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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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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토요 교역자 대상 신학 및 성경공부 |
◆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구름 속에서 말씀하기도 하는데, 왜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을까?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려는 거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 봐라’ 하면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거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속 가운데서 임하겠다고 했고, 신약에서는 변화산상에서 베드로가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하니까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구름이 뭐다’ 하며 영해 식으로 풀지 말고 그 말씀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기도 하고, 마지막 때 주님이 큰 권능과 존귀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기쁜 것을 느끼게 되고,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시는 이유를 신약의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구약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던 본래의 뜻이 이렇다’ 하고 신약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셔서 알게 하는 거다. 이때 먼저 간 성도들도 주님과 같이 구름을 타고 오는데, 이 모습을 많은 사람이 본다고 했으니 그 존귀 영광성이 어떻겠는지 땅의 영광성과 비교해 봐라.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당장에 해석이 잘 안 되면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이에 대한 답을 다른 성경에서 찾아라. 구약의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해 달라고 하는 발락의 말을 듣고 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만 하겠다고 했고, 실지로 가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했지만 사실은 남이 안 보는 뒤로 가서는 발락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이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다고 발락에게 가르쳐 줘서 이스라엘 청년들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고, 또 행음하게 해서 저주받게 했다는 것을 느:와 계:에서 밝히고 있다.
구약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고 하자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라고 했다.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서 자기가 병이 들면 히스기야처럼 자기의 생명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옳은 기도일 수도 있고, 잘못된 기도일 수도 있다. 히스기야 벽을 보고 돌아앉아서 기도한 것은 본받을 게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을 내세우면서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한 것도 본받을 게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옳은 기도를 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들어주셨기 때문에 옳은 기도라고만 보지 말아라. 왜냐? 이 기도를 들어줌으로써 생명을 연장받은 기간에 낳은 므낫세의 악행을 통해 히스기야의 단점을 드러내 주기 위해 응답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금의 자기에게 ‘너는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하신다면 히스기야의 수명이 15년 더 연장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자기의 수명도 연장해 달라고 한다면 10년 정도 연장해 주시겠느냐, 20년 정도 연장해 주시겠느냐, 아니면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느냐? 히스기야의 수명을 연장해 주신 것은 자기도 이런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니라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 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해 주신 것이니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살라는 거다.
그렇다면 수명을 연장받은 자기는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므낫세를 낳아야 하겠느냐? 수명을 연장받고 낳은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는데, 이 므낫세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를 알고 자기의 생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서 15년이든, 몇 년이든 연장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이 기도는 맞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깨달으려면, 첫째는 성경을 다독해야 한다. 다독을 안 하면 성경 전체의 내용의 흐름을 파악해서 각각의 내용을 연결해서 구원도리를 캐내지 못한다. 일단은 성경을 다독해야 계시가 풀리는 면이 빠르다.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는 것이니 어떤 성경을 봐도 우리의 온전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지식적으로도 온전성이 나와야 하고, 지혜적으로도 온전성이 나와야 하고, 도덕성적으로도 온전성이 나와야 한다. 선 사랑 거룩 진실 면에 온전성이 나오면 옳음의 사람이 되는 거고, 이 사람은 능력자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속성을 가지면 옳은 지혜지식자요, 옳은 도덕성자요, 이 사람은 말에서 능력이 나오고, 판단하는 것도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속성을 기준해서 되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물질이나 사람을 기준해서 되는 게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합동해서 연합해서 결합해서 누구 하나를 바로 만드는 일을 하시느냐? 바로 나다. 이걸 생각해 봐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어디에 기준을 맞추느냐? 어디에 기준을 맞춰서 일을 하는 것인지는 자기의 언행심사로 나타나게 된다. 온전을 벗어난 것은 전부가 거짓이고 이단성이다. 자기가 온전을 벗어나면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 바 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존재적으로는 다 천국에 들어가지만 온전으로 되지 않은 성분은 부활 때 빠져버려서 천국에 못 올라간다.
성경으로 구속사적인 사건은 이미 다 주었으니 신경을 써서 읽으면 역사적인 면은 누구나 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 들어가 거기에서 영인성장 면의 하나님의 온전으로 되는 이치와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헛믿는 거다.
목사가 진리본질로 가르치는데 교인들이 도망갈 수도 있다. 그러면 육덩이로 가르치면 한 명도 도망을 안 가느냐? 육덩이로 가르쳐도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목사는 무슨 목적으로 교인들에게 교훈해야 하겠느냐? 남이 목사라고 부르든 박사라고 부르든 이런 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을 의식하면 그 목회는 외식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과 이해타산을 하나님의 본질이 맞춰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에 맞춰진 교훈이고 언행심사라야 사람이 바로 선다. 안 그러면 넘어진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을 세워라. 진리를 세워라. 목사와 교인의 관계도 진리로 연관되어야지 인정정실로 들어가면 서로가 죽는다.
믿는 사람의 마음 바탕이 하나님 앞에서 맑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 마지막 때는 별들이 땅으로 떨어진다고 했으니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영적인 면이 어두워지고 캄캄해진다. 모든 사고방식이 땅으로 속화된다. 이게 세상 끝이다.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자기의 신앙정신과 사상이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으로 고차원적으로 성품화 되어가는 건지, 아니면 귀만 높은 건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없이 귀만 높다면 이 사람은 개인적인 종말이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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