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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없습니까?”
욥기 13:1~19
사람은 동물이 아닙니다. 동물은 오직 본능에 따라 삽니다. 사람은 본능을 절제하거나 초월하여 존재합니다. 사람은 기계도 아닙니다. 짜인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도 아닙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현재의 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은 질문을 낳습니다.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정답을 중요시합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답도 없습니다. 인생을 잘 살려면 답을 알아내기보다 질문하는 법을 터득하여야 합니다.
제가 보는 욥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왜 고난 당하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욥은 잠자코 고난을 수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욥의 질문은 절박합니다. 우리가 욥에게서 배우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답을 모를 때는 마땅히 질문하여야 합니다. 질문거리가 있는데 질문을 하지 않으면 동물이거나 기계이거나 노예입니다. 사람이란, 특히 신앙인이란 질문하는 존재(Homo Rogabat)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일은 불경스럽거나 불신앙이 아닙니다. 도리어 질문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병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에는 질문이 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질문에 답을 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성도는 성숙해집니다. 세상에 대하여서도 질문하여야 합니다. 원칙도 없고 철학도 없이 오직 힘만 숭배하며 미신을 조장하고 맘몬을 섬기는 세속 권력에 대하여 두 눈 똑바로 뜨고 질문해야 합니다. 특히 언론은 권력에게 질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언론이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고 권력의 홍보회사로 전락한다면 시민은 불매운동이라도 벌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자기 자신에게도 하여야 합니다. 기득권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다그쳐야 합니다. 교만에 이르지 않고, 타성화되지 않도록 늘 깨어서 스스로 질문하여야 합니다. 좋은 질문이 많아질수록 좋은 믿음에 이르고, 세상이 밝아지고, 자신도 건강해집니다.
생각하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는 것 없는 거짓 선생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이런 선생들은 까다롭고 어려운 질문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선생은 자기가 배운 것만 가르칩니다. 마치 초등학교 2~3학년을 30년이나 다닌 듯 구구단에 대하여서는 필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다음은 모릅니다. 인수분해와 미·적분을 물으면 얼굴을 붉히고 불쾌하게 생각하며 화를 냅니다. 되지 못한 선생입니다. 선생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질문을 긍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질문을 불온하게 여기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자기주장만 강조하는 독재자들이 그렇습니다. 시민과 소통하기 위하여 집무실을 옮겼다는 대통령이 약속한 도어 스테핑은 하지 않습니다. ‘왜?’라고 질문하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시민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합니다. 되지 못한 권력입니다. 민주제도란 어떤 질문이라도 허용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자유로운 질문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마다 성도에게 질문하기를 가르치므로 좋은 믿음에도 이르고, 세상도 좋아지고, 성도들도 성숙할 수 있기를 빕니다. 지옥은 질문이 멈춘 곳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주님의 뜻을 빕니다.
2023. 11. 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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