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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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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1장 5절-9절: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너희 보는 이것들’이란 당시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 말씀 한 마디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전을 헐어버리는 마당에 다른 무엇을 남겨놓겠느냐? 성전이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요, 죄 사함을 받는 곳, 미래 알게 하는 곳,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곳, 알 수 있는 곳,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집 등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치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물은 성전인데 이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데 다른 그 무엇을 남겨놓겠느냐?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곳은 예배당이다. 성전은 하나밖에 없다. 왜 하나밖에 없을까? 그 의미는 성령님은 중생한 성도 개개인마다의 자기의 중생한 영 속에 내주해 계신다. 질적인 면에서 하나뿐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것 하나뿐이다. 딴 건물은 아무리 크고 찬란해도 그건 성전이 아니다.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본질인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본질의 신앙을 가진 성도에게 하나님이 계신다.
세상적인 요소로 자기를 많이 꾸몄다고 해서 거기에 성령님이 계시느냐? 아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곳에 계신다. 세상 불타질 냄새나는 심령 속에는 성령님이 안 계신다. 기본적으로 중생한 영 속에는 내재하는 거지만 소원 목적적인 면에서 세상과 세상 것을 가지면 성령님이 역사를 안 한다는 의미에서 거기에는 성령님이 안 계신다고 표현을 한다. 무너질 것에 목적을 두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거기에다 충성봉사를 잘 하면 주님이 나중에 충성봉사한 상을 주겠느냐?
본질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집을 짓던 건물을 짓던 그건 하나의 방편이지 목적은 아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천 일 제단을 쌓는데 그 제단의 소원 목적성의 질이 예배당 건축에 있다면 이건 목적관이 틀렸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써서 그렇게 해도 그건 질적으로 목적관이 틀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생활을 하다보면 심령의 전은 계속 지어져 간다. 그 면으로 짓다가 보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예배당이 필요해서 방편적으로 예배당을 지을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물질이 준비가 되어서 ‘이만하면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겠구나’ 하게 되면 지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그런 준비도 아닌 종교적 목적적인 면으로 ‘하나님, 예배당을 건설하는데 물질을 주십시오’ 하게 되면 이건 이방인이 구하는 것과 똑같은 질이 돼 버린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그 말대로라면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한다. 아니다. ‘아무 것도 못하겠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더 잘 되어갈 수도 있다. 왜냐? 세상은 다 물질로 돼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려고 만드셨다. 이미 준비가 다 돼있는 것이니 있는 그것을 가지러 갈 필요는 없는 거다. 주님의 주머니 속에는 돈도 들어있고, 집도 들어있고, 자가용도 들어있다. 없는 게 없다. 당신의 말씀을 잘 듣는 지혜롭고 총명하고 영특하고 머리가 될 수 있는 그에게 이걸 다 맡기신다. 지혜로운 솔로몬에게 맡기더라.
하나님께 임시적인 것을 구하게 되면 그렇게 하다 보니 우연히 기도한 게 얻어지면 ‘하나님이 들어주셨구나’ 하게 되고, 이러면 자꾸 그런 식으로 신앙이 돌아가게 된다. 이건 세상, 물질을 못 떠난 신앙이다.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신28:도 읽지만 ‘네가 내 뜻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준다’ 했는데 ‘내 뜻대로 하면’ 하는 건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으로 한다면’ 하는 것인데, 나를 만드신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대로 살지를 않고 자꾸 딴 데로 방향을 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니 내가 잡으러 가려고 하면 저 쪽으로 당겨놓고, 또 잡으러 가려고 하면 또 저 쪽으로 당겨놓는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픈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가 생각나게 해 주신다. 그 이치 안에는 하나님의 정신 사상이 들어있고, 지혜가 들어있고, 도덕성도 거기에 들어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다 빼앗기게 되어있다. 성경에 보니 처와 자식, 남편, 농사지은 걸 다 빼앗기게 돼 있다. 사망계 안으로 다 흘러간다. 수십 년을 믿어도 성령의 열매는 없다. 다 날아가 버렸다.
성전을 헐어버리는 마당에 무엇을 남겨놓겠느냐? 그런데 무너질 것에 왜 돈을 쳐 바르느냐? 썩어질 것에 왜 돈을 쳐 바르느냐? 주님을 잘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세상 사람들 눈에 뜨이게 하려는 것이냐?
그런데 미석으로, 아름다운 돌로 만든 성전을 왜 무너뜨리실까?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다. 솔로몬으로 통해서 지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걸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 리모델링으로 하나하나 다 뜯어고쳐서 하나님의 설계대로 안 되어있다.
성전은 지구상에서 만든 이후 마지막 날까지 하나뿐이다. 그런데 이 성전을 왜 무너뜨리실까? 1. 성전건물의 설계가 엉터리였기 때문에? 2. 모든 교인들과 지도자들의 예배의 소원 목적이 세상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에? 어느 거냐? 후자다. 모든 교인들과 신앙의 지도자들의 예배의 소원 목적이 세상적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 성전은 리모델링이 되어서 변질이 된 거다.
5절-9절에 보면 보이는 이것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는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떤 징조기 일어날 것을 가르쳐 주었느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재난의 징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지 모르면 예수 믿는 효력이 없고 재난에 휘말리게 돼 있다. 만일 날씨가 흐려있는데 찬 공기가 느껴진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눈이 올 것이다. 비오는 날에 바람까지 불면 체감온도는 어떻게 되겠느냐? 내려간다.
그 전에 어떤 징조가 일어날 것이냐? ‘주님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미혹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이걸 알라.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서 오셨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까 ‘나는 천국에서 왔다’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복음을 전하셨고, 그리고 교훈으로 우리를 하나님처럼 속성적으로 온전케 해 주셨고, 소원 목적이나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도덕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해 주셨다.
예수 믿는 사람의 속성 인격 성품이 하나님을 많이 닮아나가면 이해타산 평가성 소원 목적이 굉장히 고상하고 도덕성이 높은 거다. 머리 쓰는 거 하며, 세상 사는 게 굉장히 높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어찌 너는 나를 닮았느냐’ 한다. 그런데 어떤 교인에게는 ‘저게 마귀를 닮았구나’ 하게 된다. 인간의 세계도 보면 어머니 아버지를 반반 닮든지, 어느 한 쪽을 닮든지 해야 할 텐데 전혀 안 닮았다면 의심이 안 되겠느냐?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안 닮고 마귀 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세상소원 목적을 가지면 ‘저게 마귀자식이 아닌가’ 하게 된다.
우리를 온전케 해 주셨고, 하나님의 온전자로 영능의 무장된 실력자로 만들어 주셨고, 지금도 만들어 주시고,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의 실력대로의 누림성이 들어있다. 예수 믿는 것이 이게 아닌 다른 목적으로 돼 있다면 그건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했어도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 시 하기 때문에 이는 미혹거리다. 이런 게 참 많다. 특히 기독교 종교적인 세계에서 건물을 가지고,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종교적인 덩어리를 가지고 자랑을 하는 게 참 많다.
미혹을 안 받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듣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성품적으로 인격적적으로 이치적으로 진리 실상화로 잘 만들어지면 그 어떤 교훈의 가르침에도 속지를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처럼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모른다면 반드시 외식으로 껍데기로 흐르게 돼 있다. 껍데기를 보고 찾아가고, 껍데기를 보고 욕심내고, 껍데기에 눈독을 들이게 돼 있다. 가견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가지고 신앙 믿음을 판단하게 되고 정죄하게 된다. 불에 타질 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아서 ‘저 교회는 작고, 저 사람은 믿음 없고’ 자꾸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사람 못 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이름으로 온다.’ 그렇다면 표면적으로 볼 때 예수이름으로 오는 이 자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다. 예수이름 이름으로 오니까. 이걸 전제를 하라.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 들고 찬송가 들고 예수이름으로 오지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오지를 않는다. 우리가 성경을 들고 전도갈 때 예수이름으로 가는 거지 석가이름으로 가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그 말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라면 모든 기독교인으로 일단 전제를 하라. 모든 기독교인 안에는 목사도 들어있고, 전도사도 들어있고, 장로도 권사도 권찰도 평신도도 모두 들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미혹자가 다 예수이름으로 전도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이름으로 전도를 하기는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과 천국과 하나님의 뜻을 자랑을 하는데 다른 교인들은 ‘우리교회 크다. 사람도 많다. 우리교회 목사는 박사다. 장이 몇 개다. 교회 많이 짓고’ 이런 걸로 자랑을 한다. 이건 질이 다른 것이다. 그 말이 어디에 뿌리를 박고 나오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이다.
미혹자가 예수이름으로 온다. 그러니까 그 미혹의 그 질은 세상과 세상 것에 들어가 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 들어가 있다. 그러니 예수이름으로 올지라도 이런 걸 전한다면 천국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다. 쉽게 말하면 세상복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자’ 하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수십 년을 믿었다면 지금 얼마나 잘 사느냐? 기도 할 적마다, 철야기도 할 적마다, 집회 때마다 그렇게 세상적인 소원을 아뢰었는데 다 해결이 되었느냐? 그렇게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올라가야 부자냐? 밥을 굶기 때문에 잘 사겠다는 소원 목적을 가졌느냐,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내가 더 가져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하고 세상에 있는 것을 자꾸 구한 것이냐?
신28:에도 있듯이 이런 자들은 영의 눈으로 볼 때는 다 포로로 잡혀갔다. 소원 목적적으로 다 포로로 잡혀가 버렸다. 그러니 자유가 없다. 그렇게 오래 예수를 믿었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이단이라고 했는데 포로로 잡혀가니까 자기 마음도 어쩌지 못하고 세상으로 흘러가는구나.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돼버렸다.
세상복음을 따라가는 자들이 간혹 “‘진리 진리’ 하는 네가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 하고 우리를 살살 건드린다. 자기는 예수 믿고 날마다 울고 부르짖고 해서 어딘지 모르게 펴진 것 같고, 부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자기 기도를 들어준 것 같으니까 그런 걸 간증을 한다. 세상부자 된 것을 참 복인 양 간증을 한다. 간증을 하니까 다른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또 따라 하게 된다. 그게 미혹자다. 그런 자가 많이 나온다. 예수를 믿어도 만족이 없으면 배가 고파서 이 집회 저 집회에 찾아가게 돼 있다.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고 있으니 구절적으로 봐도 그건 틀렸다.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을 걸기를 ‘나에게 절하라. 세상 것을 다 준다’ 했다. 실은 세상 것은 자기 것도 아니다. 그게 미혹이다. 그러니까 예수이름으로 왔을지라도 그 교훈의 질이, 가르침의 질이 세상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건 마귀가 그 종을 붙잡고 온 것으로 알아라. 겉은 얼마든지 예수이름을 둘러써도 속은 미혹으로 들어가 있다.
미혹은 뭐냐? 세상과 세상 것을 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는 자기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고방식이 이성적 철학, 심리적 작용 그걸 다 사용한다. 그게 세상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게 참 많다. 그런데도 알지를 못한다.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뿌리를 박고 나오는 사상인지를 모른 채 예수이름으로 하기만 하면 믿음으로 안다. 우리는 목적이 세상과 세상 것이라면 ‘아니다’ 라고 단정을 하라.
미혹자는 ‘나는 예언 방언을 하는 능력자다. 나에게 다 오라.’ ‘나는 병을 잘 고친다. 모든 병자는 다 나에게 오라.’ ‘나는 교회부흥을 잘 시킨다. 교회부흥을 원하는 자는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나는 예배당을 크게 지었다. 짓고 싶으냐? 나에게 와라.’ ‘들었네. 꾸었네. 보았네’ 하며, 사람의 유전과 일반풍습과 일반사회 윤리 도덕성을 가지고 주장을 한다. 교회의 직분이 있던 없던 그 면에 전문성을 가지고 예수이름으로 온다 그 말이다.
엊그제 무슨 대학교에서 날아온 게 무용으로 전도한다고 춤추는 아가씨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한다. 이것도 예수이름으로 들어가 있다. 춤추고 술 팔고 하는 건 이방인들이 하는 거다. 그건 그들이 하게 내버려 둬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게 따로 있는 거고, 이방인들이 할 게 따로 있는 거다. 무조건 예수이름으로 하면 복음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점치는 것도 예수이름으로 점을 쳐라. 무당이 돼서 예수이름으로 하라. 그러면 예수 잘 믿을 게 아니냐? 그런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면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는 것이다.
예배당 지을 때 믿음으로 지었다고 하지 믿음으로 안 지었다고 하겠느냐? 그러면 예배당 건물을 꼭 믿음이라야 지을 수 있는 거냐? 믿음이 아니라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집을 지어놓고 상량식을 하는데 교회에서도 예배당을 지으면 이방인들처럼 상량식을 한다. 어떻게 이방풍속과 똑같으냐? 세를 얻어서 예배를 드리다가 건물을 지으면 교회 창립식도 한다. 그런 사고방식이니까 목사의 정년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이걸 미혹의 사상인 줄을 전혀 모른다.
예수님이 생일잔치를 몇 번이나 했느냐? 한 번도 안 했는데 지금 본인은 몇 번이나 했느냐? 이방풍습 습관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 걸 하나 못 끊어서 부모형제가 ‘왜 안 오나’ 하고, 자꾸 말이 되고. 우리 입장에서는 이방풍습 습관을 질질 따라가면 안 된다. 그러면 잡아먹힌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예수 믿으면서도 성경과는 관계가 없이 이방풍습 습관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면 세상이 그 사람을 다 좋아한다. 그렇게 예수를 믿고 싶으냐? 세상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 해 주면 세상은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입으로 그들에게 예수자랑을 하게 되면 탁 끊어진다.
우리가 그들의 소원대로 맞춰주면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은 참 마음도 넓고 좋구나’ 해서 올 것 같으냐? 아니다. 그들은 자꾸 그런 사고를 가지고 날 부려먹고 이용해먹고 ‘저 사람 참 착실하다. 저 사람은 의례히 그렇구나. 그러니 궂은일은 그 사람을 불러서 하면 된다’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복음의 칼은 어디로 가버렸느냐? 이건 영의 눈으로 말을 하자면 성도라는 여자가 세상이라는 이 남자가 부르면 가서 수종들고, 저 남자가 부르면 가서 수종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가 엄청나게 많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으냐? 자기라는 자기는 실컷 이용당하고 허무에 빠지게 된다. 그게 신앙 믿음이냐? 세상에게 비위 맞춰주는 게 신앙 믿음이냐?
여전도회 예배 때 의례히 나오는 성경이 룻기다. 그걸 들고 시어미를 잘 봉양하라고 한다. 룻은 그게 아니다. 나오미의 가정에 하나님의 진노가 붙은 것을 보고 그 진노를 꺼뜨리려 올라가는 거다. 그 비상한 각오로 자기 체면 얼굴이 다 깎일 걸 예상하고 올라가는 거다.
교회의 직분이 있던 없던 예수이름으로 전문성을 가지고 와서 그 면을 자랑을 하니까 그게 부럽고 신비스러워서 따라가는 거 전부는 미혹거리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가 열려야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건데 그 면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누가 예수이름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활동을 크게 하나’ 하는 이 면을 보고 따라간다. ‘건물을 누가 크게 짓느냐? 어느 단체가 더 크냐? 내가 어느 발판을 밟아야 세상에서 빨리 이름을 날리겠느냐?’ 하는 이게 다 예수이름으로 오는 미혹거리다.
미혹거리가 ‘나는 미혹거리다’ 하고 오느냐? 아니다. 자기 집 재산을 털 도둑이 ‘나는 도둑이요’ 하고 이름표를 붙이고 오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영의 눈으로 보면 기독교 안에 강도도 많고, 도둑도 많고, 자기를 잡아먹는 사단 마귀가 보낸 종들이 수없이 많다.
이걸 뭘로 알 거냐? 기도해 보면 아느냐? 사람을 보려면 그 사람이 입을 열어서 무엇을 주장하는지, 그 목적을 어디에 두고 말을 하는지를 보면 나타난다. 악령인지 성령인지 목적관을 보고 알 수 있고, 거짓 종인지 참 종인지도 목적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예수 믿어 천국 갑시다’ 한다면 말 자체는 맞는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하니까 그 대답이 ‘하나님 앞에 충성봉사 하고, 열심히 믿으면 천국갑니다’ 한다면 이건 미혹이다. 이런 게 참 많은데도 옳은 교훈을 들으면서도 믿기 전의 그 생각을 못 버리고 지금도 속고 있고 속아 들어가고 있다.
흑백은 분명히 나누어지는 거다. 그게 거룩이요 구별이요 성령님의 역사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날 선 검이니 이걸 가지고 영과 육을 쪼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사상, 외치는 메시지를 쪼갠다. 눈에 안 보이는 걸 자르는 이 칼이 얼마나 날렵하겠느냐? 기독교 신앙의 세계는 눈에 안 보이는 걸 자른다. 구별 분별한다. 이게 영의 눈이요 신령한 눈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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