 패전 국가 백성들이 종종 당하는 일들입니다. 2년 가까이 계속된 바벨론 제국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이 기원전 587년에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안의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귀한 기물들을 약탈당했으며, 집이 불탔으며, 많은 이들은 노예로 잡혀가거나 어디론가 피란을 떠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은 그곳에서 유대 전통과 완전히 다른 전통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입에 담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새롭게 이주해온 유대 백성들을 무시했습니다. 트집을 잡기도 했습니다. 바벨론 사람과 유대 백성 사이에 문제가 벌어지면 당연히 유대 백성이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특히 하나님 신앙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일부 사람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작은 문제만 벌어져도 일벌백계를 당했습니다. 당연히 바벨론의 법적 보호를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이 시인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기를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겼다고 합니다. 등에 매질하는 징벌 제도가 바벨론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공공 치안이 미치지 않는 오지 이슬람권 지역에서 그런 매질이 실행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염을 뽑는 일도 매질처럼 공적인 징벌입니다. 당시 근동 지역에서 남자가 수염을 뽑히는 일은 가장 큰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 침 뱉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관행처럼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뺨을 그대로 맡겨야만 했고, 얼굴을 감출 수도 없었습니다. 바벨론 백성들은 이런 포악한 일을 저지르면서 만족스러워했을 겁니다. 5백 년 전 그리스도교 전통이 살아있던 유럽과 북미에서 사람들이 마녀를 장작더미에 올려서 태우거나 돌로 죽이는 일을 정의 실현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동물보다 더 잔인할 때가 많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리면 평소와 달리 더 잔인한 행동도 합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980년 5월 어느 날입니다. 저는 다른 목사와 가톨릭 신부와 불교 승려들과 함께 전라도 광주 보병학교에서 군종장교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광주 민주 항쟁이 발발한 바로 그 현장입니다. 전방에서 내려온 군인들이 시위 진압에 나섰습니다. 폭도라고 하여 잡혀 온 광주 젊은이들은 군인들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사이를 걸어가면서 군인들에게 손과 발로 얻어맞았습니다. 두 손이 묶였기에 자기를 방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연병장 한쪽에 소위 원산폭격 자세로 몇 시간이고 체벌을 당했습니다. 인간은 그런 만행과 악행을 저지르는 동물입니다. 당시 교관 중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 장교는 수업 시간에 자신의 전쟁 경험을 무용담처럼 쏟아냈습니다. 그 내용은 구토가 날 정도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 50:6절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두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 모독으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마 26:67~68절에 따르면 산헤드린 공개재판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비아냥댔습니다. 다른 한 번은 로마 총독 법정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혐의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예루살렘 주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예수에게 온갖 희롱과 모욕을 줍니다. 마 27:30절은 이렇습니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신학자들이 ‘종의 노래’로 분류한 오늘 설교 본문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적으로 읽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학자의 혀와 귀
 
일반적으로 이런 모욕을 당하면 똑같이 갚으려고 합니다. 5를 당하면 10을 갚지는 못해도 5는 갚으려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절대 참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고 사회 정의를 세우는 길이라는 겁니다. 앙갚음하려는 인간 본성과 성정을 자극하는 주장입니다.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도 화가 나서 밤잠을 설쳤을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되도록 놓아두시느냐고, 당신의 정의로운 심판은 어디 갔냐고, 따졌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뭔가 근본적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4, 5절에서 ‘학자’의 귀와 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캄캄한 세계 안에서 어떤 빛을 발견한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순간에 전혀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원수를 갚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관점 말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를 돕고, 지키고,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얻어맞고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하고 따귀를 얻어맞아도 그는 이제 그것을 전혀 수치로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그런 단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중에라도 이런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는 게 바람직합니다. 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이 시인에게 ‘가까이’ 계시는 그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했습니다. 아주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바벨론 체제 안에서 무시당하던 이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그를 탈북민으로 바꿔놓고 봐도 됩니다. 남한 사회에서 탈북민은 죄인입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탈북민이라면 어느 정도 인정은 받겠지요. 고위급 탈북 인사가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특이한 현상입니다. 브로커에게 속아서 자기도 모르게 남한으로 건너왔다가 자기 고향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한 정부는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그 딱한 사정을 우리나라 매스컴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남한에서 그는 죄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도 바벨론 체제 아래서 죄인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난은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면 답은 나와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실제로 돈이 없어서 살아가기가 불편하기도 하나, 우리의 정신이 위축된다는 게 더 힘든 일입니다.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남을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각자도생의 원리에 갇힙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삶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합니다. 이게 죄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을 노래하는 사람은 이런 죄의 세력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난하지만 생명 충만한 삶을 얻었다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이 외침은 고된 현실에 찌든 사람의 심리에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승리인가요, 아니면 우리 삶의 허상을 넘어서서 본질을 꿰뚫어 본 선지자의 영적 통찰인가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니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 전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진술을 먼저 살피는 게 좋습니다. 이 두 가지,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말은 사실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모욕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7절과 9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시나요? 그래서 세상의 눈초리에 휘둘리지 않고 여러분의 인생이 옳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나요? 이 시인처럼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는 더더욱 잡을 수 없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real’ 하게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크게 나누면 창조(아버지)와 구원(아들)과 사랑(영)입니다. 세 가지가 다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에는 창조의 빛과 그 생명이 가까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초봄에 우리는 그 사실을 절감합니다. 초봄의 그 변화에 영혼의 무게가 실리면 다른 부분들이 힘들어져도 떳떳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우리의 삶에서 아예 힘을 못 씁니다. 가난한 사람도 봄꽃과 새싹과 새순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대 유대 백성들의 바벨론 현장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졌으나 바벨론에도 하나님의 창조 손길은 여전했습니다. 매일 아침의 여명이 황홀했고, 저녁노을과 별치 빛나는 밤이 신비로웠습니다. 비록 디아스포라 신세지만 식탁 앞에서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녁노을을 만끽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겪는 신체적 고통이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수염이 뽑히고 뺨을 얻어맞는 일은 여전히 참기 힘듭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불법체류자들의 경우처럼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악덕 기업가를 만나서 임금을 떼어먹힐 수도 있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가족 부양 문제가 여전히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습니다.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없어서 여러 명이 오막살이 단칸방에서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봄꽃을 만끽한다고 해서 그런 어려움이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서로 노력해서 하루빨리 극복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등잔에 불을 밝혀 밤새 찾았던 여인처럼 그걸 찾아보십시오.
 
우리가 먼저 조금 더 찾아볼까요? 아무리 외로워도 옆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말을 무조건 들어주는 나무가 있고, 구름이 있고, 마실 물이 있고, 말할 수 있는 입이 있고, 외국말이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있습니다. 최소한 일용할 양식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증거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죽을 때까지 찾아도 다 찾지 못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우리의 존재 전체를 휩싸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눈에 보이느냐에, 그걸 실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상의 과몰입
 
그걸 실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일상에 과몰입한다는 사실입니다. 경주마처럼 달리는 상태에서는 자기가 왜 사는지, 삶의 마지막은 무엇인지, 현재 실제로 행복한지에 관한 생각이 무뎌집니다. 일상이 깊어지고 새로워지고 개방되는 게 아니라 경직되고 소비될 뿐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일종의 상거래가 되는 겁니다. 교육마저 이미 오래전에 그런 추세에 올라탔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마저도 상품 거래 수준으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정신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말씀을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일상의 과몰입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삶이 아직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더는 떨어질 데가 없는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하시는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유대 백성이 그렇고, 신약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습니다. 고대 유대 민족이 걸었던 수난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압니다. 20세기에는 아우슈비츠 사건까지 겪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도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뻔뻔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달라집니다. 아주 이따금 죽는 순간까지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 이후에 그의 영혼은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라면 그렇게 변화시키실 겁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시인을 다시 봅시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화병으로 죽었을지 모릅니다. 세상이 왜 이따위냐, 하고 푸념 늘어놓기에 바빴겠지요. 자기 신세를 반전시킬 계획이나 음모를 꾸미든지,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형으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바벨론 체제에 순응하면서 남보란 듯이 앞만 보고 출셋길을 도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옥과 같은 자리에서 오히려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하고 외치고,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 나와봐라.’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의 신세가 달라진 건 없습니다. 여전히 바벨론 포로 신세를 면치는 못합니다. 고향 유대 땅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때로는 삶의 허무 앞에서 소름이 돋았겠지요. 그의 실존은 똑같으나 그의 영혼은 자유로워졌습니다. 부럽지요?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면서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종려나무 가지를 든 주민들로부터 환대받았으나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서 거부당한 분입니다. 유대 종교 집단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로마정치 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부정당했으며, 심지어 제자들에게서조차 외면당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은 바로 그에게 ‘임마누엘’(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신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포리즘(경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를 정죄할 자나 체제나 이념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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