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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편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61 추천 수 0 2023.09.21 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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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68:1-1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7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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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Dz9GHGRPCyg 
성경본문 : 시편 68:1~10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68:1-10,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23년 5월 21일
 
하나님의 승리
 
설교 준비할 때 제가 종종 참고하는 <현대 독일어 성경>(Die Gute Nachricht, DIE BIBEL in heutigem Deutsch)은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인 시 68편에 “하나님의 승리”(Gottes Sieg)라는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원수들과 ‘주를 미워하는 자들’(1절)과 ‘여러 군대의 왕들’(12절)을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내용입니다. 2절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망하게 해달라는 표현이 너무 거칠기는 합니다. 이런 비슷한 표현들이 68편 전체에, 그리고 전체 150편에 이르는 시편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한 개선장군처럼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말하려는 핵심은 박해받고 무시당하며 소외된 이들의 인간다움의 존엄성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즐거워할 것(3절)이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5절)이십니다. 마지막 절인 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승리자이신 하나님께서 권력자들과 원수들과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꼼짝 못 하게 하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시편 기자의 진술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감동하기는 하나 흔쾌히 동의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서 무시당합니다. 가난한 나라는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이 약합니다. 가난한 교회를 좋게 평가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류 역사에서 악한 권력자들이 심판받는 일은 가끔 있긴 하나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께서 악인을 궤멸시키고 가난한 자를 지키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요? 많은 그리스도인은 시편 기자의 이런 고백을 단순히 종교적인 수사로 여기고 실제로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현실 역사에서 배운 게 그렇기에 어쩔 수 없긴 합니다.
 
저는 20세기에 벌어진 마르크시즘의 실패가, 거꾸로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승리가 인류사의 불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시즘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노동해방을 꿈꾸었습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이상을 실현해보려고 했습니다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고상한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너무 강렬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겉으로는 자유를 가치로 내세우나 실제로는 이기심에 기초한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생산성이 떨어진 공산주의 체제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 국가는 문을 닫기 시작하여 지금은 몇 나라 남지 않았고, 남은 나라도 적당하게 자본주의와 결탁했습니다. 평등을 우선적인 가치로 여겼던 현실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우월한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 말하자면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다가 총체적으로 가난해지고 말았다는 사실로 인해서 현대인들은 더는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권은 더 노골적으로 평등보다 자유 가치를 내세우는 중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이데올로기에 가깝습니다.
 
저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일명 ‘순복음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이 한국 교회 역사의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순복음 교회는 번영신학의 총아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두 복을 받아서, 속칭 ‘삼박자 축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에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이 매료된 것입니다. 거꾸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나님이야말로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이라고 외친 진보적 교회에는 신자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진보 교단을 대표하는 ‘기장’(기독교 장로회) 교회 중에서도 중대형 교회로 성장한 교회는 대개 순복음 교회의 아류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그렇고,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번영과 성장 이데올로기에 빠져있기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건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오늘 본문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신다고 말하는 겁니까? 헛소리인가요? 시편 기자는 사회과학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믿음에서 나온 신학적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이 믿음은 신구약 전체의 배경이고, 예수님 말씀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믿음입니다. 창 1: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 간단한 문장이지만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겉모양이 아니라 영적인 속성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서 자유와 기쁨과 사랑 등등이 바로 영적인 속성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흙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들입니다. 그들을 무시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2천5백 년 전 유대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가난한 자들은 곧잘 무시당했습니다. 그들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습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오직 하나님 외에는 전능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려야 할 왕과 귀족들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의 생존을 지켜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럴 의지와 능력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이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이 만든 체제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 체제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동권과 생존권을 위한 장애인들의 투쟁을 사람들은 불편하게 여깁니다. 세상을 바꿀 예언자적 상상력이 크게 부족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전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두 가지 신앙, 즉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믿음에서 볼 때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정의로운 재판관처럼 지키신다는 시편 기자의 신앙고백을 우리는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한번 짚은 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하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다룹니다. 빈부격차가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사는 영천 원당 마을 사람들과 서울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격차는 어마어마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까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분이 맞나요? 그분은 실제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 맞나요? 그래서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고 계시나요?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뒤죽박죽인가요?
 
여기서 제대로 된 대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세상 끝날까지 아무도 완벽한 대답을 찾지 못할 겁니다. 몇 가지 잠정적인 대답은 압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에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고 여전히 무죄한 이들이 고난을 받는다거나, 종말이 와야 정의가 온전하게 실현된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는 지금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의인들이 훗날 천국에 가서 보상받는다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런 대답으로 누가 만족하겠습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죽음 이후의 보상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나 역사 앞에서 책임 있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세상이 왜 정의롭지 않은지 확실한 대답을 모릅니다. 다만 대답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성경의 관점이 그 대답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악인은 원수이고 주를 미워하는 자이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입니다. 반면에 의인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다 의인이 아니고, 부자라고 해서 모두 악인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부자이면서 의인이고, 가난한 자이면서 악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사람과 역사를 표면적으로만 보는 겁니다. 성경은 심층의 깊이에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1) 부자와 권력자는 부와 권력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기에 하나님께 실제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가난한 자는 세상에서 의지할 대상이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않)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죄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 바로 참된 의와 복이라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 계신 분이 맞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책임지신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궁극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의지할 길이 없는 완전한 알거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에 우리를 받아주실 분은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정부나 국가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입니다.
 
가난한 삶의 행복
 
저는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죽을 때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 생생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참되다고 믿습니다. 가난해도, 아니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이 일상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가난하면 재테크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요즘 젊은 국회의원 한 분이 코인 투자 건으로 나라가 시끌벅적합니다. 위법 행위는 아니겠지만 국회의원 신분으로 사행성이 높은 사업에 발을 디뎠으니 비판받아 마땅하고, 더구나 상임위 활동 시간에도 코인을 사고팔았다고 하니까 그분의 영혼이 얼마나 궁핍했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가난했다면 코인 사업에는 뛰어들지 않았겠지요. 주식값을 매일 ‘체크’하는 일도 피곤한 일입니다. 집이 여러 채라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집값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예 이런 일과 상관이 없이 살기에 행복한 겁니다. 저의 설명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금 현실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가난한 부부가 있습니다. 비싼 돈이 들어가는 일은 되도록 피(못)합니다. 비싼 호텔 식당에 가지 않습니다. 명품 옷이나 가방도 없습니다. 돈이 없으니 친구들 모임에도 자주 나가지 못합니다. 누가 보면 아주 초라한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함께 산책하고, 소박한 반찬을 만들어서 함께 먹고, 책을 읽고 서로 대화합니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길은 너무나 많습니다. 결혼하면 한 대로, 솔로면 솔로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몸이 약하면 약한 대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가난 미학을 읊조리는 게 아닙니다. 가장 소박한 삶에서 가장 깊은 삶의 의미를 찾는 전문 수도사가 아니라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세속사회에 사는 여러분을 가난해지라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 가난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조언하는 겁니다. 말이 안 되나요? 가난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지치게 하는지를 당신이 몰라서 비현실적인 소리를 설교하는 거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지금 가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설교하는 중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능력은 절대적이십니다. 그분은 가난으로 인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깊고 오묘하며 풍요로운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더 들겠습니다. 대구에서 영천까지 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운전기사가 딸린 벤츠 승용차를 탈 수 있고, 기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걷는 사람이 가장 불행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걷기에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이 많습니다. 하늘도 보고, 나무와 꽃도 봅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신천변에 놀러 온 젊은 부부를 만나서 말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걷든지, 자동차를 타든 중요한 것은 그가 대구에서 영천까지 가는 그 과정을 얼마나 실제로 즐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한 일들은 볼 눈만 있다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걸 찾지 못하면 가난은 그야말로 저주가 됩니다. 혹시 대한민국은 가난을 저주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나라는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니까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돌보신다는 시편 기자의 외침과 찬양에서 저는 또 하나의 관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라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실제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관점 말입니다.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최소한의 기준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이 나름으로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토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일용할 양식 항목을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공산당 혁명으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물질을 지혜롭게 분배하면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 긴장을 완화해서 국방비를 줄이고, 돈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에게서 세금을 조금 더 걷는다면 일용할 양식마저 없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이게 무슨 좌파, 우파 논쟁에 해당하나요?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현실에서 증언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몸부림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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