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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0:2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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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0장 27절-44절: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27절-40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느냐? 사두개인들이다. 바리새교인들은 부활이 있다고 한다. 부활이 없다는 자들이나, 있다고 하는 자들이나 예수님을 믿어도 이룰구원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모두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똑똑히 실력을 쌓아서 나오는 게 바로 배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어도, 교회에 다녀도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들을 때 한 이치 한 이치 영능의 실력, 믿음의 실력의 깨달음을 받아야 옳은 교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펄펄 뛰기만 하고, 고함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믿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자기 주관성대로 계획한대로 일을 이뤄달라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는 자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상당히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그런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비춰볼 때 깨달음이 없다.
예수를 믿어도 깨달음이 없는 믿음, 예수 믿으면서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자 하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이뤄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 년을 믿어도 평생 그 모양이다.
예수 믿으면서 은혜도 못 받고 항상 뒤따라 다니며 아는 것도 없이 교회만 계속 다닌다면 무슨 보람이 있느냐? 예수를 믿어도 바른 정신을 가지고 바르게 믿어야 한다. 왜냐?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이 있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을 가지고 예수님께 부활을 캐묻는 사두개인들이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묻는 정신 생각 마음들이 영적인 뜻으로 묻는 거냐,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묻는 거냐?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묻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육적인 생활을 위해서 말씀하는 거냐, 영인성장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거냐? 영인성장이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예수 믿으며 부자 되고 싶어서 예수 믿고, 병 낫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다. 그게 주로 돼 있다. 쉽게 말해서 육신의 병만 고치려고 하지 육신의 병이 들기 전에, 또는 병이 들 수밖에 없는 자기의 성격 성질을 고치려고는 안 한다. 그러니 사람이 몸이 고쳐져도 그 성격 성질은 그대로 갖고 있으니 계속 죄를 안 짓겠느냐? 또 큰 병이 안 들겠느냐?
집에서 자녀가 부모의 말을 안 들으니 ‘왜 말을 안 듣느냐’ 하고, 학교에서는 공부를 못하니 선생님이 ‘왜 공부를 못하느냐’ 하고, 교회에서는 말씀을 등한시 하니 ‘왜 네가 영인성장 면에 게으름을 피우느냐’ 한다면 그 자식이 뭐가 되겠느냐? 영인성장이 되면 기능과 지능 면에 영특해지고 총명해지고, 그래서 신:에 ‘첫째가 되고 머리가 된다’ 하는 건데 왜 그 말씀을 안 믿느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깨닫게 하고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려는데 오늘날 어떻게 예수를 믿는 건지? 자꾸 먹고 마시고 편히 살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니 남이 편히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게 보이면 그게 부럽고, 자기는 그렇게 안 되니 심통이 난다. 그러면 남이 일할 때 자기는 뭘 했느냐? 남이 깨어있을 때 자기는 뭘 했느냐?
이 세상에서도 게으르고 배우지 못하면 사람이 뚝뚝 떨어진다. 아는 면에서도 떨어지고, 게으르니 가난으로 가난으로 자꾸 떨어지는 수밖에 없는 거다. 건강을 위해서 노력을 안 하면 병이 들 수밖에 없는 거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놓고 왜 신세타령을 하고 팔자타령을 하느냐? 예수를 믿되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바로 살아봐라. 왜 이방인보다 못하겠느냐? 성경의 약속을 왜 헛되게 만들려고 하느냐?
34절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자녀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라고 하셨는데, 안 믿는 사람도 시집 장가를 가고, 믿는 사람도 그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육의 생각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아니면 그 속에 들어있는 영적 계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심인지?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하늘의 뜻을 담아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오신 이 분이 인간의 말을 빌려서 이 말씀을 했다고 해서 현재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했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의중을 깨달아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35절에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얻은 자들은’ 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부활이 됐다는 거냐, 안 됐다는 거냐? 부활이 안 된 거다. 부활이 안 됐지만 부활하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는 일이 없다고 말씀을 했는데 이 말씀이 현재 우리들의 육을 생각하며 하신 말씀인지, 영의 뜻을 가지고 하신 말씀인지?
현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느냐, 안 하느냐?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게 전부다. 그 이상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뜻이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으냐, 다른 것이냐? 다르다. 그러면 다른 점이 뭐냐? 둘이 합심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이뤄 가는데 들어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합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게 아니고 둘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자는 마음으로 가는 거지만 살다가 세상의 풍파가 오니 네 탓이 나오고 싸우고 그러다가 헤어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란 예수님을 바로 믿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실지로는 이런 자들도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영적인 뜻인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은 자기의 정신 사상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것에 마음이 집착이 돼서 ‘그것이 내 하나님이다’ 하며 예수를 안 믿는 자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적이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믿는 부부는 육신적으로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으나 그 정신과 사상이 목적적으로 하나님 외에 또 다른 것을 붙들고 그것에 만족을 얻고, 그것이 하나님인 것처럼, 그것이 자기를 살려주는 것처럼 그것에 자기 일생의 소망을 두지 않는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이 시집 장가를 갔는데 예수 믿는 목적이 딴 데 있다면 현재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지금의 남편이나 아내를 버리고 그리로 가게 된다. 이치가 그렇게 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아니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누림이 들어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돈 많고 잘 생긴 사람 쪽으로 마음이 가는 거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현재 시집가고 장가 간 그게 소용이 없다. 몇 번이라도 자꾸 가게 될 수 있는 거다. 이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쪽으로 부부의 마음이 가는 게 아니라 딴 데로 가버린 거다. 이것은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아니다.
신25:5은 영적 이스라엘의 집을 세우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일을 맡아서 영적 이스라엘의 집을 세워라.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자녀들에게로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내려갈 수 있도록 그 집을 세우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집을 세우라 그 말이다. 영인성장을 하라는 말이다.
믿는 우리는 영인성장 때문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영인의 자녀를 기르기 위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은 영적 이스라엘 집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 세상에 국한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시집가고 장가가라는 목적은 영적 이스라엘 집을 세우라는 것이지 육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애굽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과는 목적이 다르다. 애굽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세상목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함이다. 우리는 자기 집 식구 자녀들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한다.
구약성경에 노아의 세 아들이 장가를 가서 새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짓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를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신다’고 했다. 그러나 노아의 세 아들은 장가가는 목적이 다른 거다. 그러면 노아의 세 아들은 왜 장가를 갔느냐? 방주를 지으려고 장가를 갔다. 며느리까지 합쳐서 이 일을 하니 일이 잘 된다. 하나님의 심판 때 방주 안에 들어가서 다 구원을 얻는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시집가고 장가를 가느냐? 이스라엘 집을 키울 줄을 모르고 마지막 방주를 지을 줄을 모른다. 맨 세상축복으로 빠지니 심판을 받고 만다.
신25:5에서 부부생활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괴롭게 하거나 시험에 들게 만든다면, 즉 주님이 원하는 가정을 만들지 않는다면 5절-9절에 보니 ‘장로들 앞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라.’ 이러면 그 사람 그 가정은 저주와 수치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볼 때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백 날 성경을 읽어도, 백 날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을 바로 못 믿고,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들은 세상으로 다 나가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가정, 구원의 가정이 안 된다. 우리교회의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옳은 진리로 가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과거에 알지 못해서 잘못 가르친 것이라거나, 알지 못해서 내버려둔 거라든지 바로 가르쳐야 한다. 자식을 우상처럼 만드는 것은 안 된다.
‘장로들 앞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라.’ 얼마나 저주와 수치스런 일이냐? 이런 역사의 크고 작은 사건이 오늘날 자기 가정에 임하는 줄 알아야 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가난하게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크고 작은 사건에서 그걸 이기지를 못해서 얼굴이 수치스러워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격의 수치성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모든 복을 다 허락하시는데,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이런 이런 복을 받는다’고 누누이 말씀하시는데 자기는 정신이 세상에 가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 이스라엘이 부강해지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일이 잘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를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위주로 산다면 그 집은 영적 이스라엘로부터 끊어진다. 그 정신 사상이 영적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 그런데 현실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게 눈에 보이는 물질로 돼 있으니까 그 물질에 집착이 돼서 그게 자기를 살려주는 것처럼, 그것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들어 주는 것처럼 소원 목적이 그리로 가 있다.
33절에 그들은 육신에 속한 육의 생각, 세상에 속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께 물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35절, 36절에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함을 얻는 자들은’ 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육신의 뜻으로 물은 그들의 대답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육에 속한 안 믿는 사람들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답을 한 것이냐, 영에 속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을 위해서 대답을 하신 것이냐? 후자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현재적 자기에게 하는 말씀이다. 현재적 자기가 예수를 믿으면서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에 등 기대고, 세상으로 소원 목적이 들어가 있고, 돈이면 다이고, 차면 다이고 한 그런 정신이 들어가 있다면 그 자는 생명의 부활로, 의의 부활로 합당함을 받지 못하는 거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 믿으면 너의 가정이 영적 이스라엘 집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깃드는 집으로 되어지지를 않는다. 끊어진다. 많이 볼 수 있다. 그 정신 사상은 하나님의 축복의 계대에서 끊어진 줄 알아라.
35절에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는 것은 남녀가 시집 장가도 안 가고 혼자 살았다는 말이냐? 그런 뜻이 아니다. 신앙정조를 팔며 세상과 짝짓는 신앙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달라. 뭣 달라’ 하는 이건 전부 하나님 앞에 신앙정조를 판 사람들이다. 사람의 중심 사상 정신을 알아야 한다.
35절에 ‘저 세상과.’ 이 말씀은 예수 안에서 육신이 죽은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고, ‘부활함을 얻기에’ 하는 이 말씀은 ‘부활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현재 이룰구원으로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신앙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37절: 가시떨기에 붙는 불이란 죽은 가시나무 같은 영적 이스라엘에게 불 같이 일어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심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애굽에 잡혀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해서 약속의 땅으로 힘차게 탈출하는 그 영적 이스라엘의 대열. 노예생활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해 힘차게 나가는 그 대열. 앞에서는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를 하고, 그 뒤로 모세가 따르고, 그 뒤로 백성들이 따르고. 이걸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영적 이스라엘의 이룰구원을 향해 힘 있게 나아가는 대열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돼 나가는 대열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이 험난한 세상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힘 있게 인도하는 그 체험을 자기 속에서 깨달음으로 느끼며 가야 한다. 이게 영적 이스라엘이다. 육적 이스라엘은 말만 예수를 믿는다 뿐이지 정신이 세상으로 썩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 맨 물질타령, 집 타령, ‘어떻게 사나’ 하고 있다. 이건 애굽 같은 세상에 붙은 거다. 모세로 통하여 이룰구원의 부활의 신앙의 본질을 미리 보여줬는데도 안 믿는 세상과 짝짓는 신앙은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신앙이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유대백성이면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는 신앙이다. 대제사장이 이 사두개교파에 붙었다. 바리새교인들은 부활은 믿으면서 현재 자기들의 마음속에 부활의 성질로 거듭나는 것은 없다.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렇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는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부활을 믿으면서도 부활의 참 정신을 가르쳐 주는 예수를 죽여 버렸으니 이들은 부활이 없는 신앙이구나.
오늘날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활이 없는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많다. 이룰구원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그 면이 아니고 예수 믿으면서 세상으로 향해져 있다. 그러니 이룰구원 차원에서 영능의 실력이 어디 있겠느냐? 예수 믿으면서 육덩이만 키웠지 영인성장이 어디 있겠느냐?
38절-40절: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느냐? 산 자의 하나님. 어떤 자에게 산 자의 하나님이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현재 이룰구원으로 살고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현재 이룰구원이 죽어있는 자의 하나님은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산 자가 있고, 죽은 자가 있다. 예수를 믿어도 산 정신이 있고, 죽은 정신이 있다. 하나님은 현재 이룰구원을 이루지 않고 있는 자의 하나님은 아니다. 이게 안 믿어지고 부정하는 자는 세상과 짝지은 사두개인의 세상적인 신앙과 같은 정신이다.
그리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서기관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옳다고 했다. 그러나 옳다고 말은 하지만 이 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이들은 모세의 사건을 표면적 역사적으로 아는 지식은 가졌지만 이룰구원이 없는 신앙이다. 현재 자라지를 못하는 신앙이다. 오늘날도 그런 기독자가 많다.
예수님 당신의 주위의 신앙자들이 그랬었듯이 우리의 주위에서 그런 이중 삼중으로 색깔이 다른 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비주의로 나가는 예수 믿는 자들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구복주의로 나가는 예수 믿는 자들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사회주의로 나가는 예수 믿는 자들도 바른 신앙이 아니다. 이건 다 우리의 적이다.
자기 주관성으로 믿어나가는 자는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안 맞는 것은 안 받아들인다. 이건 교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100% 자기 마음에 맞느냐, 안 맞느냐?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해도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다 못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도 분별을 못하면서 어떻게 성경에 있는 것을 분별하겠느냐? 못한다. 성경도 안 읽고 성경의 뜻도 못 깨달으면서 뭘 분별하고 깨달을 게 있겠느냐? 옳은 이치만 잘 깨달으면 바로 돼 들어가진다. 집 짓는 사람이 집을 지을 때 집을 ‘지을만한 재목감인지, 오래갈 것인지’ 분별을 못하느냐?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것은 영원히 천국까지 가는 것이고, 이건 임시성이구나’ 하는 이걸 분별을 못하는 거냐? 천국과 세상을 분별을 못하며 예수를 믿는 자가 많다.
41절-44절: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 표면적 역사적으로 나타난 면만 보면 그렇게 보인다. 성경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록이 돼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영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기가 어렵고, 역시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서도 성장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그 면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시편에 기록되기를 다윗이 그리스도를 무엇이라고 불렀느냐? 44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먼저 앞서 계셨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그 이전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하나님 나라에 계셨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하늘에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불려지게 오신 이유가 뭘까? 다윗의 후손으로 불려질 수 있도록 오신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의 족보에 들어 있느냐? 다윗의 족보에 들어있다. 다윗의 후손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의도성은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오시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려는 이게 들어있다. 두 번째는 또 다윗과 같은 신앙자들을 존귀 영광으로 올려주고 싶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통해서 당신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신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리스도는 아무 가정이나 타고 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 면에 욕심이 없느냐? 오늘날 부모가 자녀를 학원에 보내고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그 자식이 이 세상에서 훌륭하게 되어 그 가문이 존귀 영광스럽게 되려고 그 애를 쓰는 건데, 예수 믿는 게 그것만도 못한 거냐?
오늘날 예수 믿는 자들이 밤낮 성경을 읽으면서 ‘너의 가정으로, 너의 자녀로 복되게 해 주겠다’ 했는데도 세상에 푹 박혀서 세상을 못 이겨서 세상에 절절 매고 있으니 그런 가정에 하나님의 구원계대의 역사가 일어나겠느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왜 하나님이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 놨느냐? 너를 구더기나 나무나 돌처럼 만들어 놨다면 이런 소리도 안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 놨으니 이렇게 하심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이 있는 건데 왜 그 욕심이 없을까? 구원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침저녁 밤만 먹고 똥만 싸다 죽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식물인간처럼 돼서는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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